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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52화 (552/556)

난 할 수 있어 552화

대찬의 말 한마디에 블라디보스토크, 하얼빈, 흥읍 설비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던 물량이 원천 차단되었다.

허운을 비롯한 평양 사무실 직원들이 잠깐 서울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북한은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김영재 대외경제상이 서면으로 의사를 교환할 여유도 없이, 직통 전화로 바로 대찬에게 항의했다.

“회장 선생!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오!”

“물량을 북한에 보내기 어려워졌습니다. 일시적으로 러시아, 중국, 남한 국내의 수요가 급증해서요.”

“세 곳에서 동시에 수요가 급증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구구절절 대외경제상께 설명드릴 의무가 제게는 없습니다.”

“회장 선생. 이건 계약 위반이오.”

“계약서에는 파주 설비 완공 이후부터 거래가 시작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파주 설비가 완공되기 전에는 적절한 방법으로 물량을 조달하기로 돼 있잖소.”

“적절한 방법으로 물량을 조달‘할 수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의무가 아니라 가능입니다. 지금은 조달할 수 없는 상황이니 하지 않아도 저희에게 잘못이 없습니다.”

김영재 대외경제상의 목소리가 펄펄 끓었다.

“계약서에 기렇게 나와 있다 해도, 이건 신의의 문제요, 회장 선생.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공화국에서 회장 선생을 어찌 신뢰한단 말이오?”

“그렇죠. 신의의 문제고 신뢰의 문제죠. 그런데 북한이 신의와 신뢰를 입에 담을 자격이 됩니까?”

“뭐, 뭐이 어드레?”

“저희가 이런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는 건, 북한이 번번이 판을 깨고 국제사회의 신뢰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김영재 대외경제상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항의했다.

“회장 선생은 뭘 모르면 아예 말을 하지 마오! 호시탐탐 공화국의 분열을 책동하는 미국과 구라파 열강들을 상대하는 일이 그리 녹록지 않음을 알아야 할 거요!”

“녹록지 않은 시국을 이딴 식으로 헤쳐 나가겠다면 나도 이딴 식으로 나오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아십시오.”

“이, 이 사람이 정말!”

“최소한 나는 그쪽과는 달리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을 위반하지는 않으니 날 욕할 자격은 없습니다.”

“지금 고작 고기 조각을 가지고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겠다는 것 같은데, 우리가 그런 알량한 공작에 쉽사리 당할 것 같소? 고기 없어도 우리는 지난 70년간 주체와 자주의 정신으로 버텨왔소.”

“예, 그럼 계속 버티세요.”

쾅.

대찬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로튼 프룻츠와 북한 사이의 교류가 그 한 통의 전화로 완전히 끝장났다.

그날 조선중앙통신의 한복 입은 아나운서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찬을 비난했다.

“썩은과일의 수괴 조대찬은 앞에서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뒤로는 공화국의 굳건한 자력갱생 태세를 무너뜨리려는 흉악무도한 경제침략전쟁의 각본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 백일하에 명명백백 드러나였다. 우리는 제국주의의 길잡이이며 요사스러운 헛소리를 망탕 줴치는 반당반혁명반민족종파분자 조대찬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세포조작으로 만들어진 거짓 고기를 먹지 않아도 공화국의 근로인민대중은 자력갱생의 높은 기치를 떨쳐 받들 수 있음을 조대찬은 그 독사 같은 초췌한 눈깔로 똑똑히 보아둘 것이다.”

대찬은 당분간 재택근무를 했다.

언론의 관심이 지나치게 쏠려서 당최 출근할 수가 없었다.

자택이나 본사 사옥이나 모두 흥읍 캠퍼스 안에 있기 때문에 캠퍼스를 걸어 잠그면 언론의 관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것대로 구설에 오를 수 있었다.

대찬은 대체적인 업무는 각 계열사 대표와 정덕춘 본부장에게 일임하고 중요한 결정만 자택에서 내렸다.

대찬은 서재에서 서류를 쌓아놓고 쉴 새 없이 전화를 받으며 일을 처리했다.

자택에서 일을 한다고 여유롭거나 하지는 않았다.

특히 저지른 일이 단순한 비즈니스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국내외의 정계에서도 이런저런 전화가 빗발치는 판이었다.

대찬이 그렇게 바쁜 와중.

윤이영은 웃으면서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반당반혁명반민족 종파분자, 사과 좀 드실라우?”

“당신까지 그렇게 부르기야?”

“초췌한 눈 독사같이 뜨지 말고 사과나 먹어.”

윤이영은 탁자 위에 껍질을 토끼 귀처럼 깎은 사과를 올려놓았다.

대찬은 윤이영에게 눈을 한번 흘기고 사과를 먹었다.

대찬이 아삭거리며 사과를 먹는 동안, 윤이영이 책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물었다.

“그런데 괜찮은 거야?”

“응?”

“너무 극단적인 초이스 한 거 아니냐구. 북한에서 난리 치는 거 봐.”

“난 또 난리 안 칠까봐 걱정했잖아.”

“뭐?”

대찬은 포크로 사과를 하나 찍어 윤이영에게 먹여주고 말했다.

“저렇게 난리 친다는 건 비도축육이 저 쪽한테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뜻이야.”

“반응이 밋밋했으면 오히려 로튼 프룻츠가 별 영향력이 없다는 뜻이니까 되레 낭패였을 거라는 거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년 상반기까지는 욕 좀 먹더라도 더 퍼주는 식으로 가려고 했는데, 워낙 비난이 심해서 더 버티기가 힘들더라고.”

“그래도 저쪽이 원하는 대로 나와줘서 다행이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만 좀 기다려 보자고.”

“바라는 대로 됐으면 좋겠다.”

대찬은 다시 사과를 찍어 먹으며 웃었다.

“봐봐, 윤이영이 깎아준 사과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을 때는 사과를 주든 안 주든 관계없었다고. 근데 내가 이 사과 맛을 알아버리니까 주기적으로 안 먹고는 못 배긴단 말이야.”

대찬은 아삭아삭, 몇 입 만에 사과를 해치워버렸다.

북한 수뇌부는 로튼 프룻츠의 결정에 단단히 뿔이 났다.

김정은은 본보기로 대외경제성 산하 조선국제무역촉진위원회의 위원장을 숙청하고, 김영재 대외경제상에게 노동교화형을 내렸다.

그것으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로튼 프룻츠의 평양 사무실 간판을 떼어다가 불을 질렀다.

당연히 로튼 프룻츠와는 영영 절교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뇌부의 뜻과 북한 주민들의 뜻은 일치하지 않았다.

지금껏 북한 주민들은 체제에 극도로 순종적이었다.

불만이 있어도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고, 인격이 말살된 로봇처럼 체제만을 위해 기능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기류가 달랐다.

로튼 프룻츠로부터 대량의 비도축육이 반입되었던 몇 달간, 그들은 천당에 있는 기분이었다.

쌀과 보리도 아니고 고기로 배를 불리다니.

그 맛과 포만감을 경험해본 이상, 그걸 몰랐던 과거로 돌아가기는 힘들었다.

체제고 최고존엄이고, 고기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로튼 프룻츠는 국경지대의 시장, 그러니까 북한 말로는 장마당에 비도축육을 조금씩 풀었다.

목이 마른데 아예 물을 안 주면 모를까.

똑똑 한두 방울씩 감질나게 물이 떨어지니 미칠 노릇.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해서 민심이 심하게 요동쳤다.

전대미문의 기근과 식량난으로 부랴부랴 대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과 엇비슷하게 민심이 흔들렸다.

북한 당국은 비도축육과 관련하여 반혁명적 책동을 벌이는 분자는 즉각 사살하겠다며 강도 높게 윽박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고기를 갈구하는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김정은의 집무실.

노동교화형을 받은 김영재 대외경제상이 김정은의 앞으로 끌려와 무릎이 꿇렸다.

잘 정돈되었던 머리는 완전히 헝클어지고, 며칠 사이에 행색이 남루해졌다.

김정은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김영재 동무.”

“예, 예! 위원장 동지!”

“이제 정신이 좀 드오?”

“예! 듭니다! 듭니다!”

김영재 대외경제상의 목소리는 처절하리만큼 군기가 들어 있었다.

김정은은 꿇어앉은 김영재 대외경제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동무.”

“예! 위원장 동지!”

“동무래 일 처리를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공화국 인민들이 고통받고 내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졌소. 아오?”

“죽을죄를 졌습니다, 위원장 동지!”

“나는 관대한 편이라는 걸 동무도 알 거요. 오늘부로 조선국제무역촉진위원회 위원장에 부임하오.”

“예!”

대외경제성 산하 기구의 장으로 부임하는 것이니 강등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김영재에게는 감지덕지였다.

김정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조대찬 그 반동 아새끼랑 담판을 지어서 일주일 안에 살림고기 배급을 정상화시키도록 하오. 알간?”

“알았습니다!”

“일주일이오, 일주일. 기한을 넘기는데도 동무를 살려두는 건 관대한 게 아니라 물러터진 게 되오. 기카문 나도 동무를 더 살려줄 수가 없소.”

“아, 알았습니다.”

“한 가지 더. 조대찬과의 협상 과정에서 공화국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오. 급하다고 우는 소리 질질 짜지 말란 소리요.”

“알았습니다!”

김정은은 턱짓으로 김영재를 내보냈다.

김영재는 후다닥 김정은의 앞을 떠났다.

일주일 안에 살림고기 배급을 정상화시켜야 한다.

1분 1초가 아까웠다.

대찬이 대북 비도축육 공급을 중단한 지 보름째 되는 날.

업무를 보던 대찬은 잠깐 거실로 나와 소파에 늘어져 쉬고 있었다.

윤이영과 나란히 늘어져 무료한 시선으로 TV를 보고 있었다.

윤이영은 머리 좀 식히라고 TV를 틀어주었다.

“조대찬 회장이 대외활동을 중단한 지 보름이 되었습니다. 행보에 대해 말이 많은데, 오늘은 조대찬 회장과 친분이 두텁다고 알려진 김풍호 전 필래 비바체 대표 모시고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김 전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예, 안녕하세요. 김풍호입니다.”

“김 전 대표님께서는 필래 비바체에 재직하실 때 조대찬 회장과 막역한 사이셨다고.”

-“하하, 막역까진 아니지만, 당시 필래 비바체에서는 조대찬 회장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제가 대표를 지냈다는 건 모두들 어렴풋이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역시 그렇군요.”

대찬은 그 와중에도 시종 자기 얘기를 떠들어대는 뉴스 채널을 봤다.

그는 제멋대로 자신의 ‘절친’을 참칭하고 알지도 못하는 얘기를 떠들어대는 김풍호를 보고 피식 웃었다.

“저 양반, 낯짝도 두껍지.”

그때 김영재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찬은 한 손으로는 윤이영을 껴안고 한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자세는 소파에 누운 채 그대로였다.

누구는 목숨을 걸고 전화를 걸었는데, 누구는 마누라를 껴안고 드러누운 채로 받았다.

김영재의 목소리는 침착하고자 애쓰지만 기저에 깔린 절박함이 완전히 감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조대찬 회장 선생, 나 김영재요.”

“오랜만입니다.”

“아직도 살림고기 공급을 중단한 결단이 유효하오?”

“유효합니다.”

“공화국이 뭘 해주면 결단을 철회하겠소.”

대찬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대외경제상 수준에서 결정될 일이 아닙니다.”

“…뭐요?”

“제가 평양에 가겠습니다.”

“뭐, 뭐요?”

그 말에 김영재보다 대찬에게 안겨 있던 윤이영이 더 놀랐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대찬의 등짝을 세차게 후렸다.

으억.

대찬은 튀어나오려는 소리를 겨우 꾹 참았다.

윤이영은 고리눈을 뜨고 대찬을 나무랐다.

“너 미쳤어? 거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가겠대. 나 과부 만들고 싶어서 환장했니? 이 반당반혁명반민족 종파분자야?”

대찬은 괜찮다는 듯 윤이영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 김영재에게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과 대화를 하고 싶으니 약속을 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회장 선생, 오만이 지나치면 독이 되오.”

“지금 누가 오만스럽게 전화하고 있는지는 대외경제상께서도 잘 알 겁니다.”

“…위원장 동지는 옆집 동무가 아니오. 회장 선생이 만나고 싶다고 만나지는 분이 아니란 말이오.”

“김 위원장도 지금 상당히 몸이 달아있어서 거절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불경한 언사는 삼가오!”

김영재는 자신의 통화가 정찰총국에 의해 감청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대찬이 저런 선 넘는 소리를 할 때마다 자신의 수명이 깎이는 듯 아찔했다.

대찬은 덤덤하게 제 할 말을 다 했다.

“거절하겠다면 사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평양에서 만나겠다면 다시 전화를 주시고, 아니면 다신 전화하지 마세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윤이영은 눈이 휘둥그레 커져서 그를 닦달했다.

“왜 이래, 정말?”

“걱정 마.”

“걱정 안 하게 생겼어, 지금? 가자마자 총 맞으면 어떡해. 아니면 수용소 끌려가면 어떡하냐구!”

“그럴 위인이면 베이징 가는 열차에서 진작 그랬을 거야.”

“그때하고 지금하고 상황이 다르잖아. 지금 김정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농락하고 있어. 어떻게 무사할 거라고 장담해?”

“그 정도 리스크는 감당해야지. 사소한 확률이야.”

윤이영은 답답해졌다.

“오빠 말대로 급한 쪽은 북한이라고 치자고.”

“응.”

“그럼 오빠는 여유 좀 부려도 되는 거 아니야? 왜 굳이 사지로 들어가는 건데.”

“저 인간을 봐봐.”

“뭐?”

대찬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맘대로 떠들어대는 TV 속의 김풍호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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