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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15화 (15/150)

# 15

15화. 승급.

짐꾼들은 자신들을 버리려했던 헌터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 바닥에선 흔한 일이고, 누구라도 그리 했을 당연한 결정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주어진 제 역할에 충실했다.

짐꾼들은 늪지에 널브러져 있는 리자드맨의 사체들을 해체하고, 필요한 부산물들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간혹 나오는 마나석도 빼놓지 않았다.

나도 짐꾼들과 함께 행동했다.

“아이고. 우리가 알아서 하겠네.”

“좀 쉬어.”

이재성을 비롯한 짐꾼들은 생명의 은인인 내가 이런 더럽고 힘든 일을 하는 것에 질색하며 만류했지만 나 또한 짐꾼으로 던전에 왔기에 역할에 충실했다.

리자드맨은 강함에 비해 챙길만한 부산물이 많지 않았기에 어렵지 않았다.

비늘과도 같은 가죽을 벗겨내고, 심장어림을 한 번 헤집어 마나석을 챙기면 끝이다.

선발대 서른 마리와 본대 백 마리로, 그 수가 만만치 않긴 했지만 이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음인지, 아니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인지 헌터들도 한 손 거들었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곳에서의 일은 조용히 묻어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강혁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부탁을 해왔다.

무슨 일을 말하는 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짐꾼들을 배려하는 척 하면서 중요한 순간에는 그들을 저버렸던 헌터들의 행동.

헌터입장에서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스톰 팀의 대외적인 평판을 생각하면,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했다.

때문에 강혁은 이를 비밀로 해줄 것을 원했다.

짐꾼들이야, 앞으로도 이 바닥에서 계속 일을 하려면 알아서 입을 다물 테니, 나만 조용히 하면 소문이 날 일은 없었다.

“그러지.”

나는 강혁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인간이 인간다운 짓을 했을 뿐인데, 뭐 대단한 일이라고.

떠벌리고 다닐 이유도 없었고, 떠벌릴 곳도 없었다.

내가 보기에, 살인멸구를 택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해줄만한 일이다.

뭐. 당해줄 생각도 없지만.

“감사합니다.”

내 하대에 강혁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금방 안색을 고치고 고개를 숙여왔다.

그래도 한 팀의 리더이니 만큼, 한 순간의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는 과오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공략을 완료하고 던전을 나섰다.

***

“태빈군. 고마워.”

“목숨을 빚졌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하게. 내 발 벗고 달려 갈 테니.”

늪지의 습한 공기 대신 지구의 혼탁한 공기를 들이마신 짐꾼들이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다.

던전을 나서는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던 그들은 이제야 한결 편한 얼굴로 살아났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짐꾼들은 예를 잃지 않는 내 모습과 한 없이 차갑던 나와의 괴리감에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들의 마음을 알기에 나 또한 모른 체 넘어가 주었다.

앞으로도 계속 마주치게 될 텐데, 괜히 불편함을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은 짐꾼 일을 해야 할 것 같으니.’

힘을 어느 정도 되찾기까지는 짐꾼으로 던전을 오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굳이 구하자면, 공략팀을 구해볼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확실히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빠르게 내공을 되찾는 게 우선이니 만큼, 당장 던전을 오갈 수 있는 방법은 짐꾼이 최선이었다.

물론 계속 짐꾼을 하려는 건 아니다.

일단 잃어버린 내공을 어느 정도 되찾으면, 곧장 D급 헌터 시험을 볼 생각이었다.

***

“형.”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옆에서 피곤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형을 불렀다.

“어.”

반쯤 졸면서 걷고 있던 형이 나를 바라봤다.

아직 죽음과 대면했던 공포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이제 짐꾼일 그만 해도 되지 않아?”

내가 물었다.

형이 짐꾼 일을 한 지 2년.

유독 나와 함께 했던 오늘만 이런 일이 있었을 리 없으니, 형은 숱하게 생사의 고비를 넘겨 왔을 것이다.

나 때문에, 돈 때문에.

이제 나도 깨어났고, 형이 굳이 위험한 짐꾼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게.”

형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나로 인해 어렵게 취직한 회사를 고작 몇 달 다니다 그만뒀다.

내가 스물일곱이니, 형이 서른.

오로지 돈만 보고 하는 직업인 짐꾼이 커리어가 되 줄 리는 없으니, 취직이 쉽지 않은 나이가 되어버리기는 했다.

그러나 돈만 아니라면, 뭘 하든 짐꾼 보다는 나을 것이다. 적어도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을 테니.

“형이 뭘 하든, 이제 내가 도와줄게.”

‘언’인 나에게 형은 고작 며칠 함께 했을 뿐인 가족이다.

그러나 고작 그 며칠간 느껴진 따스함은 내가 형을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충분했다.

형이 나를 위해서 지난날을 보냈듯, 나 또한 충분히 형의 앞날을 위해 희생할 것이다.

“큭큭. 엊그제만 해도 누워서 오늘내일 하던 놈이.”

형이 웃으며 팔을 내 어깨에 걸쳤다.

마음으로만 느꼈던 따스함이 형의 팔을 타고 온기가 되어 내 어깨로 전해졌다.

“뭐래. 그러는 형은 오늘 막 울 거 같던데?”

내 팔도 형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원하던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묻고 싶지 않았다.

형이 짐꾼 일을 계속하면 어떠랴.

조금 위험하다 한들, 언제고 내가 지켜주면 될 일이다.

지금은 내 어깨를 두른 형의 팔에서, 형의 어깨를 두른 내 팔에서 느껴지는 온기만으로 충분했다.

***

그 이후, 나는 형과 짐꾼으로 세 번의 공략에 참여했다.

형은 일단 짐꾼을 계속하기로 했다.

더 이상은 나 때문이 아니다.

이제는 자신이 원하는 꿈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한 결정이었다.

대신 앞으로는 무조건 나와 함께하는 조건이 붙었다.

그리고,

나는 형과 참여한 세 번의 공략을 무사히 치러냈다.

< 심약한 리자드맨 군락 >에서 겪었던 일은 결코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매 번 죽음의 위기에 당면한다면, 아무리 돈이 급하다 한들 어느 누가 짐꾼 일을 하려 할까.

그래도 혹시 몰라, 안전하게 E급 던전만을 택했다.

보수는 조금 덜 받더라도, E급 던전은 내가 형을 지키기에 충분했다. 위험한 일이 발생하지도 않았지만.

“태성, 태빈. 오늘도 고생했어.”

“아저씨도 고생하셨습니다.”

“아따. 형이라 부르라니까.”

이재성을 비롯한 짐꾼 아저씨들과도 처음의 어색함을 떨쳐내고, 제법 친해졌다.

매번 형이라 부르라며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리기는 했지만 그들은 죽음과 대면했던 기억을 금세 지워내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의 책임감은 죽음의 공포도 이겨낼 정도로 막중했다.

어쩌면 자신들을 지켜주었던 내가 함께 하기에 조금은 더 쉽게 이겨낼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다행이다.

고작 죽는 순서의 차이가 됐을지도 모르지만 형과 나를 지키겠다고 용기를 쥐어짜냈던 좋은 사람들이 이렇게 웃고 있으니.

***

세 번째 공략을 마치고,

좀 더 친밀해진 짐꾼 아저씨들과의 관계변화와 더불어, 세 번의 공략을 진행하는 동안, 내 개인적으로도 작은 변화가 있었다.

육체는 능력을 잃었을지언정, 살왕, 그리고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던 나의 깨달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나는 오래지 않아 굳어있던 단전을 일깨우는데 성공했다.

던전을 오가며 꾸준히 단전을 두드린 결과, 미약하게나마 내공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 뚫린 댐의 구멍을 막을 수 없듯, 돌덩이처럼 굳어있던 단전도 한 번 내공이 스며들자, 그 이후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나는 던전 안에 만연한 기운을 솜처럼 빨아들였고, 착실히 내 단전에 갈무리해 나갔다.

물론 단번에 과거의 내공을 되찾지는 못했다.

아무리 기운이 충만하다 해도, 평생을 쌓아온 양을 단시간에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야 온전한 삼류 무인이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지구의 D급 헌터와 같은 수준이다.

비로소 D급 헌터가 지녀야 하는 최소의 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물론 같은 양의 내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 수준이 그들과 같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은 가진 힘을 십분지 일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나는 아니었으니.

굳이 비교를 해보자면, 지금의 나는 스톰 팀의 리더였던 강혁보다 근소한 우위에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강혁을 대상으로 살행에 나선다면, 근소한 차이가 아니라 골백번이고 강혁을 죽일 자신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살수가 아닌, 무인이다.

과거에 얻은 무를 버리지는 않았으나 다시는 살행을 행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러한 가정은 무의미 했다.

변한 것은 마력뿐만이 아니었다.

육체의 능력 또한 내공이 쌓임에 따라 자연히 향상됐다.

내공이 전무할 때도 D급 헌터 정도는 나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최소한의 D급 헌터 조건을 충족한 나는 곧바로 승급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

E급 헌터 자격증을 발급받은 지, 약 2주.

나는 다시 헌터 협회를 찾았다.

바삐 오가는 헌터들이 몇몇 보였지만 매달 있는 정기 시험이 치러지는 날이 아니었기 때문에 협회는 한산한 편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안내 데스크에 앉은 여자가 친절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협회 특성상, 찾는 이들 대부분이 헌터였기 때문에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이는 친절함이었다.

“승급시험을 신청하기 위해 왔습니다.”

여자의 친절함에 나 또한 미소로 화답했다.

어쩌면 지난 2주간 나의 가장 큰 변화는 내공이나 능력치가 아니라, 타인을 대함에 있어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인지도 몰랐다.

처음에 대부분 하대로 일관했던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처세술을 익힌 것이다.

물론 여전히 예를 갖출 필요가 없는 대상에게는 굳이 예를 차리려 노력하지 않았다.

“네. 승급시험 때문에 오셨다고요? 기존 평가 등급이 어떻게 되시죠?”

“E급입니다.”

“네. E급이요. 네?! E급이요?!”

여자는 내 미소에 고개를 끄덕이다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자신이 듣고 내뱉은 말이 맞는지 눈을 똥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봤다.

“네.”

“잠...잠시 만요.”

내가 재차 확인해주자, 여자는 놀람이 가시지 않는지, 말까지 더듬으면서 급히 수화기를 찾았다.

단순히 상위 등급 측정을 받았던 헌터의 승급이라면 모를까, E급의 승급시험은 기본적인 안내를 맡고 있는 여자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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