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49화
마이크 햇치는 ‘자기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언론의 포커스가 집중된 대찬을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 불러들여 친분을 과시하고, 대찬에게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겠다는 뜻이었다.
마이크 햇치는 부통령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유진 깁슨은 바로 대찬에게 전화를 걸어 상관의 뜻을 전달했다.
“나더러 워싱턴으로 오라고?”
“응, 너한테도 나쁜 일은 아닐 거야. 미국 부통령의 간접적인 지지를 얻는 거니까.”
“그렇지. 서로 간에 이득이 되는 일이지.”
대찬이 시원하게 대답하자 유진 깁슨은 웃음을 띠었다.
“그럼 가까운 시일 안에 와줬으면 하는데.”
“그러지 뭐. 근데 말이야.”
“음?”
“한 가지 부탁을 부통령께서 들어줬으면 하는데.”
“…부탁?”
유진 깁슨은 얼굴을 찌푸렸다.
부통령과 단독 면담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이 거래는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뭘 더 얹겠다는 건가.
역시 장사치는 장사치다.
유진 깁슨은 용건을 듣기 전부터 질려버렸다.
대찬은 용건을 말했고, 유진 깁슨은 그걸 듣고 골몰히 생각하다가 답했다.
“이건 내 선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부통령과 협의 후 다시 연락 줄게.”
“그래, 기다린다.”
대찬은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햇치 부통령 역시 그 말을 듣고 여러 사람과 논의를 한 끝에야 겨우 결정했다.
대찬은 대답을 듣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마이크 햇치는 백악관의 부통령 집무실이 아니라, 자신의 관저로 대찬을 불렀다.
그러니까 이건 바이든 대통령의 작품이 아니라 순전히 내 작품이라는 걸 알리려는 의도였다.
여기에 대통령은 적잖은 불쾌감을 표시하긴 했지만, 햇치 부통령이 대통령만큼 인기가 좋은 터라 대놓고 훼방을 놓지는 못했다.
대찬이 부통령의 관저 앞에 도착하자 햇치 부통령이 불러놓은 기자들이 플래시를 무자비하게 터트렸다.
대찬은 눈이 부셔서 손차양을 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욕심도 어지간해야지.’
대찬은 자신에게 달려들어 마구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에게 미소만 띠고는 부통령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마이크 햇치는 웃으며 대찬을 맞이했다.
딸린 보좌관도 없이 혼자였다.
엄밀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었다.
대포를 방불케 하는 크기의 카메라를 든 전속 사진사가 열심히 둘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겠다는 의도였다.
“어서 와요. 이렇게 보니까 감회가 새롭군요.”
“네, 여러모로.”
대찬 역시 웃으면서 햇치 부통령과 인사를 나눴다.
첫 만남은 유학생과 주지사 후보였는데 이제는 처지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햇치 부통령의 전속 사진사는 둘이 마주 앉기도 전에 거의 백 장에 가까운 사진을 이미 찍어놓았다.
아마 자리가 끝날 때까지 천 장은 족히 쌓일 것이었다.
그러면 햇치 부통령은 거기서 거기인 사진들을 심사숙고해서 골라 언론에 배포할 것이었다.
소위 권력의지는 정치인의 미덕.
저런 행동들이 대찬의 눈에 그다지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저렇듯 욕망을 솔직하게 표출하는 쪽이 거래하기도 편했다.
대찬은 성심껏 사진을 찍혀주고는 햇치 부통령과 마주 앉았다.
햇치 부통령은 다리를 꼬고 앉아 가만히 웃기만 하다가 입술을 뗐다.
“깁슨 의원에게서 얘기는 들었습니다. 꽤 맹랑한 조건을 내걸었던데.”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UN 안보리에서 발언할 수 있게 해달라?”
“신청은 한국 정부를 끼고 할 테니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반대만 하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우리가 반대하지 않으면 로튼 프룻츠에 대한 대북제재 일시 면제의 뜻을 간접적으로 밝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미국이 그런 뜻을 보이지 않으면, 제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노력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햇치 부통령은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곧게 의지하며 말했다.
“미국은 급하게 끌려갈 의지가 없습니다. 급할 게 없으니까요.”
“제 주제에 미국을 끄네 마네 할 생각조차 없습니다.”
“생각조차 없다는 분이 행동은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시잖습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어떻게 보면 제가 미국이 할 일을 대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은 부담 없이 결정과 허락만 내리면 되는 입장입니다.”
“그거야 말 놀음에 불과하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리 조건을 듣고도 자신을 여기로 불렀다는 건 받아들일 의사가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괜히 쉬워 보이기 싫어서 배짱을 튕기는 것이다.
대찬은 고분고분 햇치 부통령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제가 기댈 인맥 중에 부통령님의 파워가 가장 센데.”
“정부 관계자도 아니고, 국제단체 수장도 아니고 일개 기업인한테 안보리 자리를 내준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어요.”
“새로운 역사를 함께 쓰시죠.”
“연설문은 사전에 미국 정부와 공유해야 합니다. 그 이상의 돌출 발언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됐다.
사전협의야 어쩌면 당연했다.
당장 중국이 이런 쪽에 소홀했다가 스포트라이트를 대찬에게 완전히 도둑맞아버린 걸 미국은 똑똑히 지켜봤다.
예방책을 세워놓지 않는 게 되레 이상했다.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 협의의 궤도를 이탈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요. 그럼 대통령과 협의를 해서 자리를 만들어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기브 앤 테이크는 확실했다.
햇치 부통령이 힘을 써주는 대가로, 대찬은 그가 제안하는 워싱턴에서의 모든 일정을 충실히 소화해야만 했다.
햇치 부통령은 순종 반려견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대찬을 이 자리 저 자리 끌고 다니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대찬에게도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부통령이 참석하는 자리는 격이 낮을 수가 없었다.
대찬에게는 이 일정들이 햇치 부통령의 에스코트를 받아 미국의 주요 명사들과 교류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2022년 1월.
뉴욕 UN 본부,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
전장의 폐허에서 떠오르는 불사조가 그려진 거대한 벽화 아래.
말발굽 모양의 원탁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미국ㆍ중국ㆍ러시아ㆍ영국ㆍ프랑스.
상임이사국 5개국과 각국이 돌아가면서 맡는 10개국의 비상임이사국 대표들이 원탁에 다닥다닥 앉아있었다.
대찬은 그 원탁의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각국 대표는 그 뒤로 보좌진을 거느렸지만, 대찬의 뒤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그동안 참석했던 자리와는 무게의 차원이 달랐다.
대찬은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했다.
그는 일반 토의 순서에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각국 대표들의 앞에 놓인 명패에는 나라 이름만 적혀 있었다.
그 간결한 이름만으로 위압감을 풍겼다.
그런데 대찬의 자리 앞에 놓인 명패가 ‘로튼 프룻츠 회장’이어서야 UN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경영자총연맹 부회장이라고 적힌 명패가 대신 놓였다.
그 직함이 좀 더 공식적이고 공익적으로 보이는 효과가 있는 까닭이었다.
대찬은 돌출발언을 자제하라는 미국 측의 요구를 수용, 준비한 원고를 읽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 경영자총연맹 부회장이자 로튼 프룻츠의 CEO인 조대찬입니다.”
원고에는 ‘로튼 프룻츠의 CEO’라는 부분이 없기는 했지만,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의 공짜 홍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미리 원고를 입수해서 대찬의 목소리를 따라 읽어 내려가던 미국의 UN대사는 대찬에게 찌릿 눈총을 쐈다.
잔머리 굴리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대찬은 외면했다.
“일개 기업인인 제가 안보리에서의 발언 기회를 부여받은 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지 않은 책임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원탁에 앉은 각국 대표들은 대찬의 입을 주시했다.
방청석에 자리한 기자들 역시 대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제가 가진 어떤 자산도 희생시키지 않을 겁니다. 도리어 제 이익을 위해 행동할 겁니다.”
UN 창설 이래, 몇몇 정신이상자에 가까운 괴짜들이 공식 석상에서 헛소리를 지껄이긴 했다.
그렇지만 저렇듯 당당하게 이기적인 발언을 주워섬기는 건 처음이었다.
방청석의 언론인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저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어떤 국가도, 단체도, 개인도 희생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구도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부담을 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건 일시적인 미봉책은 될 수 있어도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대찬은 원고를 내려놓고 정면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북한에 저희 회사에서 생산하는 비도축육을 유통시킬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북한과 가까운 남한의 도시에 설비를 구축할 겁니다. 제도적인 조치가 완비되면 북한의 노동자들이 우리 설비에서 일하고, 일한 만큼의 대가를 취할 겁니다. 북한 주민들의 식량난은 상당 부분 개선될 것입니다. 북한 정권은 이에 호응하여 일부 핵시설을 불능화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대찬은 각국 대표들과 차례차례 눈을 맞췄다.
“남북관계의 정치적 긴장이 다소 완화될 것입니다. 국제사회는 일시적인 면제조치만 결단하면 될 뿐, 제재를 전면 해제하는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됩니다. 개선되지 않는다면 로튼 프룻츠에 허락한 일시적 면제조치를 취소하면 됩니다.”
대찬에게 허락된 시간에는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물론 이건 작은 비즈니스일 뿐입니다. 이 비즈니스 한 번으로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대를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저와 제 회사를 위한 비즈니스이고, 남북의 시민들을 위한 비즈니스이고, 노동자를 위한 비즈니스이고, 국제사회를 위한 비즈니스입니다. Business for the globe, 지구를 위한 비즈니스입니다.”
대찬은 힘주어 말하며 잠깐 정면을 바라봤다.
찰칵.
그 모습을 한 언론의 사진기자가 순간을 포착해 대찬의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제법 비싼 값에 미국의 시사주간지, TIME에 판매되었다.
TIME은 그 주 표지 인물로 조대찬을 선정했다.
불사조 벽화를 배경으로 한 대찬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혔다.
그리고 하단에는 그를 설명하는 문구.
‘Business for the Globe.’
안보리 산하의 대북제재위원회는 로튼 프룻츠의 대북교역에 대해 일시적인 면제조치를 승인했다.
미국 역시, 로튼 프룻츠를 한시적으로 자체 대북제재에서 예외로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로튼 프룻츠는 파주에 부지를 사들여 바로 비도축육 2.0을 생산하는 설비를 짓기 시작했다.
개성공단의 문제점은 남북관계가 틀어지면 바로 가동이 중단된다는 것이었다.
전 재산을 쏟아부어 애써 지어놓은 설비가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꼴을 대찬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설비 가동의 키를 쥐고 있는 쪽은 대찬이었다.
게다가 대북 교역이 중단되면 남는 재고를 국내 시장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따라서 로튼 프룻츠가 실질적으로 짊어져야 할 부담은 안보리에서 공언한 대로 제로였다.
파주의 설비가 완공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예정이었다.
그 탓에 흥읍 본사에 위치한 설비에서 대북 교역 물량을 추가로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국내시장은 수요가 안정됨에 따라 대북 교역 물량을 소화할 여력이 충분했다.
북한은 영변의 핵시설을 불능화하는 조치를 개시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북핵 문제 주요 당사국 사이에서 실무회담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제 북핵에 관한 문제는 대찬의 손을 떠나 정치가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대찬의 몫은 대북제재의 빗장이 열려있는 한, 제값을 받고 비도축육을 북한에 팔아치우는 것뿐이었다.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 조치로 한동안 빗장이 닫힐 일은 없었다.
흥읍에서 생산된 2천 톤의 비도축육이 휴전선을 지나 북으로 향했다.
대찬은 그 물량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
윤이영이 자기도 북한에 가보고 싶다며 성화를 내는 통에, 그녀 역시 대찬과 나란히 휴전선을 넘었다.
극동일보의 전길재는 오랜만에 필드로 나가겠다며 대찬의 전담 취재기자를 자처했다.
더불어 국회의원인 최재한 역시 이 2천 톤의 비도축육과 더불어 정부의 특사 자격으로 대통령의 친서를 지참하고 동행했다.
대찬이 비도축육 2천 톤을 이끌고 북으로 향한 그날.
‘소떼방북 이후 24년, 쇠고기 2천t 北으로’
전길재는 극동일보 1면에 무수히 이어지는 트럭의 행렬을 실었다.
전길재는 대찬, 윤이영과 같은 차량에 올라타 평양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네?”
“북한에 쌀 퍼다 주면 그 쌀이 주민들한테 갈 거 같냐. 군인들한테 간다. 아니면 쌀 팔아서 군자금으로 쓴다.”
“네, 많이 들었죠. 실제로 그럴 수도 있고.”
“비도축육을 저쪽에 공급해주는 것도 비슷한 비판을 듣지 않을까요.”
대찬은 전길재를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