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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50화 (550/556)

난 할 수 있어 550화

“저는 이거 퍼다 주는 게 아니라 갖다 파는 건데요.”

“값이 저렴하게 책정된 건 부정 못 하시겠죠.”

“네, 그래도 예전에 쌀 보내주던 것과는 좀 다르죠.”

“어떻게 다른데요?”

“찔끔찔끔 보내는 게 아니라 왕창 보내니까요. 앞으로 갈 물량은 군인 다 먹이고 주민들한테도 넉넉히 돌아갈 정도로 어마무시할 겁니다.”

“우리 주적의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건 이적행위 아닌가요?”

“그렇게 본다면 딱히 할 말은 없어요. 배부른 적군이나 배고픈 적군이나 우리 군이 체감하는 정도가 얼마나 다를지는 모르겠네요. 알보병으로 싸우는 시대가 아니니까.”

“군인들 먹이고 남은 건 내다 팔면 어떡합니까. 그걸로 탱크 사고 전투기 사면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누구한테 내다 팔아요. 중국? 러시아?”

“그쪽에서 못살 것도 없죠.”

“그 동네에는 비도축육 공장 없대요? 그거 실어 나르는 물류비 빼면 인건비도 안 나올걸요. 그네들이 자기네 나라에도 있는 걸, 그것도 돈이 얼마 되지도 않는 걸 굳이 대북제재를 위반해가면서 들여올까요? 게다가 냉동 상태로 보내야 할 텐데? 고기는 신선도가 생명이에요.”

“그래도 팔아치운다고 하면요?”

“그럼 값을 올리죠, 뭐.”

“값을 올린다고 해도…….”

전길재는 아주 끝까지 물고 늘어질 요량이었다.

저렇게 얻어낸 대찬의 발언 한 마디, 한 마디를 토막 내서 기삿거리로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써먹을 게 분명했다.

그런 전길재의 끈질긴 태도에 대찬 대신 윤이영이 나섰다.

그녀는 전길재에게 눈빛을 쏘며 말도 쏘았다.

“평양까지 길이 엉망이라 오래 걸린대요. 자꾸 말 걸지 말고 눈이나 좀 붙여둬요.”

“예…….”

윤이영은 다시 한번 찌릿 눈빛을 쏘고 눈을 감았다.

대찬은 흐흐 웃으며 전길재에게 말했다.

“이렇게 과묵할 줄도 아는 분이셨군요.”

“…….”

대찬은 웃음을 머금은 채 윤이영의 손을 꼭 잡고 꾸벅꾸벅 졸았다.

평양으로 가는 길이 과연 엉망이라, 덜컹거리는 통에 대찬은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평양에 도착한 대찬은 최고위급 귀빈만 머무르는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정은과 만났다.

김정은은 돌아가는 상황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열차에서 만났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펴 있었다.

그는 대찬을 직접 영접하는 자리에서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조대찬 회장 선생의 결단에 온 세계가 찬사를 보내고 있소.”

“온 세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북한 인민들은 위원장님의 결단에만 찬사를 보내더군요.”

“아, 좋은 날에도 꼭 매운 말을 쏘아야 직성이 풀리는가 보오.”

김정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첫 만남 때보다는 대찬의 화법에 제법 익숙해진 모양인지 더 항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찬과 잠깐 악수를 하고, 그와 나란히 선 윤이영과의 손은 한참 쥐고 있었다.

“회장 선생은 다 가졌구만 기래. 이런 미녀를 부인으로 두었으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겠소.”

대찬은 윤이영의 손을 꽉 쥐고 있는 김정은의 두툼한 손가락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그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지 어떻게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겠습니까. 괜찮으시면 얼른 식사부터 하시죠. 먼 길 오느라 한참 공복입니다.”

“어흠, 기러시지요.”

김정은은 윤이영을 한 번 더 흘끗 보고 대찬을 연회장으로 이끌었다.

대찬은 함께 초대받은 최재한에게 속닥거렸다.

“저 돼지새끼가 한 번 더 추근거리면 남북 협력이고 뭐고 없으니까 네가 이영이 잘 좀 지켜줘.”

“영빈관에서 저 인간 보고 돼지새끼라고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일 거야.”

대찬은 꽁한 표정으로 윤이영에게도 말했다.

“이영아, 가서 손 씻고 와.”

“유난 떨기는.”

“유난이 아니라……!”

대찬이 뭐라고 한참 쏟아내려는데 앞서가던 김정은이 그를 흘끗 돌아보며 말했다.

“회장 선생, 얼른 안 오고 뭐 하시오.”

“아, 예예, 갑니다.”

대찬은 입 모양으로 손 씻고 와, 당부를 주고는 김정은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대찬은 1박 2일의 일정 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김정은은 대찬의 카운터파트로 김영재 대외경제상을 지목했다.

일개 기업인을 상대하는 데 장관급의 인물을 붙여준 것이었다.

그만큼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었다.

김정은은 대찬과 나란히 앉아 적잖이 술을 마셨다.

윤이영은 주로 북한의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교류했다.

대찬은 김정은과 대화를 하면서도 문화예술계의 응큼한 풍류객들이 쓸데없이 추파를 던지지 않을까 계속 시선을 그쪽으로 향했다.

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회장 선생은 어지간히도 애처가인가 보오.”

“워낙 미색이 뛰어나서 불안합니다.”

김정은은 호탕하게 웃었다.

“회장 선생, 팔불출 기질까지 있는 줄은 몰랐구만 기래.”

“하하.”

김정은은 대찬에게 건배를 제의하고 대번에 술을 마셨다.

“자, 이제 모든 론의는 끝났으니 이제 우리 대범하게 말해봅시다. 사업을 함에 있어 내 도움이 필요한 기 있으문 기탄없이 말해보오.”

“그럼 몇 가지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말하오.”

“일단 평양에 작은 사무실을 하나 얻었으면 합니다.”

“판공실 하나 내는 기 무에 어렵겠소. 그리하오. 김영재 동무.”

김정은은 대찬의 파트너인 김영재 대외경제상을 불렀다.

그는 절도 있게 대답했다.

“예, 위원장 동지.”

“해방산거리 근처에 판공실 하나 내주오.”

“그리하갔습니다, 위원장 동지.”

대찬은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기밖에 다른 부탁이 있으문 이참에 다 하시오.”

“없습니다. 나머지는 김영재 대외경제상과 논의하여 처리하겠습니다.”

“기래, 김영재 동무, 웬만한 사업은 나한테 보고할 것 없이 회장 선생의 뜻대로 하오.”

“알갔습니다.”

김정은은 대찬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긴데 회사 이름이 말이오.”

“예.”

“로튼 프룻츠란 이름이 스위스련방에서 유학해본 나는 익숙하오만, 우리 인민에게는 낯설단 말이오.”

김정은의 말을 김영재 대외경제상이 거들었다.

“로튼 프룻츠는 미제 자본주의 물이 너무 들어간 이름입니다, 회장 선생.”

“그럼 평양의 사무실에는 다른 이름을 썼으면 한다는 겁니까?”

김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래주었으면 하오.”

“그럼 적절한 이름을 고민해보겠습니다.”

“번거롭게 고민할 기 뭐 있소. 내래 생각을 좀 해봐서.”

“어떤…….”

김정은은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연회장을 가득 메운 북한의 관료들이 동시에 기립했다.

김정은은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내래 살림고기 회사의 이름을 한번 생각해봐서. 동무들이 듣고 어떤지 의견을 얘기해보라.”

“예, 위원장 동지.”

“어렵게 생각할 거 뭐 있간. 로튼 프룻츠는 조선말로 하면 썩은 과일이 아니네? 기카고, 로튼 프룻츠가 취급하는 게 살림고기 아니네?”

“맞습니다, 위원장 동지.”

대찬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렇게 하자우. 썩은과일살림고기무역회사. 기카문 평양에 있는 간판은 썩은과일살림고기무역회사 평양 판공실이 되는 기지. 어떻네.”

“참으로 아름답고 웅대한 호연지기가 느껴지는 이름입니다, 위원장 동지!”

관료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김정은의 결정을 찬양했다.

김정은 역시 슬렁슬렁 박수를 치며 대찬을 바라봤다.

“우리 당과 국가와 군대의 사람들은 좋다고 하는데, 회장 선생 생각은 어떻소.”

“…….”

대찬이 즉답을 내리지 않자 김정은은 인상을 구겼다.

대찬은 한숨을 쉬며 박수를 쳤다.

“위원장 동지의 위대한 결단에 박수를 보냅니다.”

김정은의 얼굴이 확 펴졌다.

“기렇디? 역시 회장 선생도 이 네이밍 쎈스가 있단 말이오.”

그렇게 박수로 결정되었다.

썩은과일살림고기무역회사 평양 판공실.

대찬은 북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흥읍으로 돌아왔다.

이미 흥읍의 목장은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찬은 물량을 무리 없이 충당할 수 있다는 설비 책임자의 말을 듣고, 안심하며 본사로 돌아왔다.

평양 사무실이 열렸으니 거기서 상주할 인원이 필요했다.

외교관도 아니고, 일반 직장인의 자격으로 평양에 주재하게 되는 건 최초였다.

대찬은 주요 임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에두르지 않고 바로 말했다.

“이 중에 누군가는 평양으로 가야 됩니다.”

그 말에 직원들의 표정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사우디에 출장 갈 인원을 선발할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는데, 어둠의 기운 자체가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출장이 아니고 아예 평양에 눌러앉아야 되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남한 사람 최초로 북한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게 될 영광은 재빠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답니다. 자, 빨리 자원하세요.”

“…….”

개성이면 어떻게든 도망쳐 올 수라도 있지.

평양이라면 남북관계가 험악해졌을 때 신변이 어떻게 될지 장담하지 못했다.

그러니 미치지 않고서야 자진해서 그 험악한 땅으로 가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대찬 역시 그들의 심정을 모르지는 않는 터.

그는 쓴웃음만 지을 뿐,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평양 근무는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있긴 할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꼭 가야 돼요. 인원은 최소한으로 파견할 생각입니다. 임원급 1명과 직원 4명으로 단출하게 구성할 겁니다. 제가 임원급을 직접 선발하고, 선발된 임원께서 민주적인 방법으로 직원 4명을 뽑아주시면 됩니다.”

“…….”

“평양에서 근무하는 분들께는 고생하는 만큼의 대우를 해드릴 겁니다. 특별수당 지급하고, 향후 업무고과도 유리하게 산정될 겁니다.”

“…….”

그럼에도 누구 하나 쉽게 나서지 못했다.

대찬은 팔짱을 낀 채로 침묵을 지켰다.

이건 함부로 강제할 사항이 아니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누구 하나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대찬은 물론 좌중의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지원자를 발견한 대찬은 의외라는 기색이었다.

“허운 이사, 지금 손든 거 맞죠?”

“…예, 맞습니다.”

“웬일로 자원을 했어요? 정말 가고 싶어서 가는 거 맞아요?”

“뭐… 가고 싶은 건 아닌데요.”

대찬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요?”

“필래 때부터요. 솔직히 회장님 꽁무니 졸졸 따라다니면서 능력도 없는데 승진은 엄청 빨랐잖아요.”

비바체가 로튼 프룻츠에 합병되면서 대찬의 최측근인 허운도 이사 자리를 하나 꿰차고 있었다.

“…….”

대찬은 인사치레라도 아니라고 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못했다.

허운은 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서 주제에도 안 맞게 이런 대단한 회사에서 이사 자리를 꿰찼는데, 이제는 밥값 좀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기는 한데…….”

“평양으로 보내기에 제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면 절 보내주세요.”

대찬은 허운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허운이 평양 사무실에서 주재할 임원으로 낙점되었다.

결정이 되자 임원들은 각자 자리로 뿔뿔이 흩어졌다.

대찬은 허운을 따로 불러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안 괜찮다면, 이제 와서 무르지도 못하는데 왜 물어봅니까?”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그건 그런데.”

“걱정 마세요. 설마하니 총 맞아 죽기야 하겠어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적잖이 불편할 텐데.”

허운은 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이걸로 덜 부끄럽게 됐어요.”

“부끄럽다니.”

“나도 보는 눈, 듣는 귀 있다고요. 이 회사 임원들 경력 짱짱하고 능력 짱짱한데 나만 튀잖아요. 나만 조대찬 낙하산 타고 이사 자리 꿰찬 거 아니에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당신은 내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 자체로 능력이라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남들 생각은 안 그래요. 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뒤에서 날 뭐라고 부르는 줄 아세요? 낙허산이래요, 낙허산. 이번에 평양 가서 사고만 안 치면 그런 평가가 사라지겠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직통으로 말해. 최대한 편의 봐줄 테니까.”

“말씀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가서 크게 할 일은 없겠지만, 아마 술은 좀 자주 마셔야 할 거야.”

“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북한 요인들하고 친분을 좀 쌓아놔. 나중에 요긴하게 쓰일지 모르니까.”

“하긴, 따지고 보면 내가 남한 사람으로는 최초로 평양 시내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된 거잖아?”

“북한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평양 한 번이나 들러봤을까. 어떤 면에서 형은 누구도 쌓지 못할 경력을 쌓을 기회를 얻은 거야. 그거 잘 활용해.”

허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요.”

대찬은 웃으면서 허운의 팔을 툭툭 두드리고 자리를 떴다.

허운은 벽에 등을 기대고 허공에 한숨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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