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케엑!”
사이먼은 검을 높이 치켜들며 그대로 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좋아. 이 정도면 됐어.’
뒤로 밀리던 필스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발을 어지럽게 움직였다.
동시에 머리 위로 사이먼의 검이 떨어졌다.
그 순간.
파앗!
파공성과 함께 필스가 사라졌다.
파밧!
다시 그가 나타난 곳은 사이먼의 좌측 편.
“이제 그만 잠들어라.”
필스는 낮게 소리치며 창두를 크게 움직였다.
미완성 창법의 마지막 한 수.
그것이 세상에 처음으로 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때.
“케?”
사이먼은 괴상한 소리와 함께 활짝 미소를 지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
녀석은 좌측 편으로 돌아 움직인 필스가 아니라 텅 빈 전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끝에는 한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케이디 라인스.
사이먼은 방금 전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던 필스가 아닌 케이디에게 관심을 보였다.
녀석은 필스의 공격을 무시한 채 케이디를 향해 들고 있던 검을 집어 던졌다.
“이런 미친!”
당황한 것은 필스였다.
설마 사이먼이 이런 치열한 결전 속에서 자신이 아닌 제3자에게 관심을 보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던 필스는 숨을 멈췄다.
‘여기서 창을 찌르면 사이먼은 죽는다. 하지만 동시에 케이디 공주도 죽는다.’
세상천지가 느려졌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필스의 머릿속에서는 수십, 수만 번의 문제가 몰아쳤다.
그것은 똑같은 문제였다.
‘그녀를 구할 것인가? 구하지 않을 것인가?’
평소라면, 아니 그녀가 케이디 공주가 아니었다면 전혀 고민하지 않았을 문제였다.
‘구하지 않는다.’
분명 그렇게 답했으리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케이디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첫 만남부터 그랬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 같은 느낌.
필스의 눈동자가 케이디를 향해 움직였다.
‘아······.’
케이디의 눈빛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미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처연한 눈빛.
필스는 이를 악물었다.
‘문제의 답이 꼭 정답일 필요는 없지.’
그는 억지로 손목을 비틀었다.
몸속의 마나가 제멋대로 비틀렸다.
창두가 방향을 바꿔 날아가는 장검을 겨눴다.
‘오답도 답은 답이니까.’
필스는 문제의 답을 정했다.
동시에 필스의 창이 손아귀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까앙!
엄청난 쇳소리와 함께 공간을 가르며 날아가던 사이먼의 장검이 산산 조각났다.
어찌 된 영문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
“케?”
그것은 사이먼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음을 직감했던 케이디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때.
“쿨럭.”
필스가 깊은 기침과 함께 핏덩이를 토해냈다.
그의 손아귀에는 분명 사라졌던 창이 다시 쥐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필스는 몸속의 들끓는 마나를 진정시키며 사이먼과 거리를 벌렸다.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 케이디의 곁으로 향했다.
다행히 사이먼은 눈앞에서 산산 조각난 장검에 정신이 팔려있는 상황.
“쿨럭.”
필스는 다시 한 번 깊은 기침을 토해냈다.
케이디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구나. 이 사람이 나를 구해줬어. 또, 또, 그리고 또······.’
시선이 따뜻해졌다.
“괜찮아요?”
걱정스럽게 묻는 질문.
필스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다만······.”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다시 싸우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미완성의 창법, 그것의 마지막 한 수.
완성하지도 못한 것을 흉내라도 내보려다 마지막 순간 억지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여파로 몸속의 마나가 크게 들끓었고 마나 로드에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보양을 한다면 충분히 치료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눈앞의 괴물, 사이먼이 기괴하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
“케케.”
녀석은 산산 조각 난 장검에게 금방 흥미를 잃었다.
사이먼의 시선은 다시 케이디에게로 향했다.
필스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오라버니가 동생을 정말 사랑하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케이디도 쓴웃음을 지었다.
필스의 몸이 망가진 이상 이제 남은 것은 죽는 일 뿐이었다.
“미안해요.”
케이디는 사과의 말을 전했다.
필스는 흐릿하게 웃으며 긴 숨을 내뱉었다.
“저도 그 말을 하고 싶네요.”
담담한 목소리.
케이디가 물었다.
“누구에게요?”
필스는 역시나 담담하게 대답했다.
“모시는 분에게요.”
“아······.”
더 이상의 질문은 필요 없었다.
케이디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사이 사이먼은 코앞에 이르렀다.
녀석의 오른손을 타고 검은빛이 흘러나왔다.
“케에.”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듯 내뱉은 기성.
사이먼은 오른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때.
“멈춰라.”
차갑고 싸늘한 목소리.
동시에 필스와 사이먼 사이에 붉은 그림자가 떨어졌다.
필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붉은 투구와 갑주, 망토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는 뒷모습만 보고도 눈앞의 붉은 무장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아아.”
두 눈에 속절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크으. 로안 부관님. 아, 아니 랜스필 백작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울먹이는 소리.
단단하게 버티고 서있던 붉은 그림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투구 아래로 붉은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을 발했다.
붉은 갑주의 무장은 로안 랜스필이었다.
로안과 필스의 시선이 뜨겁게 뒤엉켰다.
그때 돌연 로안의 입꼬리가 크게 올라갔다.
익살스럽게 웃는 모습.
“크크. 이 녀석이 바로 그 필스인가?”
분명 로안의 목소리였지만 그 말투와 내용은 평소 로안의 것과는 매우 달랐다.
필스는 크게 당황했다.
“예? 그, 그게 무슨······. 저 맞습니다. 접니다. 저 필스입니다.”
설마 로안이 자신을 잊었는가 싶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때 붉게 빛나던 로안의 눈동자가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으음. 특출 날 것도 없는 마나 수준으로 저 무시무시한 피엔빌 마기를 궁지로 몰아넣다니. 대단한 걸.”
다시 한 번 바뀐 말투.
필스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니다. 이 분은 랜스필 백작님이 아니야.’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로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이질감을.
필스는 두 눈을 매섭게 떴다.
“너는 누구냐?”
툭 내뱉는 소리에 놀란 것은 곁에 있던 케이디였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 사람이 바로 랜스필 백작이에요.”
“아니요. 이 사람은 랜스필 백작님이 아닙니다.”
필스는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로안이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오호. 놀라운 걸? 그걸 알아차리다니. 둘이 서로 꽤 오랫동안 떨어져 있······.”
익살스럽게 이어지던 말이 중간에 뚝 끊겼다.
동시에 검은빛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갈색 빛으로 바뀌었다.
“후.”
입가를 타고 긴 숨이 흘러나왔다.
익살스러운 미소 대신 흐릿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아······.”
필스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랜스필 백작님.”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
로안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오랜만이다.”
나직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
필스는 이를 악물었다.
터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는 것.
로안은 그런 필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뒤로 돌아섰다.
눈앞에 사이먼이 있었다.
부드러웠던 눈빛이 매서워졌다.
“필스.”
나지막하게 부르는 목소리.
필스의 시선이 로안의 뒷모습에 꽂혔다.
“인사는 나중에 하자.”
로안은 트라비아스 창으로 사이먼을 겨눴다.
“이 상태를 유지 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거든.”
알 수 없는 말.
로안은 기수식을 취하며 두 눈을 가늘게 감았다.
“금방 끝낼 테니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조금만 기다려.”
그 순간.
파아아아앗!
로안의 전신에서 검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아니, 검붉은 빛이 치솟았다.
그것은 흡사 지옥의 불길을 뒤집어쓴 악마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