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54화
“김정은 위원장과 대화를 나눴습니까?”
“네, 독대했습니다.”
“어떤 대화가 오고갔습니까?”
“간단합니다. 북한은 대화 테이블에 다시 앉기로 했고, 로튼 프룻츠는 비도축육 공급을 재개하기로 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그 방안에 동의했습니까?”
대찬은 웃으며 긍정했다.
“네, 동의했습니다. 로튼 프룻츠는 앞으로도 세계평화체제 구축에 일조할 수 있다면 적극 동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찬은 추가 질문은 더 받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취재진 뒤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윤이영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았다.
미국과 북한의 실무회담은 김정은이 약속한 대로, 연기된 일정에 무사히 열렸다.
이후에도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시도는 번번이 난관에 봉착했다.
협상에 난항을 겪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그때마다 로튼 프룻츠가 소방수로 나섰다.
북한이 협상을 파투 내려고 할 때마다, 로튼 프룻츠는 북한으로 들어가는 비도축육의 물량을 의도적으로 줄였다.
발 빼면 재미없을 거라는 협박이었다.
“썅!”
김정은은 그럴 때마다 광분하면서 다시 협상 테이블에 담당자를 내보냈다.
그렇게 세 번쯤 하니, 김정은도 은근슬쩍 간 보는 행위를 중단하고 성심껏 협상에 임했다.
로튼 프룻츠는 대북 협상에 있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 로튼 프룻츠는 어떤 정부와 개인, 기업을 막론하고 북한 정권에 목줄을 채운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다.
북한은 지금껏 통미봉남(通美封南)을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남한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미국과 직접 통교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남한이라는 보모 혹은 대리인이 없어도 혼자서 외교를 잘 해낼 수 있다.
그걸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남한 기업인 로튼 프룻츠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때문에 남한 정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그런 전술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남한 정부는 로튼 프룻츠를 등에 업고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소외되지 않았다.
비도축육은 꾸역꾸역 북한으로 들어갔다.
북한의 식량난은 해소 단계에 진입했다.
세계식량계획, WFP는 오히려 북한 주민들이 주식인 쌀 대신 고기를 과잉 섭취함으로써 영양불균형이 우려된다고 할 정도였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로 잘못 알려진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북한에서는 가능했다.
이미 북한 이전에 아이티 등지에서는 상식이 된 지 오래이기도 했다.
로튼 프룻츠가 몇 번의 엄포를 놓은 이후.
협상은 순항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등을 필두로 대북사업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기업, 대연아산의 위상이 로튼 프룻츠 쪽으로 옮겨갔다.
대연아산은 그룹 자체가 중견기업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대북사업에 발을 들였다가 북한의 신의 없는 행보 때문에 1조 원가량의 손실을 입은 것이 결정타였다.
“회장님, 대연아산 현 회장님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요.”
대연그룹의 며느리로 들어와 그룹을 물려받은 현 회장은 대찬에게 만남을 청했다.
그녀는 대찬과 악수를 나누고 로튼 프룻츠 회장실에 마주 앉았다.
대찬은 그녀를 싹싹하게 대접했다.
“흥읍까지 멀 텐데,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쉬운 사람이 찾아와야지, 안 그래요? 제가 어떻게 감히 천하의 조 회장님을 오라 가라 하겠어요.”
“재계 까마득한 선배님 아니십니까, 하하.”
현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 회장 눈 밖에 난 금오 박 회장이 어떻게 됐는지 나도 눈 있어서 똑똑히 봐뒀거든요.”
“그거야 박 회장님이 저지른 죄가 있으니까요. 제 눈 밖에 나고 안 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 회장은 자기 옆자리에 핸드백을 내려놓고 대찬에게 말했다.
“용건이야 대충 아시겠지만, 대북사업에 관해서 의견을 좀 나누려고 해요.”
“네, 얼마든지요. 저희는 오히려 반길 일입니다. 대북사업 노하우는 대연아산에 비할 게 아니니까요.”
“우리는 이십 년 넘게 한 우물만 파는데도 엉망진창인데, 로튼 프룻츠는 쾌도난마로 김정은 목에 방울을 달아서 사실 처음에는 언짢았어요.”
“회장님이 길을 개척해놓으신 덕분에 빨리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에게도 기회가 되겠더라고요. 대북사업 하기에 차원이 다르게 상황이나 분위기가 좋아졌어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현 회장은 다리를 꼬며 대찬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행보를 보아하니, 로튼 프룻츠는 대북사업에서 절대 손해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하더군요.”
“손해 보고 싶어 하는 기업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앞에 있잖아요. 우리는 대북사업에 조 단위의 시설투자를 했어요. 그러다가 옴팡 망해버렸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말씀대로 투자입니다.”
“조 회장님은 그 투자조차도 안 하려고 하잖아요. 리스크 자체를 원천차단하고 완벽하게 자기가 주도하는 판을 원하시니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우리는 로튼 프룻츠의 힘이 필요해요. 대신 우리는 로튼 프룻츠가 짊어지기 싫은 리스크를 떠안을게요.”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로튼 프룻츠는 파주에서 북한으로 비도축육을 공급해 수익을 창출하고 일정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선을 유지할 거 아닌가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대북사업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어요. 그만큼 위험도 따르지만.”
“그렇죠.”
“로튼 프룻츠가 그 영향력을 우리에게 빌려주면, 우리가 그 위험, 리스크를 떠안고 북한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해볼 생각이에요.”
“그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좋은 건 사실입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재가동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평양에서도 횡행한다더군요.”
현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대북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입장이라면 주저하겠지만, 우린 이미 빠져나오기에는 너무 깊숙이 발을 담갔어요.”
“원하시는 걸 구체적으로 말씀해보시죠.”
“회사 하나를 새로 만들었어요. 워낭 인베스트먼트라고.”
“워낭이요?”
현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왜, 영화도 있잖아요. 워낭소리. 소 목에다가 다는 방울.”
“압니다.”
“우리 작고하신 선대 회장님이 소 떼 끌고 가서 물꼬를 텄고, 이제는 조 회장님이 비도축육을 공급하면서 더 이상 소를 잘 도살 안 하니까. 북녘 들판에 짤랑짤랑 워낭소리 들리는 걸 생각해서.”
“듣기 좋은 이름이네요. 순우리말이라 북한에서도 거부감이 없을 거 같고.”
“네, 이 회사를 대북사업의 전진기지로 삼을까 해요. 각종 설비투자와 남북경협을 진행하려고.”
“지지합니다.”
“말로만 지지하는 건 바라지 않아요. 이 회사에 조 회장님이 참여해주셨으면 해요.”
대찬은 미소를 띠었다.
“투자를 하라는 말씀인가요?”
“말씀드렸잖아요. 리스크는 우리가 진다고. 조 회장님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우리 쪽에서 발휘해주시면 그만이에요. 리스크 감수 안 하고, 열매만 취하시면 돼요.”
“그렇군요.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퇴짜 놓으시면 곤란해요. 이미 로튼 프룻츠 모실 준비를 우리 쪽에서 해놨으니까.”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워낭 인베스트먼트 대표, 김풍호 씨로 선임해두었거든요. 아시죠? 김풍호 씨.”
그 말에 대찬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아, 예. 알긴 아는데.”
“조 회장님과 막역한 사이라고 들었어요. 필래에서는 같이 합도 맞추셨고. TV에도 곧잘 나오더라고요. 자칭, 타칭 조대찬 전문가라며.”
“…그러는 걸 저도 보긴 봤습니다만.”
“그래서 특별히 선임했어요, 회사 대표로.”
현 회장은 생긋 웃으며 대찬을 바라봤다.
나 잘했지, 하는 표정이 너무 솔직하게 보여서 대찬은 난감했다.
“…그러셨군요.”
“무슨 문제 있나요? 아니면 너무 깜짝 선임이었나?”
시큼털털한 대찬의 반응이 현 회장은 의아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워낭 인베스트먼트에 참여하겠습니다. 단, 조건은 대표가 김풍호만 아니면 된다는 겁니다.”
“뭐, 뭐라고요?”
“김풍호 씨는 필래 비바체 대표로 재직하던 시절, 저와 서원웅 현 필래그룹 회장의 뜻에 심각하게 반하며 멋대로 경영하던 인물입니다.”
현 회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그럴 리가요. 김풍호 씨는 아주 당당하게 자기가 적임이라고 PR을 하던데.”
“그새 한층 더 뻔뻔해지셨나 보네요.”
현 회장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감히 자기를 물 먹였다는, 김풍호를 향한 괘씸함.
대찬의 앞에서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였다는 수치심.
그것들이 뒤섞여 동시에 몰려왔다.
대찬은 웃으며 현 회장에게 말했다.
“미디어가 그렇게 믿을 게 못 됩니다.”
“그러네요.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모욕감을 안겨드렸네.”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현 회장님의 잘못은 아니죠.”
“김풍호 씨는 즉각 해임하고 조 회장님의 의중을 최대한 반영해서 대표를 선임하겠습니다.”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성의를 보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쌍방에게 이로운 사업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도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하죠.”
대찬과 현 회장은 악수했다.
대찬은 현 회장이 세운 워낭 인베스트먼트에 사외이사로 취임했다.
별다른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위력이 있었다.
현 회장은 김풍호를 찾아가 불같이 화를 냈다.
“뻔뻔하기도 하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 조 회장하고 막역한 사이야? 그런 뻔한 거짓말을 나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회장님, 조 회장은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현 회장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뭐요?”
“까딱 잘못하다가는 판돈은 회장님이 내시고 꽃은 조대찬이 따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런 조대찬을 잘 다루려면 저처럼 조대찬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조대찬의 선의만 믿고 계셔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을 한 건 죄송합니다만, 제 가치는 회장님이 쓰시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현 회장은 잘못했다고 바짝 엎드리기는커녕 뱀의 혀로 자기를 농락하는 김풍호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당신, 나를 얼마나 물렁하게 보면 낯빛 하나 안 바뀌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당장 꺼져…….”
“회장님!”
“안 꺼져!”
현 회장은 김풍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면전에서 내쫓았다.
김풍호는 외투를 챙겨 후다닥 달아났다.
대찬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한창 두문불출할 때 뻔질나게 방송국에 드나들며 조대찬 전문가를 사칭한 죄를 그 정도로 혜량해줄 수 없었다.
대찬은 현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김풍호를 사기죄로 고소하시죠.”
“사, 사기죄요?”
“네, 저와의 친분을 허위로 내세워 연봉 억 단위의 계열사 대표 자리를 따냈으니. 사기가 아니면 뭐겠어요?”
대찬의 말에 현 회장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명확히 허위사실을 적시한 것도 아니고, 그 친분이라는 것이 정체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법정에서 우리 손을 들어줄지는…….”
“아마 우리 쪽에 유의미한 선고가 내려지지는 않겠지요.”
“그럼 고소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아뇨, 고소만 해주세요. 비싼 변호사 쓸 것도 없고요.”
“뭐, 조 회장님이 바라신다면 그러죠. 어려운 일도 아니니.”
현 회장은 김풍호를 대표 자리에서 해임하면서 그를 사기죄로 고소했다.
그렇게 공을 넘겨받은 건 극동일보였다.
-자칭 ‘조대찬 전문가’ 김풍호, 허위 친분으로 취직 후 들통…대연아산 “해임하겠다.”
(…) 김풍호 씨는 필래 비바체 대표로 재직 당시 조대찬 회장과 합을 맞췄다며 각종 매스컴에 ‘조대찬 전문가’로 섭외되었다. 그러나 로튼 프룻츠 측은 “조 회장과 김씨와의 인연은 오히려 악연”이라며 그의 주장을 적극 부인했다. (…)
(…) 김씨를 대북사업 전진기지로 설립한 워낭 인베스트먼트의 대표로 선임했던 대연아산 측은 그를 즉각 해임하고 사기죄로 고소했다.
김풍호가 출연해 멋대로 떠들었던 방송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자료화면으로 쓰였다.
현 회장의 말대로 그가 법정에서 치명적인 처분을 받기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매스컴의 위력은 확실했다.
그의 거짓말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통에 주변에 망신살이 뻗친 건 물론, 향후 그의 생계를 위한 취업의 길은 꽉 막혀버렸다.
김풍호는 극동일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극동일보의 반응은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대찬이 참여한 워낭 인베스트먼트의 대북사업은 급물살을 탔다.
북한 비핵화 협상이 어느 정도 진전을 보이면서, 미국과 UN에서도 대북제재를 일부 해제할 뜻을 비쳤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의 시찰단이 북한 핵시설을 시찰하기 위해 북한으로 들어갔다.
국제사회는 지금껏 번번이 좌절되었던 북한 비핵화의 과정, ‘뒤통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 지난한 여정이 이번에야말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며 한껏 고무되었다.
그건 북한 2,500만 인민들의 ‘단백질 여탈권’을 거머쥔 로튼 프룻츠가 위협적인 중재자로 군림한 덕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