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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48화 (548/556)

난 할 수 있어 548화

그런 대찬을 아는 얼굴이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러위청 중앙외사위 판공실부주임.

“참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조대찬 회장님.”

“얼떨결에 큰일을 치렀습니다. 제 생애 가장 긴 5시간이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폴리스라인 바로 바깥에 로튼 프룻츠 직원들이 잔뜩 나와 있던데.”

“네, 그럴 겁니다.”

“덕분에 외신들이 떨어진 사탕에 개미 붙듯 달라붙어 있습니다. 의도하신 거지요. 짓궂으십니다.”

“직원들의 충심이 그만큼 깊은 것으로 하시죠.”

“외신 인터뷰, 낱낱이 다 말할 생각은 아니시겠죠.”

“부부장님과 저의 ‘낱낱이’의 의미에 따라 다를 겁니다.”

“조 회장님은 지금 분수 이상의 소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분수 이상의 소임이라. 제 분수가 어떤데요.”

“조 회장님과 말장난할 생각 없습니다.”

“제 말씀이 장난으로 들리셨다니. 부부장님의 말씀이야말로 말장난이었기를 바랍니다.”

대찬은 그대로 러위청 부부장을 스쳐 지나갔다.

러위청은 뒤를 돌아 뚜벅뚜벅 멀어져가는 대찬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아랫것들에게 명령했다.

“조대찬한테 따라붙어. 허튼소리 지껄이면 바로 기자들 곁에서 떼어내. 알았나?”

“알겠습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대찬의 뒤를 쫓았다.

완벽히 통제된 폴리스라인.

그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김정은과 그를 마중 나온 중국의 정치국 상무위원은 같은 리무진을 탔다.

그리고 수십 대의 사이드카.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면서 폴리스라인 안쪽의 텅 빈 도로를 질주했다.

그 폴리스라인을 걸어서 넘어온 건, 대찬이 유일했다.

선양에서 베이징으로 열차가 부단히 달리던 그 무렵.

한태윤 대표는 정덕춘 본부장에게 랴오닝성 서기를 상대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녀만 남겨놓고, 한태윤 대표는 45인승 버스를 곧바로 대절했다.

정상적인 속도라면 7시간이 걸릴 거리였다.

5시간이 걸리는 열차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대표님, 저한테 맡기세요.”

“마강국 씨.”

마강국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오늘을 위해 조대찬이 저를 그렇게 똥개훈련을 시켰나 봅니다.”

마강국은 핏줄이 불룩불룩 솟은 팔로 버스의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밟아 열차와 비슷한 속도로 선양에서 베이징까지 도착했다.

그 광란의 질주 속에서 직원들은 두 손을 꼭 모으고 평소 찾지도 않던 주님을 애타게 찾았다.

버스에서 우르르 내린 그들은 외신들이 보기에 퍽 이질적이었다.

말끔한 정장을 죄다 갖춰 입고 잘 훈련된 군대처럼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었으니.

옥문영 대표는 사단장이라도 된 것처럼 대열이 흐트러지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의 삼엄한 호령 속에 대찬이 나올 때까지 대열을 유지했다.

폴리스라인 안쪽이 워낙 보안이 심해 취잿거리를 찾지 못한 외신들이 그쪽을 기웃거렸다.

미국, 일본, 러시아 등등 국적들도 다양했다.

당신들은 뭐 하는 사람이냐.

왜 여기에 나와서 줄을 서고 있는 거냐.

쏟아지는 질문에 그들은 일언반구 대답하지 않았다.

폴리스라인을 빠져나온 대찬은 그들을 바로 발견했다.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복장만 군복으로 갈아입히면 당장 전장으로 나가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었다.

대찬은 웃으며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외신들은 대찬을 알아보았다.

로튼 프룻츠는 한국 국내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기업이 아니고, 세계적으로 보면 혁신적인 기업이기는 해도 아직 덩치 자체는 갈 길이 먼 상황이었다.

그러나 회사의 덩치에 비해 대찬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편이었다.

선대의 자산을 물려받는 것이 대개인 한국의 대기업들 중에 흔치 않은 자수성가형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자수성가형 기업인들은 이과 출신 인재들이 많은데, 대찬은 경영학과를 나와 유능한 기술자를 거느리고 성공했다는 점에서 자수성가형 중에서도 이질적이었다.

또한 로튼 프룻츠가 규모에 비해 세계 여러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었으니.

웬만한 외신이라면 대찬의 기사 하나쯤은 써본 경험이 있었다.

대찬은 옥문영 대표 이하 도열해있는 직원들을 보고 웃었다.

“안 추우세요?”

“추워요. 근데 회장님이 이러고 있으라면서요.”

옥문영 대표는 연기에는 소질이 영 없었다.

대찬은 민망하게 웃으며 코를 훌쩍이곤 직원들에게 말했다.

“밤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기차보다 늦게 도착하면 어떡하나 걱정을 좀 했는데. 아마 마강국이 수고했겠죠?”

“두말하면 입 아픕니다.”

마강국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수상한 양복집단과 대찬이 한패라는 사실을 발견한 외신들은 더욱 궁금증이 동했다.

묵묵부답, 요지부동이었던 양복들과는 달리 언론과의 스킨십에 능숙한 대찬에게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조대찬 회장님, 지금 베이징역에서 나오신 겁니까?”

“네, 맞습니다.”

대찬이 긍정하자 외신들은 더욱 들떴다.

북한과 중국이 정상회담을 하는데 웬 한국 기업인이 끼어들었으니.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건 기삿거리가 됐다.

안 그래도 활활 타는 그들의 열의에 대찬이 기름을 부었다.

“저는 열차에 김정은 위원장과 동석했습니다.”

“뭐라고요? 김 위원장과 함께 계셨단 말씀입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양에서 베이징까지 동행했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대찬의 뒤를 밟은 중국 측 인사들이 그를 외신 기자들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쪽수라면 이쪽도 뒤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로튼 프룻츠가 자랑하는 맹장이 있었다.

관우와 장비에 버금가는, 마강국과 옥문영.

그들은 대찬을 가로막으려는 인간들 앞에 통곡의 벽처럼 우뚝 섰다.

“니하오, 셰셰.”

할 줄 아는 중국어라고는 그 두 개가 전부인 마강국과 옥문영은 틈을 파고들려는 중국 사람들을 반대로 밀쳤다.

“니하오, 셰셰.”

“니하오, 셰셰.”

그들은 고장 난 로봇처럼 니하오, 셰셰만 연신 중얼거리며 그들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거칠게 욕을 하며 항의했지만 무슨 말인지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니하오, 셰셰.”

그러는 사이 대찬은 여유롭게 외신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 위원장이 조 회장님과 동행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특별한 논의가 이뤄졌습니까?”

“김정은 위원장은 로튼 프룻츠의 비도축육 설비를 통해 북한의 식량 상황을 개선할 의지를 보였습니다.”

“조 회장님의 뜻은 어떻습니까.”

“김정은 위원장은 저한테 선제적으로 파주에 비도축육 시설을 구축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파주요? 개성공단이 아니고요?”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파주. 저는 정치적 상황이 마련되면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개성이 아니라 남한의 파주가 맞습니까?”

“네, 휴전선 아래의 파주.”

“오 마이 갓.”

외신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이거 엠바고(embargoㆍ한시적 보도유예) 아니죠?”

“제가 엠바고 내린다고 기자님들이 들으시기나 하겠어요?”

“물론 아닙니다.”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 밑그림만 그려진 상태입니다. 자세한 논의는 차후 이뤄져야겠죠.”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북한은 대화를 통해 제재국면을 돌파할 의지를 갖고 있고 그 시작이 파주의 비도축육 시설이 될 것이란 점입니다.”

“조 회장님은 그 입장을 지지하십니까.”

“저는 로튼 프룻츠의 경영자로서 로튼 프룻츠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는 모든 사업을 지지합니다. 물론 제도적 여건과 합법적인 틀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불법의 가능성이 완전히 제거되기 전까지 사업을 개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한국을 포함한 각국 정부와 사전에 조율된 사안입니까?”

“이해당사국의 협조가 없었다면 제가 이 자리에서 함부로 떠들기는 어려웠겠죠. 단, 당사국 간의 본격적인 대화는 열리지 않은 만큼 모든 상황을 낙관하지는 않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대찬의 입을 어떻게든 틀어막고 싶었다.

북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대찬이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마강국과 옥문영을 위시한 로튼 프룻츠 직원들의 인해전술 때문에, 인해전술로 정평이 난 중국 사람들이 완전히 원천봉쇄 당해버렸다.

대찬은 민감한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정말 용납 못 할 정도로 날뛰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으니까.

파주의 신축 설비를 제안한 것도 대찬이 아니라 김정은 쪽이라고 공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대찬은 존재감을 분명히 각인시킬 필요는 느꼈다.

언론의 충분한 관심을 끌기 위해 적지 않은 정보를 한 번에 털어놨다.

이건 자기들 멋대로 대찬을 이 난장판에 끌어들인 데 대한 나름의 복수이기도 했다.

대찬의 깜짝 등장은 주요 내외신들의 톱기사로 다뤄졌다.

두 공산주의자 사이의 한 자본가 –미국 뉴욕타임즈

베이징까지 5시간, 특별열차 안에서는 무슨 일이? -러시아 트루드

‘새하얗게 불태운’ 한국의 조, 대화국면에서 큰 역할 했나 –일본 요미우리

최소한의 예의마저 잊은 ‘스포일러’ 조대찬, 로튼 프룻츠 불매운동으로 응징하자 –중국 환구시보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께서 북경으로 가는 렬차에 남조선 자본가를 탑승시키시어 력사적 사변의 시작을 주도하시였다 –북한 로동신문

조대찬 명예영사, 북한을 ‘제2의 아이티’로 만들 큰 뜻 펼칠 듯 –아이티 루프뉴스

‘형이 거기서 왜 나와?’ 조대찬 회장, 김정은 열차에 깜짝 탑승 –극동일보

민간 차원의 자유로운 교류와 무역을 지지하며 이를 위해 국제사회가 열린 자세로 대화에 나서야 한다.

북한과 중국의 정상이 도출해낸 결론은 구체적이지 않고 다분히 선언적이었다.

그건 대찬이 외신을 통해 알린 구체적 사실에 비하자면 밋밋하고 심심했다.

그 탓에 언론은 북중 정상회담의 결론보다는 오히려 대찬의 말에 주목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기업의 자유로운 이익활동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하여 로튼 프룻츠와 북한 당국의 대화와 교류를 지지하며, 대한민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대찬의 발표와 북중 정상회담의 결과가 나오자마자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반응 역시 다르지 않았다.

“민간 차원의 교류를 통해 북한 비핵화의 첫발을 내딛는 시도를 높게 평가합니다. 다만, 북한이 이번 일을 계기로 비핵화에 대한 아무런 조치 없이 시장개방의 달콤한 과실을 따 먹으려 한다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썩은 과일들(로튼 프룻츠)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소 까칠한 성명과는 달리, 물밑에서 열심히 북한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집권 2년 차를 맞이하는 시기.

재선을 위한 치적을 쌓아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임 트럼프 행정부와는 다른 접근법으로 북한 문제를 개선시켰다는 치적을 쌓고자 했다.

게다가 실패의 부담도 적었다.

로튼 프룻츠라는 회사가 총대를 메고 시작한 일이다.

실패해도 민간의 기대에 정치가 부응하지 못했다는 제3자로서의 입장만 발표하면 그만이었다.

협상 당사자가 아니라 제3자의 입장을 유지하면 협상에도 유리했다.

로튼 프룻츠와 북한의 협상에서 미국이 중재자의 위치를 꿰차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은근히 협상을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끌어올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 정부의 행보는 다분히 간접적이었다.

그 와중에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으려 했다.

북한은 협상의 당사자로서,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후원자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은 로튼 프룻츠를 내세워 장막 뒤에서 협상을 주도하고자 했다.

저마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흘끗흘끗 곁눈질로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 협상에서 수면 위에 드러나 있는 당사자는 대찬과 김정은이었다.

그런데 김정은은 은둔의 독재자.

운신의 폭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본의 아니게 대찬에게 포커스가 맞춰졌다.

대찬은 비즈니스를 명목으로 이 나라 저 나라를 들쑤시고 다니며 졸지에 협상을 진두지휘하는 선봉장이 되어버렸다.

미국의 부통령, 마이크 햇치도 이런 상황이 우스웠다.

그는 핵심 측근인 유진 깁슨 하원의원과 마주 앉아 웃었다.

“조대찬 그놈은 한 시도 쉬지 못할 운명을 타고났나 보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도 좀 덕을 봐야지?”

“예? 덕이라면…….”

“워싱턴으로 좀 오라고 해. 나랑 단독 면담 일정 잡아놔. 일정 잡히면 기자들한테도 알리고.”

“아, 알겠습니다.”

유진 깁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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