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10화. 실전평가(4).
“합격자 발표가 있겠다.”
“네?!”
“아직 공략이 끝나지 않았는데...?”
응시생들은 갑자기 나타난 교관을 보며 놀라는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고블린의 기습을 한 차례 막아내긴 했지만 공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놈들의 주거지에는 아직 기습에 동원된 것보다 많은 고블린들이 남아있었고, 그들까지 처리하고 나서야 공략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공략 중간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한 개인의 활약으로 인해, 다른 응시생들의 평가가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례적인 조치를 내리게 됐다. 평가 없이 합격 시킬 수는 없으니. 혹, 불만 있는 응시생은 지금 말하길 바란다.”
이어진 교관의 부연설명에 응시생들이 시선에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교관이 말하는 개인이 누구인지 응시생 모두가 알고 있는 까닭이다.
“13번. 김태빈 응시생. 합격이다. 더 이상 공략에 관여하지 말도록.”
아무런 불만이 없자, 교관은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내 합격을 발표했다.
공략이 진행되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곧장 던전을 나가는 게 아닌, 앞으로의 공략에 관여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공략 과정에서 개인적인 감정은 자제하도록 해라.”
공략 과정을 모두 지켜본 교관이었기에 응시생들 사이에 알력이 존재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주의를 주는 정도로 넘어가기로 했다.
“예.”
응시생들은 이례적인 합격자 발표가 떨떠름하긴 했지만 평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자신들이 합격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반대할 수는 없었다.
***
나는 교관의 지시에 따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응시생들의 뒤를 따랐다.
공략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쉬울 것은 없었다. 고블린들은 내 관심을 끌만한 대상이 아니었고, 응시생들은 처음부터 수준 이하였다.
오히려 나는 교관들에게 흥미가 있었다.
특히, 다섯의 교관 중, 한 명은 내가 처음부터 기척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의 은신 수준이 상당했다. 나머지 넷의 움직임이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지도 몰랐다.
아무리 내공을 잃었다고 해도 내 이목을 속일 정도면 제법 뛰어난 축에 속한다고 봐야했다.
음...
잘 쳐주면 이류 무인, 조금만 더 가다듬으면 정식 살수에는 이름을 올릴 수 있을 정도.
‘그나저나 이곳의 기운은 정말.’
내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정식 살수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수준이라 해도, 내가 첫 살행을 나섰을 때와 같은 수준에 불과했고, 무인으로서 호승심과 같은 감정을 느낄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 보다는 던전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느끼고 있던 충만한 대자연의 기가 몇 배는 더 내 관심을 끌었다.
이 충만한 기운을 느끼면서도 당장 정좌하고 심법을 운용해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아쉬운 대로 행공으로 기운을 받아들였다 내보내기를 반복했다.
살수이기에 편히 정좌하고 수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극히 드물다.
때문에 내가 익힌 백살문의 살혼(殺魂)심법은 움직이며 하는 행공과 누워서 하는 와공 등 어떠한 자세로도 운기가 가능한 심법이었다.
물론 내공이 쌓이는 양은 정좌 상태에서의 운기에 비할 바는 아니다.
백분지 일의 효과도 보이지 못하는 것이 행공이고, 십분지 일의 효과도 보이지 못하는 것이 와공이다.
그러나 충만한 기운은 그런 효과의 차이를 무색하게 했다.
‘얼마만인가.’
내 호흡의 인도에 따라 정제되지 않은 순수한 기운이 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제대로 된 좌공이 아닌, 행공이기에 단전에 쌓이는 양은 티끌만큼도 되지 않을 만큼, 미미했지만 그 작은 기운이 굳어있던 내 단전을 두드렸다.
바위에 낙숫물을 떨어트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잃어버렸던 내공을 되찾기 위해 내딛은 첫발로는 충분했다.
***
“곧 주거지입니다! 예상되는 고블린의 숫자는 최대 오십. 방금 전과 달리, 놈들 사이에 족장이 존재하고, 두 배가 넘는 숫자를 상대해야 하는 만큼, 긴장을 늦추지 않길 바랍니다.”
반쯤 무아지경에 빠져 기를 느끼고 있던 나를 일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응시생들이 고블린의 주둔지 인근까지 도착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 심약한 고블린 던전 >에 존재하는 고블린은 대략 칠팔십 마리다.
앞서 서른 마리의 고블린을 처리했으니, 적게는 사십에서 많게는 오십이 남은 것이다.
게다가 주둔지에는 놈들을 이끄는 족장이 존재하는 만큼, 한층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꿀꺽.
몇몇 응시생들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합격을 위해 활약하겠다는 일념만 가득했던 처음 전투와 달리, 긴장감이 흘렀다.
“괜찮을까...”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두려움이란 감정이 몇몇 응시생들의 마음을 좀 먹어 갔다.
원래 같으면 첫 기습에서 몇몇이 부상도 당하고 하며 전투에 대한 경험도 쌓고, 승리로 말미암아 두려움도 떨쳐내야 했다.
그러나 말이 서른 마리지, 실제로 본대에 있던 응시생들이 상대한 것은 고작 십 수 마리에 불과했다.
인당 한 마리도 안 되는 수준으로, 대부분은 제대로 무기를 휘둘러보기도 전에 전투가 끝나버린 것이다.
때문에 지금이 첫 전투나 다름없는 응시생이 절반에 달했고, 배가 넘는 수를 상대해야 함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봤다시피, 놈들의 전투능력은 어린 아이 수준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E급 헌터 열 명이면 공략 가능한 수준이니, 제 역할만 제대로 해준다면 전혀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차대영이 살짝 굳어있는 응시생들을 독려하며 진형을 구축해나갔다.
차대영은 옹졸하지만 능력이 없지는 않았다.
지금은 개인적인 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고, 이번에는 정찰조를 선발 때와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한 마리 이상의 고블린들을 죽인 경험이 있는 김시연과 장만식 등의 응시생들을 선두에 세웠고, 나머지를 후미에 배치했다.
그나마 전투경험이 있는 응시생들이 고블린들을 상대로 확실한 우위를 보여주면, 후미에 따르는 이들도 두려움을 떨쳐내고 용기를 가질 수 있을 테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돌격!”
선수필승!
차대영의 외침과 함께, 열아홉의 응시생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
막 공격을 개시한 응시생들의 기세는 좋았다.
응시생들을 향해 기습을 감행한 고블린들은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고, 당연히 주거지의 고블린들은 매복을 나갔던 동료들이 전멸한 소식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고블린들은 갑자기 행해진 공격에 무방비 했고, 우왕좌왕하다 응시생들의 손에 쓰러져갔다.
그러나 무리의 한 가운데, 고블린 족장이 나서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우왕좌왕하던 고블린들은 족장의 외침에 따라 진형을 갖추더니, 겁 많던 놈들이 제법 호기롭게 응시생들에게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족장의 지휘 하에 집결된 고블린들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초반의 혼란으로 십여 마리가 당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고블린들은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놈들은 두셋 씩 응시생들에게 달려들었고, 몇몇은 뒤에서는 연신 마비독이 발린 독침을 쏘아댔다.
이러한 전황의 변화는 응시생들을 당황케 만들기 충분했다.
그래도 한 번 제대로 된 전투를 치러낸 응시생들은 그럭저럭 침착하게 수비에 집중하며 변화에 적응했지만 그렇지 않은 응시생들이 문제였다.
가뜩이나 전투가 시작하기 전부터 두려움에 젖어있던 이들이다. 고블린들의 협공에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지자, 억지로 억눌러 놓았던 두려움이 수면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수만 많을 뿐, 우리가 우세합니다! 침착함을 잃어선 안 됩니다!”
차대영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혼란에 빠진 응시생들의 귓가에 그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부상으로 전장을 이탈하는 응시생의 수가 빠르게 늘어갔고, 고블린 서넛이 쓰러질 때마다 응시생 하나 꼴로 전력에서 제외됐다.
게다가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동료들을 내팽개치고 등 돌려 도망치는 응시생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 다시는 헌터 시험에 응시할 수 없음에도 죽음이 주는 공포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놈들의 무기가 조악하고, 선두에 선 응시생들이 분투하고 있는 덕분에 부상자는 발생할지언정,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흠...’
나는 고블린들의 반격에 역으로 혼란에 빠진 응시생들을 바라봤다.
역시나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혼란에 빠진 지금은 기대 이하였다.
중원의 어린 아이들이 벌이는 병정놀이도 이보다 나을 것이다.
공략대장이라는 놈이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댈 뿐,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바빴으니,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김시연과 장만식이 개중에는 나은 활약을 하는 중이다.
줄곧 나에게 짐 취급을 당하며 무시를 당하기는 했지만 김시연은 어디서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히기라도 한 건지, 제법 기본이 탄탄하게 잡혀있었고, 장만식은 타고난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장사 기질이 보였다.
김시연은 무당의 태극검법을, 장만식은 중(重)의 묘리가 담긴 부법과 그에 맞는 외공을 익혀, 잘 가다듬으면 제법 괜찮은 무인이 될 것 같았다. 배움이 늦어 뛰어난 무인은 되지 못하겠지만.
물론 그저 개인적인 견해일 뿐, 그들이 괜찮은 무인이 되고 말고는 내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나는 순수하게 전투를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
동네 파락호들의 영역다툼보다 못한, 볼 것도 없는 저급한 싸움이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적의와 살기가 가득한 공기가 내 기분을 한껏 고취시켰다.
이미 옅게나마 피 맛을 본 탓이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자니 몸이 달았다.
평생 벗어나고자 했지만 죽음 곁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을 보면, 이미 나는 살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돼버린 걸지도 몰랐다.
내가 전장이 만들어낸 감정의 여운을 느끼는 사이, 교관들이 은신하고 있던 곳에서 다급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응시생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대응에 대해 의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아직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시간문제였기 때문에 교관들도 급할 수밖에 없었다.
“건식이랑 민수는 부상자들 후방으로 옮기고, 마비독 맞은 애들한테 해독제 먹여. 나머지는 둘은 나와 함께 고블린들 정리한다.”
응시생들의 고전에 결국, 교관들이 투입됐다.
승리는 가능해 보이나, 예상되는 피해가 너무 컸다.
실전평가이니만큼, 예기치 못한 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키에엑.
C급 헌터 다섯이 투입되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고블린은 응시생들과 달리, 마나가 서려있는 교관들의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고, 수십 고블린을 통솔하던 족장 또한 팀장의 일검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머리가 떨어졌다.
스무 명의 응시생들이 고전하던 고블린들을 고작 셋이서 눈 깜짝할 새에 정리해버린 것이다.
“와아...”
응시생들은 방금 전까지 생사가 오가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고 연신 감탄을 자아내기 바빴다.
교관들은 자신들과 같은 반쪽짜리가 아닌, 진정한 헌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