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2화. 자유.
“언. 드디어 바라던 자유를 얻었구나.”
문주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내 앞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7호.
잊고 있었다. 이십 년의 세월, 유일하게 내가 동료라 부를 수 있는 여인이 있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미 사라져버린 나의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주는 사람이다.
처음 만났던 백 명 중에 살수가 된 열셋. 그리고 이제 다섯 밖에 남지 않은 동기 가운데 하나인 여인.
그녀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살수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독과도 같건만 멍청한...
“응.”
사실 나 또한 그녀를 보면 조금은 긴장이 느슨해진다.
백살을 이뤘고, 자유를 얻었다. 그렇기에 느슨해진 걸까. 아니 사실은 나 또한 그녀와 같이 멍청한 걸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갈 거야?”
“청수.”
“청수? 거기가 어디야?”
잊었음에도 잊혀지지 않은 작은 마을의 이름이 나의 입에 담겼고,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고향.”
“고향... 거기 계속 있을 거지?”
“아마도.”
그녀는 조심스럽게 되물었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짧게 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인이 실행한 살행이 몇 번째였는지를.
여든여덟 번째였나. 아직도 열두 번이나 남았다.
아직?
내 생각을 아는지, 그녀는 그 짧은 대답에도 충분하다는 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 미소가 너무 환해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여러모로 살수와 참 안 어울리는 여자다.
***
꽤나 성대한 은퇴식을 뒤로 하고 나는 백살문을 나섰다.
기억도 나지 않은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평생을 살아온 집과 같은 곳을 뒤로 했음에도 아쉬움 보다는 홀가분함이 먼저 찾아왔다.
내가 가져온 것은 걸친 무복뿐.
이제는 살수로 살아갈 것이 아니기에 단도도, 검도 가져오지 않았다.
더 이상 원치 않는 살인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나를 보며 살려달라고 비는 여인의 얼굴도, 아비를 죽은 원수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도 볼 필요가 없어졌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문을 나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지독한 적의와 살의만이 나를 감쌌다.
살수로 살아왔기에 적은 많다. 그러나 이곳은 백살문의 영역.
이상했다.
파팟.
내가 이상함을 눈치 챈 순간, 사방에서 튀어나온 수십의 인영이 나를 에워쌌다.
“문주.”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나의 물음에 상대가 답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정말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무표정함 뒤로 언뜻 표정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은퇴식을 얘기할 때와 같은 표정.
당시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감정이 떠올랐다.
키우던 살수가 죽었을 때, 혹은 쓸모가 없어졌을 때, 문주가 짓던 표정이었다.
“규율을 어길 셈입니까?”
나의 언성이 낮아졌다.
지금 느끼고 있는 살의만으로 대답은 충분했지만 문의 규율을 믿었다.
사실 살수에게 자유가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희망조차 없었다면, 타인의 삶을 앗아가며 살아갈 이유가 없었기에 믿었다.
“규율은 어기지 않았다. 우리는 의뢰를 받았고 살행에 나섰을 뿐이다.”
문주의 대답에 나는 깨달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까지 나에게 죽어간 이들의 가족이, 연인이, 친우가 내건, 그리고 살막에서 내 목에 걸어 놓은 현상금이 족히 금 삼만 냥이다.
사파연합의 장로인 문연 죽이는 대가로 백살문이 받은 금액이 금 일만 냥이었으니, 그에 세 배나 됐다.
내 몸값이 이십년 사이에 닷 냥에서 이제는 삼만 냥이 된 것이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사는 살수 집단에서 이를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헌데, 살왕이라 불리는 나를 고작 수십이 막아낼 수 있을까.
내가 문주를 뛰어 넘은지 오래다. 문주가 나보다 강했다면, 자신이 직접 여문휘를 죽이러 갔지, 나를 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백살문은 진즉에 중원 제일의 살수 단체로 이름을 올렸을 테고.
“걱정하지 마라. 살왕에 대한 예우는 충분히 갖춰 놓았으니. 말이 길어졌군.”
문주가 검을 들어 올렸다.
이를 신호로 수십의 살수들이 나를 노려왔다.
나를 에워싼 이들 뿐만 아니라, 땅 밑에서 나무 위에서 수십이 솟아오르고 떨어져 내렸다.
살왕이라 불릴 정도의 무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나 나는 맨손이었고, 저들은 모두 날카로운 흉기를 들고 내 목숨을 노려왔다.
한 때는 동문이었지만 그들의 손속에 자비나 망설임 따위는 일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살수는 살행 대상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살인이란 도축업자가 소나 돼지를 죽이는 것과 같은 일일 뿐이다.
지금은 그 대상이 내가 되었을 뿐이고.
수십 대 일의 싸움.
불리한 싸움이지만 나는 결코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백살문에서 가장 강한 살수였고, 그 영역을 중원으로 넓혀보아도 가장 뛰어난 살수다.
살수의 습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공격해 올지 눈에 훤히 보였다.
콰득.
심장을 찔러 들어오는 비수를 쥔 옛 동료의 손목을 부러트렸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신음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는 꺾인 손아귀에서 떨어져 내리는 비수를 낚아챘다. 그리고 부러진 손목에 고통스러워하는 옛 동료의 고통을 지워주었다.
목덜미에서 솟구치는 피와 같이 생기가 빠져나간 그는 더 이상 손목의 고통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과연 살왕! 백살문 최고의 살수답구나!”
문주가 소리쳤다.
수하들이 죽어나가는데, 이 죽고 죽이는 역겨움이 뭐가 그리 좋은지.
나는 벌써 다섯의 옛 동료를 죽였다.
그 대가로 허리와 등, 그리고 오른팔에 크고 작은 세 개의 자상이 생겨났다.
나를 막아선 이들은 백살문 내에서 내로라하는 특급 살수, 혹은 그에 준하는 이들이다. 아니 그 정도 되는 살수가 수십이나 될 리 없으니, 살막의 살수들도 나선 것이 틀림없다.
내가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듯, 그들 또한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이들의 목숨을 다섯이나 거두어들인 것에 비하면, 세 개의 상처는 값쌌다.
그러나 나는 하나고 저들은 수십이다. 다섯을 죽였지만 그 수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비교적 값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값이 쌓이면, 결국에 나 또한 목숨을 내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천하의 살왕이 제 목숨이 아까워 도망을 치는 것이냐?!”
그렇기에 나는 도주를 택했다.
살기위해.
살아남기만 한다면, 복수 따위는 언제든지 할 수 있다. 내가 평생을 배워 온 것이 인내이니.
그러나 문주 역시 살수. 그는 치밀하고 철저했다.
겉으로 드러난 수십 외에도 먹이를 옭아맨 거미줄 같이 촘촘하게 나를 에워싼 기척이 수없이 느껴졌다. 수백, 어쩌면 그 이상일 지도 모르겠다.
나 하나를 잡기 위해 문주는 천라지망을 펼쳤다.
은퇴식을 빌미로 며칠의 말미를 얻었던 것은 이를 준비하기 위함이었겠지.
“큭큭...”
허망함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망칠 길은 없었고, 살아날 길 또한 없었다.
여느 살수나 다름없는 끝이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그래도 혼자 가면 적적하니, 더 많은 이들을 길동무 삼고자 했다. 이왕이면, 문주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놈은 끝까지 조심성을 잃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결코 직접 나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손해라도 입혀야겠지.
내 몸값. 삼만 냥.
지금까지 특급 살수 넷에 일급 살수 열을 죽였다.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던 잡졸도 족히 백은 잡았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도 백살에 포함됐다면, 백살이 아니라 천살이라도 쉬웠을 텐데.
어쨌든 얼추 몸값은 채운 것 같다.
이제부터는 문주 네 놈의 손해다.
“1호...네 놈...”
“그러기에 그냥 놔두질 그랬소. 큭큭.”
그 뒤로 나는 특급 살수 둘과 일급 살수 다섯을 더 죽였다. 나머지 잡졸은 백 이상에서 세지 않았으나 그 만큼은 더 죽인 것 같다.
잔뜩 일그러진 문주의 얼굴이 봐줄만 했다. 족히 오만 냥은 벌어다 줄 살수들을 잃었으니, 속 좀 쓰릴 것이다.
“언!”
그 때, 외마디 외침과 함께 포위망 한 편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포위망 속에는 7호가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의 주위에는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한 동료들이 두 눈을 부릅뜬 채로 핏물을 쏟아내며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순간적으로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
멍청한 여자. 어찌하여 그런 선택을 했단 말인가. 나에 대한 감정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목숨까지 걸 정도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이제 그녀에게 남겨진 미래는 죽음뿐이고, 그녀 또한 그 사실을 앎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일말의 후회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슬픔만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온 몸에 새겨진, 붉은 피를 꾸역꾸역 토해내는 수 개의 자상들 보다 그녀의 눈빛이 찌른 심장이 더욱 아파왔다.
“도망쳐!”
재차 이어진 7호의 외침이 그런 나를 일깨웠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눈 깜짝 할 새에 무너진 포위망을 다시 메워가는 살수들을 베어 넘기고 무작정 달려 나갔다.
남겨진 그녀의 목에 비수가 스치고, 단도가 심장을 뚫고 나왔다. 벌어진 목덜미와 꿰뚫린 심장에서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뜨겁고 붉은 피가 쏟아졌다.
울컥.
그 모습을 두 눈에 새긴 내 눈에서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있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모든 감정을 지우며 눈물 또한 완전히 사라졌다 생각했는데.
“1호. 여기까지구나.”
나는 걸음을 멈췄다.
등 뒤에서 문주의 뒤틀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작정 도망친 내 앞에 놓인 것은 절벽이었고, 뒤에선 수십 수백 개의 칼날이 숨통을 조여 왔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천라지망은 고작 한 명의 희생으로 흐트러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옅어지기는커녕 더 두터워지기만 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몇 명을 더 길동무 삼고, 생을 마감해야 할까. 아니면 천에 하나,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놓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야 할까.
두 개의 선택지 중에 내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놈들이 나의 죽음을 확신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티끌만한 가능성일지라도 중원 제일의 살수인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놈들을 두고두고 괴롭힐 것이다. 언제 자신의 목숨을 노려올지 알 수 없기에.
그렇기에 나는 몇 놈을 더 데려가기 위해 놈들에게 나의 죽음을 확인시켜 주기보다는 만의 하나라도 살아날 가능성이 있고, 설사 살아남지 못한다 하더라도 놈들을 평생 괴롭히는 길을 택했다.
“안 돼!”
당황한 문주의 외침을 뒤로 하고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흘린 피 때문인지, 나의 의식 또한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래로 향하며 올려다 본 하늘은 어느 때보다 푸르렀다.
아니. 내가 그 동안 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있었던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평생을 살아왔던 내 의식이 몸과 함께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그렇게 나는 원치 않았던 살수의 삶에서 자유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