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칸도 질세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위병과 성민들은 꼼짝도 않고 가만히 서서 칼럼과 루칸을 쳐다봤다.
눈길이 매서웠다.
“다들 귀가 막혔나!”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그때.
“폐하의 병사들이 전부 빼앗아가서 먹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뾰족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순간 칼럼과 루칸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누구냐! 방금 전 소리를 지른 사람이 누구냔 말이다!”
차가운 목소리.
“당장 나오지 않으면 여기 있는 녀석들의 목을 전부 베어버리겠다!”
계속해서 호통이 이어졌다.
“당장 나오지 못할까!”
칼럼은 두 눈을 부라리며 성민들을 훑어봤다.
성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곁에 있던 루칸이 먼저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어느덧 성문 주변으로 수많은 성민들이 몰려들었다.
모두들 눈빛이 매섭고 날카로웠다.
“폐하······.”
루칸이 여전히 날뛰고 있는 칼럼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한껏 성민들을 몰아붙이고 있던 칼럼이 왜 부르냐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루칸이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칼럼은 여전이 의아한 기색을 띠며 주변을 쳐다봤다.
“으음.”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주변을 가득 메운 성민들.
그들은 하나같이 매섭고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이것들이······.”
칼럼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다, 당장 물러서지 못할까! 서, 성주는 어디 있나! 성주는 당장 이 무례한 것들을 쫓아내라!”
기세에 눌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때.
“성주는 폐하의 손에 죽었습니다!”
“내, 내 손에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칼럼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또다시 누군가가 외쳤다.
“폐하의 병사들이 함부로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자 성의 처자들을 겁탈하지 못하도록 나섰다가 왕의 병사들을 핍박한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목이 잘렸습니다!”
“아······.”
칼럼과 루칸이 나지막한 탄성을 터트렸다.
마침내 기억이 났다.
두 사람이, 아니 칼루 연합군이 이곳 하트포드 성에서 저질렀던 악행과 만행들이.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좋지 않다······.’
두 사람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성민들에게 완벽하게 둘러싸여 도망칠 곳이 없었다.
“무, 물러서라. 지금이라도 물러서면 죄를 묻지 않겠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함부로 내뱉는 엄포.
성민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조, 좋다! 내가 재물을 풀어 손해 입은 자들에게 두둑한 보상을 해 주마!”
이제는 회유책을 썼다.
하지만 성민들의 싸늘한 기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아무리 두둑한 보상을 해 준다고 해도 죽은 아내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딸도!”
“우리 부모님도 다시 살아나지 않아!”
“불쌍한 내 아이들!”
울부짖음.
그것은 지독한 슬픔과 분노를 풍겼다.
“어, 어······.”
칼럼과 루칸은 쏟아지는 원망에 크게 당황했다.
평소라면 당장 검을 뽑아 달려들었을 텐데 지금은 마나와 체력이 바닥난 상태.
단 두 명이서 수많은 성민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죽어! 이 악마야!”
“너는 우리들의 왕이 아니다!”
“자기 백성들을 죽이고 겁탈하는 왕이 어디 있더냐!”
성민들이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이, 이런!”
“이런 미친 것들이!”
칼럼과 루칸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리저리 몸을 피했다.
하지만 성민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고, 그들이 던지는 물건은 그것보다도 훨씬 많았다.
퍼억! 퍼벅! 퍽!
둔탁한 파열음.
잔과 쟁반, 농기구 같은 것은 물론이고 바닥을 굴러다니던 돌까지.
성민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온갖 것을 집어 던졌다.
“크윽.”
“컥!”
칼럼과 루칸은 몸을 바짝 웅크리고 철퍼덕 주저앉았다.
“죽어라!”
“죽어!”
성민들은 흡사 불길을 연상케 했다.
복수의 불길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끄륵.”
“꺼억.”
칼럼과 루칸은 피를 게워내며 바닥을 기었다.
“이, 이런 비천한 것들이······. 크윽.”
칼럼은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루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디에스 왕국의 왕세자인 나 루칸 디에스가 돌에 맞아 땅바닥을 기어 다니다니!’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상황.
퍼벅! 퍼버버버벅!
돌과 물건이 계속해서 공간을 갈랐다.
“크헉.”
이제는 뼈마디가 죄다 부서지고 숨이 턱턱 막혔다.
잘못하면 이대로 생명의 끈을 놓칠 것만 같았다.
“사, 사, 살려줘······.”
기어이 목숨을 구걸하게 되었다.
칼럼과 루칸은 머리를 조아렸다.
비참한 신세.
굴욕적인 상황.
성민들은 싸늘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내 딸도 그렇게 살려달라고 빌고 또 빌었었다!”
“그런데 네 녀석들이 어떻게 했지?”
“칼로 팔다리를 자르고 목을 베어버렸지!”
“죽어라! 네 녀석들도 그렇게 목숨을 구걸하다 죽어!”
그들은 다시 돌과 물건을 집어 던졌다.
퍼벅! 퍼버버벅!
“크헉!”
칼럼과 루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동글게 말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바로 그때.
뿌우우우!
웅장한 뿔나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잘게 떨렸다.
‘말발굽 소리?’
칼럼과 루칸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성문 쪽을 쳐다봤다.
돌과 물건을 집어던지던 성민들이 조심스럽게 흩어졌다.
활짝 열린 성문을 통해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란스 부대.>
화려한 부대기 뒤로 솟은 장군기가 엄청난 위용을 뽐냈다.
<로안 랜스필.>
“아······.”
칼럼과 루칸은 짙은 탄식을 터트렸다.
마침내 로안을 필두로 한 추격대가 하트포드 성에 도착한 것이다.
“칼럼.”
로안은 군마에서 내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칼럼과 루칸 앞에 섰다.
“끄륵.”
칼럼은 입안의 피를 게워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로안을 쳐다봤다.
“사, 살려줘. 나, 나는 와, 왕족이다. 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크윽.”
녀석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터트렸다.
로안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왼손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곧 병사 두 명이 달려와 칼럼을 일으켜 무릎을 꿇렸다.
“크윽!”
뼈마디가 전부 부서진 탓에 극심한 고통이 전해졌다.
“끄륵. 끄륵.”
칼럼은 계속해서 붉은 피를 게워냈다.
“사, 살려줘. 살려줘.”
그는 계속해서 목숨을 구걸했다.
‘나, 나는 왕족이다. 로안 랜스필도 나를 죽일 수는 없을 거야.’
막연한 기대감.
안타깝게도 칼럼은 아직도 로안을 잘 모르고 있었다.
로안은 녀석 앞에 서서 허리춤의 트라비아스 창을 만지작거렸다.
“칼럼. 라인스 왕국의 태사령관으로서 네 녀석의 죄를 묻겠다.”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으으으.”
칼럼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챙!
쇳소리와 함께 트라비아스 창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럼 라인스. 그대는 외세를 끌어들여 왕국을 어지럽히고 사사로이 국왕을 사칭했다. 하지만 더욱 큰 죄는 왕국민들의 목숨을 허투루 여긴 점이다.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중죄이다.”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
“하지만 그대는 왕가의 일족으로서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권리가 있다.”
“아······.”
하트포드 성민들이 깊은 탄식을 터트렸다.
로안이라면 다를 거라 생각했다.
그 기대감이 일시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반대로 칼럼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로안 랜스필. 네 녀석도 생각은 있는 녀석이구나.’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그때 로안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서 나 로안 랜스필은······.”
스륵.
트라비아스 창을 쥐고 있던 손목이 살짝 비틀렸다.
“라인스 왕가와 왕국을 지워버릴 생각이다.”
“그, 그게 무슨······?”
칼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안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네 녀석이 행사할 수 있는 왕가의 권리 따위는 더 이상 없다는 뜻이다.”
그것이 끝이었다.
스팟!
트라비아스 창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간을 갈랐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칼럼의 목이 보기 좋게 잘려 나갔다.
툭.
녀석의 머리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모습.
로안은 목 없는 시체를 가만히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럼 라인스. 네 녀석은 역사상 최초로 왕국민들의 손에 죽은 왕족으로 기록될 것이다.”
어쨌든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칼럼이었다.
“아······.”
성민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환희의 빛이 떠올랐다.
로안은 손짓으로 칼럼의 시체를 치우도록 했다.
“루칸 디에스는 어떻게 할까요?”
필스가 다가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으으으.”
루칸은 여전히 온몸을 떨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로안은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구금시켜 두어라. 녀석은 쓸 데가 있다.”
“예. 알겠습니다.”
필스가 짧게 대답하고 곧 루칸을 잡아 뒤로 물러섰다.
로안은 가만히 서서 주변 성민들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뜨겁게 타올랐던 원망과 복수의 불길이 사그라졌다.
로안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두 개의 큰 산 중 이제 막 하나를 넘었을 뿐이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클레이.’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는 네 차례다.’
자신만만한 표정과 눈빛.
전쟁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