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트라비아스 창으로 마족 놈들의 목을 전부 베어주마!”
기세 좋은 목소리가 들판을 흔들었다.
바로 그때.
“케케케케케케.”
들판 한 구석에서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흙칠을 한 채 앞서 도망가던 아이들도, 뒤를 쫓던 아이도 전부 흠칫하며 석상처럼 굳어져 버렸다.
아이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괴상한 웃음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높게 솟은 풀숲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파앗!
풀숲이 갈라지며 시커먼 몸뚱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케케케케. 우리들의 목을 베겠다고?”
“그것 참 무섭구나.”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 새까만 피부, 이마에 솟은 뿔.
제법 또렷하게 인간의 말을 구사하는 녀석들은 중급 마족 중 하나인 로콤이었다.
“으으으.”“마, 마, 마족이다.”
한껏 들떠서 영웅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마족의 등장에 넋을 잃고 말았다.
아직 마족의 잔당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게 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털썩.
아이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것.
“케케케케. 인간 아이는 특히 맛있지.”
“한 동안 꽤 굶었었는데 오늘은 포식을 하겠군.”
로콤들은 긴 혀를 날름거리며 기괴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 채 온몸을 바짝 움츠렸다.
“방금 전만 해도 우리들의 목을 베겠다고 큰 소리를 쳤으면서…….”
“지금은 완전히 겁을 먹었구나.”
로콤은 크게 비웃으며 혀를 찼다.
그때 길쭉한 막대기를 든 아이, 로안의 역할을 맡고 있던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족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거, 겁먹지 않았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잘게 떨리는 목소리, 눈동자, 손끝이 아이의 마음을 드러내주었다.
“케케케케케케. 당돌한 아이구나.”
로콤들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괴이하게 웃었다.
“당돌한 아이일수록 그 맛이 더욱 기가 막히지.”
녀석들은 입을 쩍 벌리며 조롱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는 더 이상 주저앉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마왕 루키페르를 물리치고 중간계를 구원한 로알 랜스필 폐하와 똑같은 인간이다. 너희 마족들한테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아!”
당돌한 목소리가 로콤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로콤들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감히 그 작고 더러운 입에 마왕님의 이름을 올리다니!”
“마왕님께서 로안에게 당한 것은 방심하셨기 때문이다!”
“케케케. 방심만 하지 않으셨다면 로안 랜스필 따위 한 주먹이면 끝난다 말이지.”
“그럼, 그럼. 당장 달려가서 목을 베어버릴 수도 있다고!”
녀석들은 서로 기세를 높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아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화가 난 모습이었다.
바로 그때.
푸스스스.
로콤들이 튀어나왔던 풀숲이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자연스럽게 마족과 아이들의 시선이 풀숲으로 이어졌다.
‘또 마족?’
아이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파앗!
곧 풀숲이 좌우로 갈라지며 사내답게 생긴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행복 차림의 청년은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아이들은 청년의 등장에 긴 탄식을 터트렸다.
마족이 아닌 것에 안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로콤의 숫자는 열이 넘었다.
청년 혼자 상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태연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로콤들을 쳐다봤다.
“그게 사실이냐?”
가볍게 묻는 질문.
로콤들은 갑자기 나타나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청년을 가만히 쳐다봤다.
청년은 그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로안 랜스필의 목을 벨 수가 있다는 말,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 말에 로콤들은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우리 마족에게는 인간 따위는 벌레나 마찬가지라고!”
기고만장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 한 번 싸워볼까?”
낮게 깔리는 목소리.
“응?”
“그게 무슨……?”
로콤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꺾었다.
그 순간 청년의 손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
로콤들은 눈앞으로 쏟아지는 빛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피할 생각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빛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빛은 곧 녀석들을 스쳐 지나갔다.
퍼석!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열 명의 로콤들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매우 가늘고 고운 잿가루가 되어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소멸.
완벽한 소멸이었다.
“아…….”
지켜보고 있던 아이가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아이는 여전히 길쭉한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청년은 고개를 돌려 아이를 쳐다봤다.
흠칫.
아이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냥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아, 아저씨. 저, 정체가 뭐예요?”
아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까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다른 아이들도 궁금한 듯 청년을 빤히 쳐다봤다.
청년은 흐릿하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내 입으로 이야기하기 참 쑥스럽군.’
하지만 굳이 숨길 것도 없었다.
“나는 너희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군주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
아이들은 전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군주.
지금 세상에서 스스로를 군주라 칭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뿐이었다.
로안 랜스필.
청년의 정체는 바로 로안 랜스필이었다.
“아, 아저씨가 저, 정말 저희들의 군주에요?”
아이는 눈물을 흘렸다.
그것 역시 지극히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청년, 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온갖 역경을 헤쳐 왔다.
‘지금이라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이라면 대답 할 수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래. 나는 너희들의 군주다. 나는…….”
어쩐지 목이 메어 왔다.
“나는…….”
말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속 시원하게 뱉어냈다.
“나는 군주다.”
기다렸다는 듯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