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11화. 결심.
이번 시험은 유독 이례적인 일이 많이 발생했다.
실기시험에서 수 년 간, 대련교관 역할을 잘 수행해오던 차경석이 갑자기 폭주해 응시생을 죽일 뻔한 일로 징계를 당했다.
그리고 실전 평가에서는 다른 응시생에 대한 평가가 불가능할 정도로 한 개인이 활약을 해댄 탓에, 공략 중간에 그 응시생이 더 이상 공략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고블린 주둔지에서 교관들의 개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중간에 합격 처리된 응시생으로 인해, 다른 응시생들이 각 공략 과정에 기대되는 경험을 쌓지 못했고, 교관들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김태빈...”
시험 결과 보고를 앞둔 팀장이 김태빈의 사진이 박혀있는 서류를 보며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수십 번의 시험을 치러오면서 한 번도 보기 힘든 세 가지 사건 모두 한 사람과 관련해 일어난 일이었다.
차경석 교관은 김태빈과의 대련에서 폭주했고, 공략과정에서 압도적인 능력으로 실전평가를 무의미하게 만든 것 또한 김태빈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재미있는 놈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이상한 점이 많은 놈이었다.
태빈은 2년 간, 마력증후군에 빠져있었고, 깨어난 것은 고작 열흘 남짓. 굳어있던 육체를 재활하는데도 부족한 시간이다.
그런데, 곧장 시험에 응시해 D급, 혹은 C급 헌터에 비견될만한 능력을 보여준 태빈은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마력증후군의 영향인가...”
모든 의문은 마력증후군이라는 미지의 병으로 귀결됐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력증후군에서 깨어난 김태빈이었기에, 뒤 따르는 의문은 전부 마력증후군의 영향 때문이라 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응시생들의 시험 결과가 담겨있는 보고서에는 김태빈의 모든 특이점들이 오로지 마력증후군의 영향으로 추정될 뿐이라고 간략하게 작성됐다.
***
이례적인 사건들로 인해, 스무 명의 응시생들 가운데 태빈을 포함해, 김시연, 장만식, 차대영 등, 고작 다섯 명만 정식 헌터가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보통 실전 평가 합격률은 50~60%로, 절반이상이 합격하던 전 시험들과 비교하면 이번 시험은 합격자 수조차 이례적이었다.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나는 이미 공략 과정에서 합격을 통보받아 알고 있었음에도, 김시연과 장만식이 축하인사를 건네 왔다.
“그리고 고마워요.”
“저도 감사합니다.”
감사의 인사도 함께였다.
차대영의 농간에 의해 정찰조로 묶인 연이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둘 또한 여타 응시생들과 다르지 않은 결과를 받았을 지도 몰랐다.
한 것은 없지만 태빈은 둘에게 수시로 경각심을 일깨워줬고, 놈들의 매복지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제공해줬다. 그게 태빈이 의도한 게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축하합니다.”
둘의 인사에 내가 답했다.
나는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지 무감정한 게 아니다. 찰나의 연이었다고는 하나, 모든 일이 마무리 된 상황에서 둘의 호의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줄곧 무시로 일관하던 내가 뱉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두 사람이 경악했지만 그것까지는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태빈씨는 앞으로 헌터로 활동하실 생각이신가요?”
충격으로 잠시 말을 잃었던 김시연이 물었다.
사실 둘이 이렇게 찾아와 인사를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태빈과의 인연.
두 사람은 여타 응시생들과 달리, E급이지만 헌터로 살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E급 헌터 자격증을 받았지만 단순히 E급이라 치부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태빈과 인연을 맺어두고자 한 것이다.
좁은 헌터바닥에서 활동하다 보면, 결국 마주치게 될 테고, 지금 맺어놓은 작은 인연은 둘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결코 손해가 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습니다.”
“그러시군요...”
나의 대답에 김시연은 작게 답하면서도 똥마려운 강아지와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고, 장만식 또한 머리를 긁적이며 쭈뼛쭈뼛 거렸다.
딱 봐도 나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새였다.
“혹시... 저희와 팀이 되어주시면 안 될까요?”
이내 결심어린 표정으로 숨을 한 번 들이 쉰 김시연이 부탁을 해왔다.
어렵고, 말도 안 되는 부탁이라는 것을 알기에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어두웠다.
“팀?”
두 사람이 나에 다가왔을 때부터, 나와 연을 만들고자 한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과의 연은 나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일이었기 때문에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살수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기에 홀로 활동하는 게 익숙하긴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과거 나 또한 중원 수많은 이들과 연을 맺었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서로의 이득을 위한 관계이긴 했지만 그렇기에 고작 십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백살을 모두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둘에게 기대하는 것은 하잘것없는 능력이 아니다. 과거에도 연을 맺은 누군가에게 능력을 구걸한 적은 없었다.
정보.
김태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의 삶은 헌터와는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헌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도 일반인의 범주에 불과하다.
나는 보다 많은 정보가 필요했고, 이미 헌터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둘은 이를 충족시켜줄 수 있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미래를 위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팀을 이루자는 제안은 의외였다.
서로 친분이 있는 헌터 소수가 모여 만든, 길드와 개인의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팀에 대해서는 얼핏 알고 있었다.
그러나 E급 헌터들도 팀을 만든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헌터들이나 일반인들에게 E급은 관심 밖이었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었다.
“네.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것은 알지만 태빈씨와 함께라면 적어도 무시 받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요. 여차하면 단일팀으로 공략을 진행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스스로도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김시연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대놓고 김태빈에게 얹혀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팀이라는 게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E급도 팀을 만듭니까?”
“네. 오히려 E급이기에 팀을 만드는 거죠.”
내 의문이 김시연이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다.
헌터로 살아가고자 마음을 먹긴 했지만 E급은 환영받지 못하는 등급이다.
길드에 가입하는 것도 쉽지 않고, 어찌어찌 들어간다고 해도 은연중에 이루어지는 괄시에, 기껏 맡는 역할이라고는 짐꾼이 전부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기 때문에 E급들은 여럿이 팀을 만들어 활동하곤 했다.
여럿이 팀을 이루면 홀로 활동하는 것보다는 무시당할 일도 적고, 설사 무시당한다 해도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원만 맞는다면, < 심약한 고블린 던전 >과 같은 E급 던전을 공략할 수도 있었다.
던전 공략은 헌터로 살아가고자 결심한 E급 헌터의 궁극적인 목표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등급이 오르지 않는 이상, 팀 구성은 필수에 가까웠다.
“생각해보겠습니다.”
내가 답했다.
애초에 E급이라는 타이틀로는 결코 던전 공략을 허가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백살문 때의 기억으로 조직은 내키지 않지만 팀은 길드와 같은 수직 관계가 아니라, 수평 관계에 가깝고, 이 팀은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기에 나쁘지 않았다.
“정말인가요?”
내 대답에 김시연이 반색하며 얼굴을 밝혔다.
열에 아홉은 거절당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해본 부탁이었다.
아직 수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태빈이 생각해본다고 한 것 자체가 기대이상의 수확이었다.
“결정이 서면 이쪽으로 연락주세요. 꼭 함께 팀을 이루지 않더라도 서로 연을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E급끼리 서로 도와야죠.”
김시연이 자신의 연락처가 담긴 쪽지를 나에게 건넸다.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었음에도, 소기의 목적은 잊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팀을 거절하더라도 연을 이어나가길 바랐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고, 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
나는 헌터 자격증이라는 목적을 이루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온 나를 향한 가족들의 축하와 걱정이 이어졌다.
자식이, 동생이 목표를 이룬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지만 헌터가 여타 직업들에 비해 위험한 일이니 만큼,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축하와 걱정이 어색한 나는 그 만큼, 어색한 표정으로 그들의 감정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처음 가져본 가족이 주는 생소한 감정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아무 조건 없이 전해지는 따스함에 수십 년간 굳어져 버린 내 마음이 조금은 녹는 듯했다.
가족들의 따스함 뒤로, 개인적인 시간을 갖게 된 나는 던전에서의 경험을 돌이켜봤다.
우선, 던전 내에서 느꼈던 놀랄 만큼 충만한 기운.
그 기운을 바탕으로 미약하지만 단전에 내공이 조금은 쌓였다. 고작 몇 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기에 좁쌀 크기도 되지 않는 양이었지만 다시 내공이 쌓이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또한 오랜 만에 검을 들었다.
시간상으로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전생의 죽음 뒤에 찾아왔던 어둠 속을 헤매던 기억 때문이지, 무척이나 오랜 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무명(無名)검법.
내가 살수 시절 익힌 검법은 그저 살(殺)검으로, 오로지 상대를 죽이는 것만을 목적으로 했다. 때문에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무명(無名)이라 불렸다.
사실 고블린들을 죽일 때는 검법을 펼쳤다고 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단순히 찌르고, 베는 기초적인 수준의 휘두름에 불과했다.
고블린을 죽이는데,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검법이 필요치 않았다.
***
김시연과 장만식이 제안한 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고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홀로 활동하는 게 편했다.
정보가 필요하다고는 하나, 이제 막 헌터로 첫발을 내딛은 그들이 이미 기존에 활동하고 있는 헌터들만큼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저 나보다 많이 알고 있을 뿐,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나는 우선 홀로 활동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했고, 헌터 자격증에 적힌 일련번호를 입력한 뒤, 헌터넷에 접속했다.
[헌터넷]
국가에서 오로지 헌터만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국가 내 던전의 수와 위치, 그리고 각 던전의 공략 현황 등, 헌터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과연, 헌터넷에 접속하자마자, 관련 정보들이 카테고리 별로 정리돼, 화면을 가득 메웠다.
일단 던전.
현재 한국에는 367개의 던전이 있었고, 한국 지도에 수백 개의 점들이 세 가지 색깔로 나뉘어 찍혀 있었다.
초록색으로 표시된 100여개는 헌터 시험을 치른 < 심약한 고블린 던전 >과 같이 공략을 완료하더라도, 던전 핵을 파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던전으로, E급과 D급이 주를 이뤘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250여개는 던전의 핵까지 파괴하는 완전 공략을 요하는 던전들이었다.
마지막으로 3개의 빨간색으로 표시된 던전이 있었는데, 이는 공략불가를 의미했다.
수많은 길드의 헌터들이 공략을 시도했지만 무참히 실패한 던전들.
헌터들은 이를 ‘재앙’이라 불렀다.
그리고,
현재 367개의 던전 중, 249개가 공략이 진행 중이거나 예정되어 있었다.
각 던전 별로 어떤 길드나 팀이 공략을 진행하고 있는지, 확인 할 수 있었는데, C급 이상은 대부분 길드가, 그 이하는 주로 팀이 공략 중이거나 예정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