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51화
대찬은 회장실로 향했다.
가는 복도에서 마주친 정덕춘 본부장이 자연스럽게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평양냉면은 맛이 좋으시던가요.”
“글쎄요. 제 입에는 그냥 마포 을밀대가 더 맛있어요.”
정덕춘 본부장은 미소를 지었다.
“대북 공급물량을 올해 15만 톤, 내년에는 30만 톤, 최종적으로는 50만 톤까지 늘리기로 북쪽과 협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돼야죠. 대한민국 국민의 1인당 육류 소비량은 소와 돼지, 닭, 그리고 기타 가축을 모두 포함해 연간 50kg 수준이거든요?”
“네.”
“북한 사람들은 우리랑 유전자가 똑같으니까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걸 감안해도 40kg 정도가 적당하죠.”
정덕춘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한의 인구는 약 2,500만. 그럼 필요한 북한 내 육류는 연간 100만 톤 수준인데. 우리가 50만 톤을 충당하면…….”
“적정 육류 소비량의 절반을 우리가 책임지는 거죠.”
“너무 많아요. 더군다나 지금 북한에서 생산하는 육류는 100만 톤에 크게 못 미치는 23만 톤 수준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이걸 감안하면 북한에서 소비되는 육류의 3분의 2가 우리 비도축육이라는 건데…….”
“그 정도는 돼야지, 아니면 북한에 비도축육을 파는 의미가 없어요.”
정덕춘 본부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죠?”
“지금 북한에서 생산되는 육류 23만 톤. 적정량인 100만 톤에 한참 모자라는 데다가 이 물량이 모든 주민들한테 고르게 분배될 리가 없죠.”
“네, 당연히. 특권층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쭙잖게 물량을 보내면 상류층과 군인들에게만 돌아가고 일반 민중은 고기 구경도 못 할 겁니다.”
“그러겠죠. 근데 우리가 지금 북한 주민들 인도적 지원하자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네, 누차 강조했듯 비즈니스죠.”
“저쪽에서 대화 국면으로 전환하는 데 우릴 창구로 이용하길 원했고, 우린 거기에 응해서 얻을 거 다 얻고 공은 우리 손을 떠났어요.”
“네.”
“그럼 적당한 물량만 보내면서 유야무야 시키면 될 일이에요. 일을 왜 이렇게 키우세요?”
대찬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차와 커피가 구비된 곳으로 향했다.
“왜 그렇게 열을 내고 그러세요. 차 한 잔 하면서 좀 식히세요.”
“회장님, 50만 톤이면 우리도 쉽게 감당할 물량이 아니에요. 그러다 북한에서 뺀찌 놓으면 그 재고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세요?”
대찬은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정덕춘 본부장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씩 웃으며 물었다.
“캐모마일?”
정덕춘 본부장은 뾰로통한 얼굴로 퉁명스레 대꾸했다.
“국화차 주세요.”
“자, 뜨거우니까 조심히 드세요.”
대찬은 그녀의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잘 마실게요.”
정덕춘 본부장의 화를 가라앉힌 대찬은 차분하게 말했다.
“본부장님 의견은 체면치레할 정도의 물량만 공급하자는 말씀이시죠.”
정덕춘 본부장은 들었던 찻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편이 좋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턱없이 많은 물량을 공급하면 그때부터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정치가 돼요.”
“생각하시는 적정 물량은요?”
“최대 5만 톤이요. 이것도 많아요.”
대찬은 자신의 찻잔을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5만 톤이면 칼자루는 저쪽이 쥐게 돼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대화의 물꼬를 트긴 했지만, 아마 협상은 난항을 겪을 겁니다. 한두 번의 회담으로 뚝딱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겠죠.”
“그럼 북쪽에서는 우리와 더 거래 안 한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정덕춘 본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테면 그러라죠. 우린 아쉬울 거 없으니.”
“지금처럼 분위기가 괜찮다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분위기가 험악해진 이후라면, 우리 쪽이 받는 타격도 적지 않을 거예요.”
“약간의 손실이 발생하긴 하겠지만 생채기에 불과할 겁니다.”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회사 이미지도 엉망이 될 거예요. 돈에 눈이 멀어서 북한에 좋은 일만 하고 뒤통수나 맞는 회사가 될 겁니다. 우린 지금 어설프게 정치에 발을 들였어요. 향후 정치권의 샌드백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50만 톤씩 물량을 공급하면 오히려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화될 텐데요.”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회장님.”
대찬은 정덕춘 본부장을 똑바로 바라봤다.
“북한 주민들 모두가 고기를 풍족하게 즐기도록 만들 겁니다. 고기 맛을 아는 사람들로 만들 거예요.”
“그 말씀은…….”
“굶주림이 생활이었던 사람들은 남은 생의 굶주림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굶주림에서 벗어나 본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굶주림을 필사적으로 퇴치하고 싶을 겁니다.”
“북한 주민들을 고기가 없으면 못 견디게 만들겠다는 뜻인가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북한에서 우리와 거래를 차단하면 북한 전역에서 민심이 들끓도록 할 겁니다. 저쪽은 쏘지 못할 핵무기로 시위하지만, 나는 언제든지 쏠 수 있는 밥 무기로 시위할 겁니다. 밥을 핵으로 삼을 겁니다.”
“그게 될까요?”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5만 톤으로는 안 되지만 50만 톤으로는 됩니다. 칼자루는 김정은이 아니라 내가 쥡니다.”
대찬의 예상대로 민간 차원에서 물꼬가 튼 대화는 정부 간의 협상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건 ‘네가 먼저’였다.
북한은 ‘먼저 제재를 풀고 체제를 보장해라, 그럼 우리가 핵을 폐기하겠다’고 주장.
다른 국가들은 ‘먼저 핵을 폐기해라, 그럼 우리가 제재를 풀고 체제를 보장해주겠다’고 주장.
한참 평행선을 달리다가 정해진 회담이 연기되고, 간혹 취소되고.
그러다 대화 분위기가 차갑게 식어가고.
북한은 떼쓰는 어린 애처럼 애꿎은 동해 바닷물에 미사일 몇 발을 처박고.
그렇게 협상이 지지부진하고 북한이 심술궂은 무력시위를 함에도.
로튼 프룻츠는 남의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북한과의 교역을 계속 이어나갔다.
우리한테 미사일을 겨누는 주적한테 열심히 고기 갖다 바치느라고 수고가 많다는 비아냥거림이 곳곳에서 들렸다.
그래도 대찬은 묵묵히 고기를 북으로 보냈다.
2022년 상반기에만 10만 톤이 넘는 비도축육이 휴전선을 넘었다.
10만 톤의 고기는 원가에 가깝게 보내졌다.
평양 사무소에 머무는 허운은 이 대부분의 비도축육이 특권계층이나 다름없는 평양시민들과 군인들을 위해 주로 배급되었다고 전해왔다.
대찬은 정덕춘 본부장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본부장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하얼빈에 있는 설비 있죠.”
“네.”
“여유 좀 있나요?”
정덕춘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블라디하고 하얼빈은 비교적 해외 진출 초창기에 지어진 곳이라 안정화 단계에 들어간 설비들입니다.”
“그럼 추가로 생산 가능하겠군요.”
정덕춘 본부장은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설마…….”
“블라디랑 하얼빈의 설비에서 마구 찍어내서 북한으로 더 보내세요.”
“오 마이 갓.”
정덕춘 본부장은 탁 이마를 짚었다.
북한으로 그야말로 고기가 쏟아져 들어갔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접한 함경도, 하얼빈과 접한 평안도로 고기들이 그야말로 밀물처럼 들어갔다.
비난여론이 들끓었는데, 로튼 프룻츠는 ‘대화국면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조치’라는 짧은 입장만을 발표했다.
북한으로서는 흡족한 일이었다.
북한에서 로튼 프룻츠를 담당하는 김영재 대외경제상은 평양 사무실의 허운과 자주 만났다.
평양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허운은 김영재 대외경제상을 비롯해 북한의 무역ㆍ통상 관료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김정은과 독대를 나눌 정도의 위상인 대찬을 대할 때는 쩔쩔매던 김영재 대외경제상은, 허운을 대할 때는 여유로웠다.
다소 오만해 보일 정도로 여유로웠다.
대찬의 ‘급’이 쉽게 대하기에는 다소 높아 껄끄럽다면 허운은 자기보다 몇 수는 아래라고 여기는 탓이었다.
“허운 동무, 나를 포함하여 당과 내각의 동지들이 썩은과일살림고기무역회사의 조치에 크게 감동하고 있소.”
“…그렇습니까?”
“국제관계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이 위태하오만, 썩은과일살림… 에이, 로튼 프룻츠가 공화국과의 교류를 차단하지 않고 오히려 융성하게 이끌어오는 깊은 의리가 참으로 대단하단 말이오.”
“그렇게 여겨주시니 감사합니다. 본사에서는 대북제재 면제조치가 취소되지 않는 이상, 평화로운 대화국면을 유지시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다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조대찬 회장 선생은 참으로 인민들의 영웅이오.”
“뭐, 그런가요.”
허운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로튼 프룻츠 발 비도축육은 북한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고기라고는 내장, 선지 정도만 취하던 북한의 서민들에게도 고기다운 고기가 제공되었다.
고기가 하도 흔해졌다.
평양 같은 곳에서는 분쇄육 형태의 값싼 비도축육이 아니라, 3형 비도축육을 웃돈을 주고 사 오자는 말들이 많다고까지 했다.
‘1형은 반동이 먹고 2형은 동무래 먹고 3형은 내래 먹고 잡아 죽인 고기는 우리 장군님 잡수시네.’
그런 유행가가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횡행했다.
북한 정권은 동물성 단백질을 풍족하게 섭취하게 된 건 순전히 김정은의 덕택이라며 열심히 선전했다.
정권을 향한 주민들의 민심은 전례 없이 뜨거웠다.
김정은은 자신감을 얻었다.
식량난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식량 확보에 투입되는 석유를 아껴 다른 쪽에 투입할 수 있었으니 에너지난 역시 일부 극복되었다.
당장 먹을거리만 해소되면 나머지야 급할 것 없었다.
김정은은 비도축육을 믿고 배짱을 튕겼다.
다시 UN과 미국에서 제재를 가하면 로튼 프룻츠도 별수 없이 철수해야 하지만, 그건 대화국면의 완전한 실패를 의미한다.
때문에 UN과 미국 역시 홧김에 내지르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로튼 프룻츠는 계속 비도축육을 북한에 욱여넣었다.
그러다 급기야 일이 터지고 말았다.
“북한이 미국과의 장관급 실무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했습니다. 최근 지지부진한 협상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의도로 풀이됩니다. 또한, 최근 식량난이 크게 개선된 덕에 이유 있는 배짱이라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미국은 일방적인 북한의 조치에 크게 반발하며, 엄중한 경고를 남겼습니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화국면 역시 수포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언론보도가 이어지자 정덕춘 본부장은 더 참지 못했다.
그녀는 당장 대찬에게 달려가 항의했다.
“우린 이제 여지없는 공산당의 끄나풀이 됐어요.”
“어느 단체는 우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하겠대요. 이적행위를 했다면서.”
대찬의 태연자약한 말에 정덕춘 본부장은 기가 막혔다.
“회장님, 솔직히 이쯤 되면 고발당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대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발당하면 안 되죠.”
“이제 와서요?”
“네, 이제 와서. 지금까지 북한에 투입된 물량이 얼마나 되죠?”
“친애하는 조대찬 회장 선생께서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와 중국 하얼빈의 설비를 가열하게 가동하라는 력사적 결단을 내리신 덕분에, 벌써 20만 톤을 넘었습니다.”
“북한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시네요. 허운하고 바톤 터치하셔도 되겠는데요.”
“말장난할 기분 아니에요.”
대찬은 웃음을 지었다.
“알았어요. 우리 본부장님 기분 풀어드리려면 어쩔 수 없네.”
“…네?”
“블라디보스토크, 하얼빈 설비 모두 정상화시켜 각각 원래 담당하던 러시아 극동관구와 중국 동북부 물량만 소화하도록 지시하세요.”
“갑자기요?”
대찬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북측에 통보하세요. 파주 설비가 완공될 때까지 비도축육 공급은 없다고.”
“회, 회장님.”
당황한 정덕춘 본부장의 눈이 커졌다.
이렇게까지 해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오래된 집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얼음장 같은 냉수 아니면 펄펄 끓는 온수였다.
정덕춘 본부장이 원한 건 적당히 물량을 조절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예 비도축육 공급을 전면 차단하겠다니.
도대체 중간이 없다.
“그 전에 허운 이사 포함 평양 사무실 직원들 안전하게 흥읍으로 복귀시키시고요.”
“북한 쪽에서 반발이 심할 텐데요.”
“우리가 대외경제성 산하 조선국제무역촉진위원회와 맺은 계약에 따르면 말이죠.”
대찬은 탁자 위의 서류철을 뒤적여 계약서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주식회사 RF 미트는 경기도 파주시에 비도축육 설비, 괄호 열고 이하 파주 설비 괄호 닫고, 를 구축한다. RF 미트는 파주 설비에서 생산되는 비도축육의 물량을 연간 20만 톤 이상을 유지한다. RF 미트는 파주 설비에서 생산되는 비도축육의 70퍼센트 이상을 북한 대외경제성 산하 조선국제무역촉진위원회가 지정한 회사와 거래한다.”
대찬은 계약서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정덕춘 본부장에게 말했다.
“그 말인즉슨, 파주 설비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북한에 비도축육을 보내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조달된 물량은 순전히 우리의 선의에 의한 것이고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의 조치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러시려고 러시아, 중국 설비까지 총동원하셨던 겁니까.”
“말씀드렸잖아요. 비도축육은 쏠 수 있는 핵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