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살수다-14화 (14/150)

# 14

14화. 결심(4).

채채챙!

목표물을 잃은 놈들의 무기가 저들끼리 뒤엉키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걱. 서걱.

나는 바닥을 구르면서도 놈들을 향한 시선을 떼지 않았고, 검을 든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바닥을 구르며 휘두른 검에 가장 근접해 있던 두 놈의 발목 네 개가 잘려나가며 늪에 박혔다.

발을 잃은 네 개의 다리가 아등바등 거리며 네 개의 붉은 물결을 만들어 냈다.

푹.푹.푹.

그 사이, 놈들의 무기가 내 몸을 찌르고자 떨어져 내렸지만 허망하게 바닥을 찌르는 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나는 몇 차례 몸을 더 굴려 떨어져 내리는 무기를 피해낸 뒤, 한 놈의 발목을 또 다시 잘라냈다.

크엑.

그제야 놈들은 질겁하며 나와 거리를 벌렸다.

이대로 가다간 전부 제 발목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쉬웠다.

놈들이 조금만 더 멍청했더라면, 절반 이상을 줄여 낼 수 있었을 텐데.

쿠엑.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잃고 늪지에 쓰러진 놈들의 숨통을 마저 끊어 놓았다.

숨이 붙어 있는 적은 추후에 어떤 걸림돌로 작용할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완벽을 기했다.

“이제 여섯.”

순식간에 넷을 처리했지만 아직 반수 이상이 남았다.

차례로 두려움과 포악성을 드러냈던 놈들이 이제는 침착함을 보였다. 경각심을 잔뜩 끌어 올린 채, 나를 주시했다.

나 또한 이전과 다르게 놈들을 찬찬히 살피며 집중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상대가 나를 알고, 나 또한 상대를 아는 때야 말로,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진짜 싸움인 것이다.

이번에도 먼저 움직인 것은 나였다.

헌터들에게 향했던 리자드맨 중, 몇 놈이 상황을 눈치 챘다.

헌터들과 리자드맨의 전투는 호각지세로,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었다.

나는 품속에서 수리검을 꺼내들었다.

내가 챙겨놓은 수리검은 다섯으로, 하나당 한 마리를 죽인다 해도 수가 부족했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일격 일살을 노리고 챙긴 무기가 아니고, 현재의 나는 정확히 놈들의 사혈을 노릴 만한 능력도 없다.

견제, 그 정도의 역할이면 충분했다.

다섯 개의 수리검이 찰나의 시차를 두고 차례로 내 손을 떠나갔다.

내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놈들은 곧바로 피하거나 막기 위한 행동을 취했다.

그러한 놈들의 행동은 정확히 내가 바라던 바였다.

순간, 수리검에 한 눈이 팔린 놈들은 찰나지만 내 움직임을 놓쳤고, 그 찰나의 시간은 나에게는 황금과 같았다.

타앗.

놈들에게 쏘아진 것은 수리검뿐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수리검이 내 손을 떠나는 동시에 나 또한 지면을 박차고 쏜살 같이 놈들을 향해 쏘아졌다.

무영보.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나를 살왕의 자리에 올려놓은 절세의 보법이 내 발끝에서 펼쳐졌다.

아직 내공이 일천해 제대로 펼쳐내지 못했지만 능히 무림 십대 보법에는 손꼽힐 만한 보법이다.

완벽하지 않음에도 나의 신형은 완벽히 놈들의 사각으로 사라졌다.

키엑?

기겁한 놈들이 눈동자를 굴려 나를 찾아 헤맸지만 이미 나는 완벽히 사각으로 녹아든 뒤였다.

서걱.

여섯의 리자드맨이 다시 나를 발견한 것은 가장 뒤에 있던 놈의 목이 떨어진 직후였다.

나를 발견하고 놀라는 사이, 나는 한 놈을 더 앞서 간 놈의 길동무로 삼아 주었다.

이제 산 채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고작 넷에 불과했다.

캬악. 카약.

뒤늦게 나를 발견한 놈들이 거친 괴성을 질러대며 무기를 휘둘러왔다.

아홉도 맞추지 못했던 내 몸을 고작 네 개의 무기로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때는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고 공격했지만 지금은 넷 모두 전방에서 찌르고 휘둘러질 뿐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가볍게 네 개의 무기를 흘려보낸 뒤, 다시 한 걸음 내딛으며 검을 내질렀다.

무의미하게 비켜간 놈들의 공격과 달리, 내 검은 정확히 한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전력을 다해 무기를 내지른 직후였기에 피하거나 막을 틈도 없었다.

“셋.”

이제 내 앞의 리자드맨은 고작 셋만이 남았다.

그리고 세 마리의 리자드맨은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차분히 남은 놈들의 숨통을 마저 끊어 놓았다.

크르..

고작 인간 따위에게 죽게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음인가.

원통함이 가득 담긴, 생기를 잃고 꺼져가는 리자드맨의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일 대 십의 전투가 끝이 났다.

***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여? 뭐여?”

“태성이 동생. 아니 태성이 동생분이 저 놈들 모두 죽인 게 맞는 거야?”

짐꾼들은 똑똑히 보고도 믿지 못했다.

하긴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헌터라고는 하나 고작 E급. 기껏해야 짐꾼 역할이나 하고 있는 이가 무시무시한 D급 몬스터를 열 마리나 때려잡았다.

자신들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현실감 있는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피 묻은 검을 한 번 털어내고는 아직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열셋 헌터 측은 셋이 바닥에 몸을 뉘이고 있었고, 리자드맨은 이제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체력적으로는 연신 거친 숨을 토해내는 헌터들이 더 지쳐 보이기는 했으나, 호각지세를 이루던 전투는 서서히 헌터들 쪽으로 전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

강혁의 분투가 빛을 발했다.

팀의 리더인 그는 팀원들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전황을 살피며 목이 쉬어라 팀원들을 통솔했고, 온 몸이 리자드맨들이 남긴 상처로 붉게 물들어 있음에도 손에 든 검을 멈추지 않았다.

팀의 리더가 그러한 살신성인, 임전무퇴의 자세로 전투에 임한 덕분에, 팀원들 또한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다.

헌터들의 손에 쓰러지는 리자드맨이 늘어갈수록, 놈들의 수가 줄어드는 속도는 조금씩 빨라졌다.

앞으로 남은 전투는 그리 길지 않아 보였다.

“저... 태빈군, 님? 지켜보기만 하실...겁니까?”

그 모습을 보며 이재성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열 마리의 리자드맨을 홀로 처리했음에도 지친기색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태빈이다.

그런 태빈에게는 분명 저들을 도울만한 힘이 있었다.

물론 저들이 먼저 자신들을 버렸기 때문에 꼭 도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투가 끝난 이후가 문제였다.

태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E급에 불과하다. D급 이상의 헌터가 열이나 있는 스톰 팀에서 문제 삼는다면, 태빈이 다칠 수도 있었다.

“예. 제가 지키고자 한 건, 여러분이지, 저들이 아닙니다.”

도움을 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먼저 외면했기 때문에 나 또한 그들을 외면했다.

그렇기에 그저 바라봤다.

만약, 저들이 리자드맨에게 패할 기미가 보였다면, 망설임 없이 가담했을 것이다.

저들이 당한 뒤에 리자드맨이 이쪽으로 향할 것은 자명한 일이니까.

그러나 전세로 보아 저들이 패할 리는 없다.

앞서 목숨을 잃은 세 명을 제하고도 다소간의 피해가 더 발생하긴 하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예...예.”

냉정한 내 대답에 이재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에게는 나를 강제할 힘이 없었다.

***

“헉... 헉...”

태빈의 예상대로 스톰 팀은 백여 마리의 리자드맨을 상대로 결국 승리를 쟁취해냈다.

그 와중에 넷을 더 잃긴 했지만 확연히 열세였던 상황에서 일궈낸 값진 승리였다.

그 이면에는 태빈이 열 마리의 리자드맨을 덜어주었음이 큰 영향을 끼쳤으나, 누구 하나 이를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헌터들은 열 마리가 빠졌다고는 하나 백 마리의 리자드맨에게 둘러싸여 그 일방적인 싸움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짐꾼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본 것이 실제인지 얼떨떨할 뿐이다.

“태호...민욱...찬영...”

전투를 끝낸 스톰 팀 헌터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다.

슬픔에 젖어 잃은 일곱의 동료들의 주검을 수습했다.

흉포한 리자드맨의 손길이 닿은 시신은 온전하다고 부를 만한 것이 단 한구도 없었다.

전부 사지가 뜯겨나가거나 머리통이 으깨져 처참한 모습이었다.

“짐꾼들 시신도 수습해야지.”

“어...? 어떻게...?”

뒤늦게 짐꾼들의 시신도 수습하려던 헌터들은 멀쩡한 모습으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짐꾼 다섯을 발견했고,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분명 몇 마리의 리자드맨이 그들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때문에 당연히 그들 또한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한 명도 아니고 다섯 전원이 상처하나 없이 살아있었다.

“대체...”

헌터들은 시신을 수습하는 것도 멈추고, 짐꾼들을 바라봤다.

자신들이 전투를 치르는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저 우연인가? 저들에게로 향하던 리자드맨이 갑자기 경로를 바꾸기라도 했을까?

아니다.

그들 주위로 붉게 물든 늪과 그 늪에 처박혀있는 리자드맨들의 몸뚱이들이 보였다.

짐꾼들의 생존은 결코 우연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 다섯 중, 넷은 익숙한 얼굴이다. 공략을 진행하며 몇 번이고 마주쳤던.

처음 보는 얼굴은 하나밖에 없었다.

태성의 동생이라고 했던가. 얼마 전, E급 헌터가 된 동생을 데리고 와도 되겠냐고 물었던 것이 생각난다.

E급 헌터 한 명이 어쩌다 한 마리를 죽인 것도 아니고, 열 마리나 되는 리자드맨을 죽였다?

아니, 저들이 전력을 다해 덤벼들었다 해도 E급 헌터 한 명과 일반인 넷. 리자드맨 열 마리는커녕, 두셋만 되어도 전멸을 면치 못할 전력이다.

그럼에도 저들은 살아남았다.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강혁이 대표로 나서 짐꾼들의 대표 격인 이재성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공략대를 이끄는 강혁에게는 던전 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알 권리가 있었다.

“그게...”

이재성은 나를 한 차례 바라보며 허락을 구했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재성의 설명에 강혁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스톰 팀의 리더이자, C급 헌터인 그에게 리자드맨 열 마리는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웬만한 C급 헌터라 해도 버거운 상대임에 틀림없다.

그런 리자드맨들을 E급 헌터가 홀로 상대해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혁님도 저희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재성이 지금 상황에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강혁 또한 알고 있다. 이들과는 몇 번의 공략을 진행한 적이 있었고, 리자드맨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E급 헌터인 태빈 밖에 없음을.

“허면... 아닙니다.”

어째서 자신들을 돕지 않았냐고 물으려던 강혁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절망 속에서 유일한 동아줄로 자신들을 바라보던 짐꾼들을 외면했던 일이 생각난 터였다.

자신에게는 그들의 외면을 탓할 자격이 없었다.

“그럼, 뒷정리 부탁드립니다.”

강혁은 짐꾼들이 그저 그들 본연의 역할을 해줄 것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