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56화
“미안하다. 네가 이렇게 꺼릴 줄은 몰랐어. 좋아할 줄 알았는데. 피붙이 빼고 내가 널 가장 잘 아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아니, 싫은 건 아니야.”
“그럼 방금 전 반응은 뭔데?”
“후보로 올라가는 건 좋아. 근데 받는 건, 싫다기보다는 부담돼.”
“그게 무슨 말이야. 로또는 사고 싶은데 당첨되긴 싫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
대찬은 최재한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아까는 좀 너무 속물 같아서 제대로 말을 못 했거든. 속물보다는 위선자가 나으니까.”
“음?”
“노벨평화상 받으면, 그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야 돼. 나 이제 마흔이야. 나 운동도 열심히 하고, 먹을 것도 가려 먹으니까 100살까진 살 거라고. 교통사고 당하거나 지나가다 벼락 맞지 않는 이상. 그럼 60년 남았다 쳐.”
“60년을 성인군자처럼 살 수는 없다?”
“그래, 바로 그거지. 미쳤어? 공자 왈,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칠십 세가 돼서야 내 맘대로 해도 법에 안 걸린다고 했어. 하물며 공자님도 그런데, 나더러 40살부터 노벨평화상 격에 맞게 살라고? 그것도 지독하게 돈을 따져야 되는 기업가가? 그건 나더러 은퇴하란 소리지.”
대찬은 속을 내보일 수 있는 심복들에게도 점잔을 떨다가 가장 친한 친구 하나만 곁에 뒀을 때 부쩍 말이 빨라졌다.
최재한은 그게 웃겨서 피식 웃었다.
“지금도 그러긴 마찬가지잖아? 너 노리는 파파라치들이 좀 많니?”
“파파라치는 외부의 감시지만 노벨평화상 받는 순간부턴 나 스스로를 감시해야 할 판이야. 그건 마음가짐부터가 다르게 된다고.”
“그래도 노벨평화상 아무나 받냐. 1년에 한 명 받아.”
“내가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면서 아, 잘 살았다, 자위하고 싶을 때 받아도 늦지 않아.”
“다 늙어서도 받을 자신이 있다?”
“그때 돼서 못 받을 거면 지금도 안 받는 게 나아. 그리고 하나 더.”
“말해봐. 다 들어줄 테니까.”
“후보명단은 비공개지만 대충 거론되는 사람들 있잖아.”
최재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만약 내가 안 받으면 배당률 낮은 순서대로 수상자 될 확률이 높겠지.”
“그러겠지.”
“2위가 누군지 봤어?”
“무슨 변호사던데.”
“방글라데시 변호사야.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별명은 기억해. 배 무덤의 묘지기.”
“배 무덤의 묘지기?”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글라데시 치타공이라는 곳이 폐선박 해체 산업으로 유명해. 그래서 일명 배 무덤이지.”
“들어는 봤어. 폐기처분 된 선박을 해체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갯벌이 많고, 수심이 깊고, 해안선이 길고. 선박 해체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거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인건비.”
“응, 인건비가 이건 완전 거저야. 노동환경도 엉망이라 사람 수십 명 죽어 나가도 누구 하나 문제 삼질 않아. 집에서 쭈쭈바나 먹고 있어야 될 애들이 녹슨 철판에 여린 살 베여 가면서, 파상풍에 앵앵 울면서도 일해. 살려고. 그런데도 어쩔 수 없다고 그냥 두는 동네야.”
“안타까운 일이지.”
“그런 곳에 변호사가 자진해서 뛰어들어서 고군분투한다더라. 일하다 다친 사람들 치료비 몇 푼이라도 건지려고, 애들 하루 한 끼 먹을 거 두 끼라도 먹이겠다고. 아동노동 근절하자면 애들 다 죽으니까 일 시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제발 좀 사람 존엄성은 지켜가면서 살게 해달라고 목에 피를 토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더라고.”
최재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사람이 너 다음 2위라는 거지.”
“응, 데이터상으로는 내가 받아도 솔직히 문제 될 건 없어. 왜냐하면 난 3억 명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졌거든. 그 치타공 변호사가 아무리 애를 써봤자 나한테 못 비겨. 방글라데시 인구라고 해봤자 1억 6천만이고, 치타공은 당연히 그것보다 터무니없이 적으니까. 아마 그 변호사 덕분에 혜택 본 사람은 치타공 전체 인구 중에서도 손톱만큼이겠지.”
“응.”
“근데 개인 대 개인으로 보자고. 인간 조대찬이 그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변호사보다 남들 위해 열심히 살았어? 갯벌에 발 빠져가면서, 말라비틀어진 빵 한 조각 나눠 먹어가면서, 매일 철판에 사람 깔려 죽고, 애들 배고프고 아프다고 앙앙 우는 그 지옥도에서 버텨내는 그 사람보다 열심히 살았느냐고. 아니거든.”
“물론 그렇기야 한데.”
“내 조카 이름 내가 지어줬어. 빛처럼 귀한 사람이 돼서 먼지 같은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도우면서 살라고 화광동진 네 글자 중에 두 글자 따서 화진이라고 지어줬어. 왜 그렇게 지었겠어.”
최재한은 대찬을 잘 알았다.
“넌 그렇게 살 자신이 없으니까.”
“그래. 난 밥 한 끼 굶기도 싫어.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하기 싫어. 내가 뼈 빠지게 번 돈, 허투루 남한테 쓰고 싶지 않아. 쓰더라도 생색내면서 쓰고 싶어. 그래서 책임을 대물림하려고 걔 이름 그렇게 지었어. 그런데 그 변호사? 이미 화광동진 네 글자 부족하지 않게 살고 있지.”
“그래서 양보해야겠다?”
“양보해야겠어. 위선이라고 해도 좋아. 근데 저거 받으면, 그 변호사만큼은 아니더라도 흉내라도 내면서 살아야 될 것 같은 강박이 들 거야. 난 그 강박에 시달리기 싫어. 노벨상, 까짓거 양보하고 말지.”
“그래,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더 할 말이 없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내가 상 받긴 싫어도 후보 된 건 좋다고 했지.”
“응.”
“그게 내가 소름 끼치게 속물이라는 점이야. 이 와중에 손익 따지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 뭐 그런 말 알아? 야구 보면 종종 나오는 말이거든.”
“들어 봤어. 선수들 개인기록 만들어주려고, 포스트시즌 대진표 유리하게 하려고 치열한 승부 대신 꼼수에 열 올리는 사람들이 변명이랍시고 하는 말이잖아?”
“응, 근데 아이러니하게 사람들이 기록은 잘 기억 못 하는데 비난은 지금까지 하거든. 기록보다 이벤트를 더 잘 기억한다는 거야.”
“그 말은.”
“노벨평화상이 기정사실인데 이걸 겸손하게 사양한다. 차라리 이게 내 브랜드 가치에 도움이 된다는 거지.”
최재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생각나네. 리처드 파인만이라고, 유명한 물리학자. 유명해지기 싫다며 처음에는 노벨물리학상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걸 들은 지인이 말하길.”
“거절하면 더 유명해지는데요.”
“그래, 그래서 군말 없이 받았다는 거 아냐.”
“그래서 나는 거절할 거야. 이득만 챙기고 책임은 내팽개치겠다고.”
“과연 치 떨리게 속물이십니다.”
“그 치타공의 변호사님, 모쪼록 노벨 평화상 받으셔서 지원 빵빵하게 받고 끝까지 성자처럼 살아주셨으면 좋겠어. 양보하면서 나도 지원 좀 해드리려고.”
“오케이. 나는 수긍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최재한에게 말했다.
“알아들었으면 나가서 전길재 국장님 좀 들어오라고 해. 부탁드릴 게 있어서.”
최재한과 전길재가 바톤 터치를 했다.
전길재는 캐모마일 차 한 잔에도 여전히 분이 안 풀린 표정이었다.
“왜 불렀어요?”
“너무 심술 내지 마시고, 앉으세요.”
전길재는 말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제 결정에는 변함이 없고요. 그, 유소진 기자 있잖아요. 극동TV로 이직했죠?”
“네, 왜요.”
“인터뷰 좀 했으면 해요.”
“회장님이 직접 부르세요!”
“아이, 그러지 말고 좀.”
대찬은 전길재의 팔을 붙들고 아양을 떨었다.
전길재의 심술은 그럼에도 풀리지 않았다.
대찬은 유소진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유소진 기자는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굳이 영향력 미치는 언론사와 인터뷰 할 필요가 있으세요? 다른 곳에서 해도 어련히 잘해줄까. 회장님에 대한 여론이 요즘이 최고조예요.”
“시국이 민감해서요. 뉘앙스가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크게 느껴질 거라서.”
“노벨상 말씀이시죠. 국장님한테 대충 듣긴 했는데.”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금 수상한 것도 아니잖아요. 도박 사이트 배당률 하나만 믿고 받지도 않은 상 안 받겠다고 하면.”
“하긴, 이거 기사 쓰기 나름이네요.”
“나 물 먹이려고 하면 진짜 웃긴 인간으로 만들 수도 있거든.”
유소진 기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하네요.”
“그래서 아주 깨끗한 저널리즘의 소유자인 우리 유 기자님하고 인터뷰를 하려는 거죠. 지금은 전길재도 못 믿어.”
“아유, 이거 기대에 부응 못 하면 어쩌나.”
“그럼 나하고 절교예요, 절교!”
“최대한 왜곡 없이 말씀하신 그대로 실어드리죠. 그래서, 노벨평화상 후보마저도 거절하시겠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니까 이렇게 또 함정을 파세요. 자, 제가 준비한 멘트 할 테니까 잘 들으세요.”
“준비한 멘트 할 테니까, 이것도 그대로 실어드릴까요.”
“아, 왜 그래요, 진짜.”
유소진은 흐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노르웨이의 한 의원께서 저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해주신 기사를 접했다. 높이 평가해주신 데 대단히 감사하다.”
“네.”
“그리고 더 감사하게도, 적지 않은 분들이 제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것이라고 예상을 해주신다.”
“네.”
“그래서 여기에 대해 벌써 김칫국 마신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조심스럽게 입장을 밝히겠다.”
“아주 살얼음판 밟듯이 살금살금 조심이시네요.”
대찬은 잠깐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저는 제가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된 것부터 과분하다고 생각한다. WFP에서 수상하는 헝거 히어로 어워드도 제가 아닌 두 분의 뛰어난 기술자께서 받도록 했다.”
“밑밥은 다 깔린 거 같네요.”
“하나만 더 깔고요. 후보 명단이 공개된 건 아니지만, 저보다 더 헌신하는 삶을 살아오신 분들이 많이 거론되고 있다. 저는 혹시라도 그분들을 제치고 과한 영예를 누릴까 두렵다.”
“네, 그 정도면 됐습니다. 과공비례.”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선이나 후에 벌어질 소동을 피하기 위해, 저는 일찌감치 이 논의에서 배제되기를 바란다. 노벨위원회는 저를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켜주었으면 한다.”
“본론은 그 정도가 되겠네요.”
“네, 나머지는 맺음말 정도죠. 특히 방글라데시 치타공에서 사력을 다하는 변호사의 얘기에 감명을 받았다. 그분 역시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데, 수상 여부와 관계없이 개인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책을 고려하겠다.”
“그 말씀은 김칫국 마신다는 비난을 상당 부분 희석해주겠네요.”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그런 계산도 있긴 하지만 순수한 뜻도 없잖아 있습니다.”
“계산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이상, 순수라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네.”
대찬의 인터뷰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유소진은 대찬의 민원을 충실히 반영해 그의 말을 최대한 가공하지 않은 날것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그 말은 다행히 대중으로부터 오만하다느니 혼자 생쇼 한다느니 하는 비난을 충분히 방어했다.
위선적이라는 비판은 따르긴 했지만 감수할 정도는 되었다.
실제로 적잖은 위선이 가미된 것은 사실이었으니 대찬도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그리고 이듬해, 2023년.
치타공에서 사투를 벌이는 배 무덤의 묘지기 변호사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대찬은 직접 노르웨이로 날아가 그의 수상을 축하했다.
치타공의 변호사는 저 구석 자리에 앉아있는 대찬을 발견하고, 수상소감에서 그를 언급했다.
“오늘 또 다른 주인공이 여기 와 계십니다. 로튼 프룻츠의 조대찬 회장님. 잠깐 일어나주시겠습니까.”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타공의 변호사는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의 영향력은 치타공의 해안선에 그치지만, 조대찬 회장님의 영향력은 전 세계에 미칩니다. 그러나 조 회장님은 치타공의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에게 돌아갈 거대한 명예를 포기했습니다. 조 회장님을 위해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조 회장님.”
치타공의 변호사는 ‘감사합니다’를 어눌한 한국어로 말하며 대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대찬도 깊이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도로 자리에 앉았다.
치타공의 변호사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 영광을 조 회장님과 치타공의 친구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고단한 노동과 더 고단한 삶에 신음하는 전 세계의 이웃들과 나누겠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생각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시상식이 끝나고, 치타공의 변호사는 대찬을 찾아왔다.
대찬이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변호사님.”
“조 회장님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오늘 이런 기쁨도 없었을 겁니다.”
“헌신이라니, 부끄럽습니다. 변호사님의 삶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 이웃들을 살뜰히 살피겠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소임이 있는 것이죠. 조 회장님은 지금도 충분히 살피고 계십니다. 감히 더 살펴달라는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치타공의 변호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대찬의 손을 꽉 쥐었다.
대찬은 그에게 500만 불을 즉석에서 후원했다.
그리고 치타공 지역의 기아를 퇴치할 비도축육 시설 구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대찬은 뭉클해진 가슴을 안고 노르웨이에서 인천공항으로 들어왔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전길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 왔죠.”
“네, 제가 그렇게 보고 싶으셨어요? 어떻게 딱 내리자마자 전화를 하셨데.”
“용건이 있으니 전화를 하죠.”
“용건이 뭔데요.”
“행사를 하나 기획했거든요?”
대찬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행사라니.”
“치타공 변호사의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는 파티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이에요? 내가 직접 가서 축하했으면 됐지, 뭐 하러 서울에서까지 그런 파티를 벌여요.”
“명목은 그거고요. 노리는 진짜 목적은 이거죠.”
대찬은 찜찜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막았다.
“나 뭔지 알 거 같은데.”
“말씀해보시죠.”
“그분한테 상을 양보한 나를 한껏 띄워서 광고효과를 누려보자, 이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위선자 조대찬이 저절로 굴러 들어온 복을 자기가 걷어찼으니, 이렇게라도 반사이익을 누리자는 것이죠.”
대찬은 한숨을 쉬었다.
“나 위해주는 건 좋은데, 그걸 사람들이 곱게 볼까요?”
“아무렴요. 이건 개인의 이미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일이에요. 회장님이 싫고 미우면 곱게 안 보일 거고, 마냥 좋으면 이것도 마냥 좋게 보이는 거죠.”
“글쎄요.”
“이것도 거절하면 내가 아는 회장님의 약점들을 낱낱이 특집기사로 실을 테니 괜한 소리 마십시오.”
“…….”
전길재는 그러라면 정말 그럴 위인이니 대찬도 더 고집을 피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까.
빈민을 위해 애쓰는 이의 노벨상 수상을 호화스러운 호텔에서 축하한다면 이치에 어긋난다.
그래서 행사를 열되, 열린 장소에서 수상자의 철학이 담긴 행사를 기획하자고 대찬은 제안했다.
전길재 역시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다고 말하며 승낙했다.
행사는 여의도공원에서 열렸다.
따로 초청된 인원만 부르지 않고, 누구나 참석할 수 있도록 했다.
음식이 충분히 마련되었고, 치타공의 빈민들에게 지원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중고장터와 물품을 지원할 기부모임이 함께 열렸다.
조대찬과 윤이영, 두 유명인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관심을 가졌다.
그걸 고려해 일부러 행사를 평일에 잡았는데도 인파가 운집했다.
행사가 예정된 시각에는 안 그래도 막히던 여의도 주변 도로가 극심한 정체를 빚었다.
이 극심한 정체를 유발한 대찬을 나무라는 직장인 중에는 유백기도 있었다.
필래유통 유백기 차장.
-“출근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정체가 극심합니다. 여의도공원에서 정오에 열리는 행사 때문인데요. 이 주변 지나시는 분들은 가급적 우회도로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젠장, 이런 게 있으면 미리미리 좀 말을 해달라고. 이미 여의도 한복판인데 어쩌잔 거야.”
유백기는 신경질적으로 라디오 방송에 대고 일갈했다.
그는 하필 여의도공원을 바로 왼쪽에 끼고 여의대로를 운전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귀찮은 외근이 걸려서 짜증이 뻗치는데 뜻밖의 정체까지 만나니 짜증이 곱절이 되었다.
그는 한쪽 창문을 열고 담뱃불을 붙였다.
차가 멈춰선 채로 신호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
게다가 담뱃재를 잘못 터는 바람에 허벅지가 지저분해졌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쾅 핸들을 내리쳤다.
때리는 주먹만 아팠다.
“와! 와아아아!”
그때 열린 차창으로 사람들의 함성이 들렸다.
유백기는 그쪽을 흘끗 건너다봤다.
SUV 차량 한 대가 미끄러지듯 여의도공원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차에서 한 쌍의 남녀가 내렸다.
“…어?”
유백기는 순간 입술에 물었던 담배를 놓쳤다.
“앗 뜨뜨!”
그는 서둘러 담배를 창밖에 내버리고 허벅지를 툭툭 털었다.
짜증이 돋치는 와중에 그의 시선이 SUV에서 내린 남녀에게 머물렀다.
“…조대찬이잖아.”
유백기는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남녀, 대찬과 윤이영은 인파에 둘러싸여 거의 떠밀리듯 여의도공원 안쪽으로 향했다.
외근비서 겸 경호원인 마강국은 대찬을 지키느라 진땀을 뺐다.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백기는 무언가에 홀린 듯, 좌측 깜빡이를 켜고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그 인파에 합류했다.
“빨리 와, 늦었어. 행사 시작하기 전에 자기 친한 지인들끼리 사진 찍기로 했는데 다 엉망이 됐잖아.”
“미안, 미안. 근데 네가 화장만 좀 빨리…….”
“샤워하는 데 1시간 걸린 사람이 누구더라?”
“내가 죄인이오.”
대찬과 윤이영은 입씨름을 주고받으며 급히 여의도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려는데, 인파를 쉽게 뚫지 못했다.
겨우겨우 행사요원들이 질서를 유지하는 행사장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조금 숨통이 트였다.
윤이영은 굽 높은 구두를 신고도 걸음이 대찬보다 빨랐다.
“빨리 와. 만몽거사님까지 와계시는데 얼른 가서 사진 찍고 쉬게 해드려야지. 이게 무슨 민폐야.”
“예예, 알겠습니다.”
대찬은 윤이영의 손에 이끌려 종종걸음으로 행사장에 들어갔다.
유백기는 여전히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과연 윤이영이 말한 대로, 대찬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그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만몽거사부터 한마음양파영농조합 사람들.
고원대 선후배들.
로튼 프룻츠 사람들.
노근기 셰프.
서원웅과 김태준을 비롯한 필래 사람들.
해뜰녘의 백민하 사장.
요르단에서 잠깐 귀국한 김산하.
이제는 100만 구독자를 거느린 인터넷 방송인, 송희근 전 과장.
파푸아뉴기니의 줄리아.
태상바이오테크의 노태식 사장.
그리고 수많은 지인들.
그리고 가족들.
그들은 대찬을 위해 가운데 자리를 비워놓고 한참을 서 있었다.
윤이영은 그들을 발견하고 더 걸음이 빨라졌다.
대찬도 허둥거리며 열심히 윤이영의 보폭을 맞췄다.
그를 멍하니 보던 유백기는 저도 모르게 대찬을 불렀다.
“조대찬.”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를 뚫고 그 부름이 대찬의 귀에 닿았다.
대찬은 무심결에 뒤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유백기의 시선과 맞닥뜨렸다.
“…….”
대찬은 잠깐, 1초도 안 되는 순간 유백기를 바라봤다.
그리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 안 오고 뭐 해!”
그러다 자기를 닦달하는 윤이영의 목소리에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달렸다.
“누굴 그렇게 빤히 보고 있어? 아는 사람 있었어?”
“아는 사람? 아니, 나 아는 사람들은 다 저기서 나 기다리고 있잖아.”
대찬은 윤이영의 어깨를 붙잡고 서둘러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유백기는 대찬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그때 유백기의 전화가 울렸다.
받자마자 닦달하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찔렀다.
“야, 유백기. 너 지금 어디야! 베르사체 관계자들 벌써 와있다잖아! 내가 그 사람들보다 빨리 와있으라고 했지! 너 어디야, 대체!”
“…갑니다.”
유백기는 전화를 끊고 다시 길가에 세워둔 자가용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오래 기다린 사진사는 대찬에게 짜증을 냈다.
“이렇게 늦게 오시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찬은 연신 사과를 하고, 자신을 오래 기다린 사람들에게 다시 사과를 했다.
대찬과 윤이영이 빈자리를 채우자 사진사가 외쳤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대찬은 윤이영의 어깨를 꼭 붙들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찰칵.
사람의 인생은 그의 주변 사람을 보면 얼마나 잘 살았는가, 판별된다.
대찬의 모든 주변 사람들이 모인 한 컷은 대찬의 인생을 총망라했다.
두 번째 삶의 조대찬은 최소한 이 순간까지는 잘 살아오고 있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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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멀다면 먼, 가깝다면 가까운 그런 미래.
경기도 흥읍시 제민동.
로튼 프룻츠 본사의 한 사무실.
켜진 TV에서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재한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이 3시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취임식 준비가 한창입니다. 취임식이 열리는 국회의사당에 나가 있는 유소진 기자 연결하겠습니다. 유소진 기자?”
-“네, 저는 지금 국회의사당 앞 취임식장에 나와 있습니다.”
-“의자들이 참 많이 깔려있는데요. 어떤 사람들이 내빈으로 초청되었습니까?”
-“최재한 대통령 취임식은 특히 참석하는 내빈들이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해외인사로는 마이크 햇치 전 대통령이 미국 측 특사로 참석하고요. 쵸 후쿠히로 회장, 러위청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그리고 최 당선인이 피랍되었을 때 인연을 맺었던 스탠리 아이티 대통령 등이 참석하기로 돼 있습니다.”
-“국내 내빈으로는 누가 참석합니까?”
-“모든 전직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또, 최 당선인과 막역한 사이로 알려진 조대찬 로튼 프룻츠 회장과 서원웅 필래그룹 회장을 비롯해 주요 기업 총수들이 우선 참석하고요. 유명 셰프 노근기 씨, 배우 윤이영 씨, 허운 평양주재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역대 가장 화려한 면면으로 꾸려진 취임식이 되겠군요.”
그렇게 TV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대찬은 서화진과 함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서화진은 로튼 프룻츠의 사원 직함을 달고 있었다.
그는 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회장님, 지금쯤 출발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서울까지 막히면 어쩌시려고.”
“걱정 마. 헬기 타고 갈 거야.”
“대통령 취임식 날 헬기 띄워도 되는 거예요?”
“근처까지만 날아가고 중간에 차로 이동하기로 했어. 야, 너는 네 일이나 똑바로 해.”
“이 좋은 날에 저만 남아서 꼭 일해야 되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혼자 다 해요.”
“사사 발간 그거 누군 안 해본 줄 알아? 내가 너만 할 때는 말이야.”
“…또 옛날얘기 하시려고요?”
“네가 제대로 하면 옛날얘기 꺼낼 것도 없지.”
서화진은 푹 한숨을 쉬었다.
“이게요, 옛날 옛적 회장님이 필래그룹 사사 발간하던 때랑은 다르다니까요. 우리 로튼 프룻츠는 회장님의 영도 하에 어마무시한 발전을 한 바람에 실어야 될 사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그 어마무시한 발전상 좀 들어보자.”
“지금 벌써 열 번째 말씀드리는데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가 않아.”
서화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대찬의 뜻대로 해주었다.
“2024년, 연매출 50조 원 달성해서 국내 10위 안에 진입했고요.”
“응.”
“2025년, 비도축육 무상증여로 남수단 내전의 기초적인 평화협상 체결을 주도했고요.”
“응.”
“2026년, 일본 시장에서 연매출 1조 원 달성했고요. …더 해요?”
“응.”
“2028년, 고수혁 이사가 냉동된 매머드 사체에서 유전자를 채취해 세계 최초로 매머드 고기를 유통했고요. 이건 참 지금 봐도 기가 막히네.”
“기가 막히지. 먹어봤더니 맛있다는 게 더 기가 막혀.”
“2029년, 연매출 150조 달성, 전 세계 가축 사육두수는 비도축육 덕분에 20% 감소했고요. 더 해요?”
“더 해.”
그때 문이 쾅 열리고 마강국이 씩씩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만해!”
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한창 재밌는데.”
“재미? 재미있으세요? 난 늦을까 봐 죽을 맛인데? 헬기 타러 가세요, 지금 당장!”
마강국의 꽥꽥거리는 소리에 대찬은 주눅이 들었다.
그는 서화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29년까지 했다. 킵 해둬. 이어서 들을 거니까. 여기까지만 들어도 참 잘해왔다, 그치?”
“그러게요. 저도 나중에 회장님, 아니 삼촌처럼 할 수 있을까요?”
서화진의 질문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마강국이 대찬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가자고요, 좀!”
“알았어, 알았어.”
대찬은 마강국의 악력에 강제로 문 쪽으로 떠밀렸다.
그는 문고리를 붙들고 서화진을 돌아봤다.
“나중에 나처럼 할 수 있느냐고?”
“네.”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할 수 있어.”
대찬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