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13화. 결심(3).
쐐애액.
헌터들은 몇 번 더 화살과 총탄을 날려 놈들의 수를 몇 마리 더 줄여냈다.
그리고 더 이상 활과 총을 쏠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인근 수풀에 총을 집어던지고 근접전을 준비했다.
그 와중에 비싼 무기라고 늪에 빠지지는 않도록 신경 쓴 행동이었다.
“돌격!”
팀의 리더인 강혁의 지시에 따라 헌터들이 일제히 리자드맨을 향해 달려 나갔다.
강혁을 비롯한 C급 헌터 셋이 선두에 섰고, D급 일곱이 뒤를 따랐다. 나머지 셋은 여전히 활을 든 채, 후방에서 동료들을 받쳤다.
두 번의 원거리 공격으로 이제 남은 리자드맨은 스물 가량.
기세만 보면 흉포함을 넘어 광기가 흐르는 리자드맨 측이 확연히 우세해 보였지만 침착하게 응수하는 헌터들이 한 수 위였다.
가장 먼저 리자드맨을 마주한 강혁의 검이 놈의 목을 갈랐다. 놈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쾌속하게 행해진 일격이었다.
이어 강혁은 허리를 숙여 자신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리자드맨의 공격을 피해냈고, 그대로 몸을 일으키며 치켜 올린 검으로 리자드맨의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 정확히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일체의 군더더기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다른 C급 둘도 강혁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뛰어난 무위를 선보였다. 셋만으로도 충분히 스무 마리의 리자드맨들을 학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리자드맨보다 확연한 우위를 지닌 셋이 놈들의 진형을 완전히 깨트렸고, 나머지 일곱이 깨어진 진형에서 흘러나온 놈들을 해결해냈다.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후방의 셋이 시기적절하게 화살을 날려주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흠..’
나는 헌터들의 전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확실히 병정놀이만도 못했던 E급들 보다는 봐줄 만 했다.
상대가 오로지 돌진밖에 모르는 오합지졸이긴 했으나, 헌터들은 가진 바 능력에 맞춰 제법 효율적으로 싸울 줄 알았다.
오랜 세월 손발을 맞춘 낭인들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아직이다.
늪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이 기운의 정체를 눈치 채지 못한다면 저들은 누구보다 죽음의 냄새를 잘 맞는 낭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뭔가 이상한데...”
어느새 남은 리자드맨은 다섯.
자신들과 격차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화종 팀이 공략에 실패할 리 없었다.
그제야 헌터들도 기묘한 위화감을 눈치 챘다. 아니, 오직 강혁만이 전신을 엄습하는 기분 나쁜 기운을 느꼈을 뿐이다.
캬라라라!!
위화감의 정체는 곧바로 드러났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리자드맨이 헌터들을 덮쳐왔다.
지금껏 헌터들이 상대했던 삼십의 리자드맨은 놈들의 정찰대에 불과했다.
놈들이 헌터들에게 달려들며 질러댄 괴성에는 헌터들을 향한 흉포함과 함께 동료를 부르는 신호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친...”
사방을 가득 메우고 몰려드는 놈들의 수에 누군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얼핏 봐도 수가 백은 족히 되어 보였다.
리자드맨 백 마리라면, 결코 D급 던전 수준이 아니다.
“침착해! 진형 흐트러트리지 마!”
자칫 혼란에 빠질 뻔한 헌터들을 강혁이 재빨리 다잡았다.
리자드맨이 백 마리.
수가 상당하긴 하지만 침착함만 잃지 않는다면,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소의 피해는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팀장님.”
팀원의 부름에 강혁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팀원들의 시선은 강혁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있었고, 그 곳에는 공포에 질려 얼굴이 거멓게 죽어있는 짐꾼들이 있었다.
“어쩔 수 없어.”
강혁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과 동료의 생존 앞에 더 이상 짐꾼들을 향한 배려는 없었다.
***
몰려드는 리자드맨 무리는 헌터와 짐꾼을 가리지 않았다.
다수가 앞서 있는 헌터들을 향했지만 후방에서 나타난 열 마리 가량은 정확히 나와 짐꾼들이 있는 곳을 향했다.
“걱정하지 마.”
형이 내 앞에 서며 검을 들어 올렸다.
형, 태성은 쏟아지는 적의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으면서, 그래도 형이라고 나를 지키고자 했다.
“애들은 뒤로 가있어.”
“어디 어린놈들이 어른들 앞을 가로막나.”
이재성이 형을 밀쳐내고 앞으로 나섰다.
다른 둘도 마찬가지.
어느새 형과 나는 맨 뒤로 밀려났다.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대던 스톰 팀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정(正)과 의(義)를 제 목숨보다 숭상하는 정파 무인들과 비견될 정도다.
불현듯, 어디선가 본 듯했던, 그러나 기억나지 않았던 위화감의 정체가 이제야 생각났다.
오래 전, 한 노인을 죽였던 나의 첫 번째 살행.
죽음 앞에 이재성의 얼굴은 그 노인과 꼭 닮아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얼굴보다 한참이나 젊어졌기에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내 기억 속에서는 두려움에 벌벌 떨기만 했기에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진 못하고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하.
전생에 여인을 겁간해 내게 죽임을 당했던 노인이 현생에는 나와 형을 지키고자 내 앞에 섰다.
첫 살행 대상과 똑같은 얼굴을 한 이라니.
내게 새로운 삶을 부여한 이가 나의 속죄를 바라기라도 했던가.
생각은 뒤로.
“형. 아저씨들.”
나는 형을 밀쳐냈다.
무기를 든 팔과 두 다리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는 짐꾼 아저씨들도 내 뒤로 밀어냈다.
그들은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일반인에 불과했고, 내 힘을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태빈아.”
형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형을 바라봤다.
나를 믿으라고. 형이 2년간 나를 지켜줬듯, 이번에는 내가 형을 지켜주겠다고.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내심 나에게 밀려난 것에 안도하고 있는 아저씨들의 얼굴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진심이었기에 나는 그들 또한 지키고자 마음먹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내가 사람을 지킨다는 게 우스운 일이다. 그런다고 내 손에 묻은 피가 씻기는 것도, 내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따위 것은 중요치 않았다.
이들을 보며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결심했다.
전생에 사람을 죽이는 삶을 살았다면, 이번 생에는 사람을 지키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내게 새로운 삶은 준 이가 바랐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처음으로 스스로 한 결심이었다.
***
순수한 육체의 능력만으로 보자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적이 열.
만약 내가 놈들을 사냥하는 살행이었다면, 기꺼이 웃으며 행했을 것이다.
아니 시간의 제약만 없다면, 눈앞의 열이 문제가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리자드맨의 씨를 말려버릴 자신도 있었다.
막 살수가 되었던 때를 제외하면, 나보다 약한 자를 대상으로 삼은 적이 없었고, 그럼에도 모든 살행을 성공해 냈으니.
그러나 지금은 살행을 행하는 상황이 아니라, 발각된 채로 포위된 상황과 같았다.
물러설 곳도 도망칠 곳도 없는 상황이 전생의 마지막에 마주했던 천라지망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 앞에 있는 리자드맨들은 당시 나를 포위한 살수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준이 낮고, 수도 고작 열에 불과 하다. 하지만 지금의 나 또한 그 때의 내가 아니었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나는 잡념을 지우고 현재에 집중했다.
눈앞의 놈들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나의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내가 죽으면, 내 뒤에 지키고자 한 이들을 지키지 못함이 두려웠다.
인간의 것이 아닌, 적의 어린 열 쌍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찔렀다.
불안과 두려움 섞인 네 개의 시선은 내 뒤통수에 꽂혔다.
앞뒤, 열 마리의 리자드맨과 네 명의 짐꾼 모두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쏟아지는 시선 속에 묵묵히 검을 들어올렸다.
E급 시험에서도 그랬듯, 양손에 검을 쥔 채였다.
기계에서 양산형으로 쏟아지는, 헌터들에게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싸구려 철검 두 자루.
아직 손에 채 익지도 않아 어색함이 느껴졌지만 놈들을 상대하기에는 차고 넘쳤다.
“와라.”
심약한 일반인은 심장마비로 즉사할 정도의 지독한 살기가 리자드맨을 향해 흩뿌려졌다.
갑자기 쏟아진 전신을 짓누르는 무형의 기운에 미친 듯 달려들던 놈들이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수백의 생을 짓밟고 내 영혼에 아로새겨진 살기는 리자드맨 따위가 버텨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본능에 의해 지배 받는 몬스터이기에 인간을 향한 적의보다는 생존의 위협에서 오는 공포가 큰 탓이다.
“아니?!”
“어떻게...?”
여차하면 나설 생각으로 무기를 든 채, 지켜보고 있던 짐꾼들이 경악했다.
놀라운 일이다.
인간들을 향한 적의가 스스로의 생사를 도외시 할 정도인 놈들이 겁에 질리다니.
분명 E급이라 하지 않았나?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캬라라라!
놈들이 선뜻 다가오지 못하는 가운데, 놈들 중 하나가 괴성으로 겁에 질린 동료를 일깨우고자 했다.
그 하나 또한 쏟아지는 살기에 몸이 굳어진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놈은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낼 줄 알았다.
캬라! 캬락!
놈은 나를 검 끝으로 겨누며 계속해서 괴성을 질러댔다.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 적은 하나고, 아군은 열이다. 하물며 눈앞의 놈들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버려진 놈들이다. 궁지에 몰려 발톱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자신들이 두려워 할 이유는 없다. >
대충 이 정도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큭.”
나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쉼 없이 괴성을 질러대는 놈이 열 마리의 리자드맨들의 우두머리임을.
그래서 우스웠다.
제 놈도 겁에 질려 선뜻 달려들지 못하는 주제에 동료들을 등 떠미는 꼴이라니.
내 검에 질려 주변 수하들에게 어서 내 목을 따오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문주와 놈이 겹쳐보였다.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주마.”
내가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가까워진 거리만큼 짙어진 살기에 리자드맨들이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놈들의 뒷걸음질 보다, 앞으로 내딛는 나의 걸음이 몇 배는 더 빨랐다.
촤아악.
나의 검이 선두에 있던 리자드맨의 허리로 향했다.
놈은 질겁하며 피하려 했지만 일평생 든든한 아군이었던 늪지가 지금은 돌연 적이 되어 놈의 발을 붙잡았다.
허리춤에 생겨난 붉은 선을 기점으로 놈의 상체가 하체로부터 무너져 내렸고, 벌어진 선 사이로 뜨끈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첨벙.
떨어진 상체가 늪지에 떨어지며 붉게 변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놈의 육중한 무게에 튀어 오른 물 몇 방울이 내 얼굴까지 얼룩지게 만들었다.
나는 소매로 그 붉은 물방울을 닦아내며 코끝을 자극하는 혈향을 느꼈다.
캬악!
동료의 죽음에 놈들이 보인 반응은 의외였다.
동료의 죽음이 놈들의 본능을 일깨우는 신호라도 된 듯, 겁먹고 움츠러들어 있던 리자드맨들이 흉포한 괴성과 함께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베고 찌르는 단순한 공격.
그러나 그 수가 아홉 개나 되는 각기 다른 무기가 사방에서 쏟아진 탓에 나는 다급히 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붉게 물든 늪지의 흙덩어리가 엉겨 붙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바닥을 구르지 않았다면, 내 피 또한 늪의 일부가 되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