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47화
도대체 뭘 믿고!
“회장 선생, 죽고 싶소?”
“죽이게요?”
“이 열차는 내래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오.”
“잊을 리가요.”
“회장 선생의 목숨을 취하는 데는 총알 한 발이면 충분하오.”
“총알 한 발이요? 과연 그럴까요.”
“…뭐이야?”
김정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기서 날 죽이면 위원장께서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셔야만 합니다.”
“뭐이 어쩌고 어째?”
“터놓고 얘기하죠.”
“지금까지는 터놓고 얘기 안 했네? 이제 와서 내숭 떨지 말라.”
“위원장께서 저 같은 인간과 독대를 나누는 것도 상황이 그만큼 급해진 까닭 아닙니까. 대북제재가 확실히 효험이 있긴 있었다는 뜻이죠.”
“…뚫린 아가리라고 막 지껄이는구만.”
김정은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대찬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싶었지만 이 인간이 정말 이성을 잃고 자기를 기차 바깥으로 던져버릴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못했다.
그러나 기세에서 밀리면 정말 모든 게 끝장이었다.
미친놈과 담판을 지으려면 이쪽도 반쯤 미치는 수밖에 없었다.
이 협상에는 절충안이 없다.
저쪽의 뜻대로 하든지 이쪽의 뜻대로 하든지 둘 중 하나다.
그럼 깍듯이 예의를 차려 좋게 좋게 가서는 안 된다.
북한과 어떤 거래도 없던 일이 돼도 로튼 프룻츠의 이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남북관계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도 마찬가지였다.
개성에 설비를 구축해 저쪽이 마음대로 뗐다 붙였다 하는 산소 호흡기를 달아줄 필요가 없었다.
“절 여기서 죽이면 모든 대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겁니다. 한국도, 중국도, 러시아도 감히 위원장을 지지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전대미문의 강력한 제재가 이뤄질 겁니다.”
“내래 주변 열강들의 으르렁거림에 눈썹이나 깜짝할 거 같네?”
“그건 모르죠. 전 이미 죽고 난 후일 테니까. 근데 당장의 화풀이치고는 꽤 심각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윗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경애심도 없는 작자구만.”
“북한 인민들에게나 경애하는 최고령도자이지, 저한테는 아니니까요. 위원장은 제 수많은 비즈니스 파트너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김정은은 대찬과의 대화를 포기했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들어오라!”
그의 명령에 보위부 요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김정은은 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 반동분자다. 당장 내 앞에서 치우라.”
“죽일까요.”
김정은은 차마 죽이라는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열차 저 뒷칸에다 처박아놓으라. 처분은 차후 내릴 테니.”
“알겠습니다, 위원장 동지.”
그들은 대찬을 거칠게 끌고 갔다.
대찬은 묵묵히 그들의 손길에 이끌렸다.
눈이 가려지고, 손은 등 뒤로 꺾여 결박되었다.
어둠 속에서 끌려간 대찬은 열차 맨 뒤에 처박아졌다.
쾅, 거칠게 문이 닫혔다.
“…….”
대찬은 가만히 앉아있었다.
김정은이 자신을 죽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죽일 거면 분노가 절정에 달한 지금 죽였을 것이다.
지금 단순히 자기를 눈앞에서 치워버렸다는 건 최소한의 상황파악은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찬은 그저 그런 자본가가 아니었다.
김정은은 자신이 많은 기업들 중에 굳이 로튼 프룻츠를 지명한 만큼, 대찬의 특별한 위상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술 가져오라.”
김정은은 자신이 비벼 끈 꽁초 옆에 마찬가지로 비벼진 대찬의 꽁초를 보고 입술을 악물었다.
“건방진 아새끼…….”
그는 앉은 자리에서 양주 한 병을 온전히 비워버렸다.
열차는 묵묵히 달렸다.
만리장성의 시작인 샨하이관을 지나.
진시황이 군대를 이끌고 머물렀다는 친황다오를 지나.
중국 지도부의 중대결단이 내려지는 베이다이허를 지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갔다.
궤도 위의 열차가 덜컹거림에 따라 대찬의 몸도 좌우로 흔들렸다.
‘아, 팔 저려.’
대찬은 결박 때문에 피가 안 통해 하얗게 질린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제 베이징까지는 한 시간여가 남았다.
김정은은 로튼 프룻츠가 개성공단에 설비를 구축해줄 것이라 믿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자기가 직접 열차로 모시는 파격적인 대우를 보였다.
게다가 일면식도 없는 아이티를 위해 퍼주다시피 하는 그들이 아닌가.
같은 민족을 위해서는 더 극진하리라 확신했다.
자신들에게 유화적인 한국 정부 역시 이를 도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도대체가 일이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고집불통도 이런 고집불통이 없다.
예의는 밥 말아 먹었는지 찜 쪄 먹었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뭐이 어드레? 파주에 공장을 지어? 간사한 자본주의 반동분자 같으니…….”
그에게 대북제재 완화, 장기적으로 제재 해제는 간절했다.
더 버티기 어려웠다.
그러나 제재를 주도하는 미국은 꿈쩍도 안 하고, 슬슬 레임덕이 오는 남한 정부도 생각보다 시큰둥했다.
그렇다고 북한이 먼저 나서서 노골적으로 대화를 구걸하기에는 모양이 빠진다.
게다가 열세인 상태로 제재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다.
체면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불이익이 컸다.
그래서 로튼 프룻츠 카드를 만지작거린 것이었다.
남북화해협력을 위해 민간차원에서 물꼬를 트면 크게 체면을 상하지 않고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경제협력을 의제로 올리면 자연히 대북제재 완화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것이었다.
당장 제재가 전격적으로 완화되지 않고 일단 로튼 프룻츠만 제재 면제 승인을 받아도 괜찮았다.
식량만 안정적으로 공급하면 제재 가운데서도 일단 살길은 찾을 수 있으니까.
비도축육 설비를 유치하는 것으로 고공행진을 하는 아이티 대통령의 행복과 비슷한 정도의 만족을 자신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고작 일개 회사부터가 자신의 웅대한 계획에 초장부터 초를 치고 나선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대찬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고사포를 갈겨 만 갈래로 터트려 죽이고 싶었다.
씩씩 분을 삭이는데, 열차에 동승한 김형준 조선로동당 국제부장이 다가왔다.
“위원장 동지, 조금 있으면 북경에 도착합니다.”
“알고 이서.”
“저 남조선 반동의 처분을 슬슬 결정하셔야 합니다, 위원장 동지.”
“알고 이서!”
김형준 부장은 살짝 위축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김정은은 이마를 꾹꾹 누르며 한동안 고심했다.
졸지에 자신이 제시한 의제가 아니라 대찬이 제시한 의제를 중심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파주에 설비를 세울 것이냐, 안 세울 것이냐.
파주에 살림고기 설비가 들어서고 여기서 생산된 제품이 북한에 공급된다면.
일개 기업에 불과한 로튼 프룻츠가 북한 정권에 ‘지분’을 가지게 된다.
이건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같은 외화벌이 사업과는 궤도 자체가 달랐다.
아이티는 로튼 프룻츠 설비를 유치해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반대로 국가운영의 많은 부분을 그쪽에 넘겨줘야만 했다.
그걸 생각하면 대찬의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내고 협상을 무위로 돌리는 게 옳았다.
하지만 김정은은 쉽게 그러겠노라 선언하지 못했다.
그 반대편에 걸린 이익이 적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리고 이 판을 깨면서 돌아오는 불이익도 적지 않았다.
김정은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면서 고민에 빠졌다.
눈치 없는 김형준 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위원장 동지……. 북경까지 20분 남았습니다.”
“내래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아서! 동무, 자꾸 재촉하지 말라!”
“죄, 죄송합니다!”
“당장 그 반동분자 내 앞에 갖다놓으라.”
“알았습니다!”
김형준 부장은 바로 특실 밖으로 나가 대찬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손이 하얗게 질린 대찬이 다시 특실 안으로 불려왔다.
김정은은 눈이 가려지고 손이 결박된 대찬을 보고 쯧, 혀를 찼다.
“풀으라.”
“옛, 위원장 동지.”
결박이 풀리고 시야가 환해졌다.
한참 막혔던 피가 돌기 시작하니 팔이 저릿저릿했다.
김정은은 담배를 물며 대찬에게 눈짓을 했다.
“앉으시오, 회장 선생.”
다시 호칭은 반동분자에서 회장 선생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찬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김정은은 대찬을 흘끗 바라보곤 말했다.
“이제 좀 고분고분해지셨소?”
“네.”
대답하는 목소리가 전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김정은의 얼굴에 다시 주름이 졌다.
“잠깐 사이 회동으로 막중한 결단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오. 기럼 이렇게 합시다.”
“말씀하십시오.”
“파주에 지을지 개성에 지을지는 차후 론의를 더 해봅시다.”
“…….”
“일단 민간 차원에서의 경제협력에 대하여 로튼 프룻츠가 선봉의 기수래 되는 것만 이 자리에서 결정하는 걸로 합시다.”
“그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정은은 대찬에게 아예 질려버렸다.
이제는 화도 안 났다.
“선생, 내 인내심을 더 시험하지 마시디요. 나는 태어나서 최대한의 인내심을 선생께 허락하고 있단 말이오.”
“이 열차는 북경으로 향하고 있잖습니까.”
“그렇소.”
“저도 행선지가 북경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기래서.”
“제가 이번 선양 방문에 무지막지한 규모의 직원들을 동원했습니다.”
“기래서.”
김정은의 목소리에 더 짜증이 번졌다.
“지금 북경역에는 통제가 심할 텐데, 그 통제선 바로 앞에서 저희 직원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위원장께서 무수한 사람들을 거느린 것만 못하지만 저도 일단 큰 집단의 수장이니 말입니다.”
“…….”
“제가 북경역에 내려서 그들과 합류하면 외신들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답을 아이하면 될 일이오.”
“노코멘트야말로 가장 위험한 선택지지요. 온갖 낭설이 난무할 텐데 그편이 위원장께 이롭지는 않을 겁니다.”
“기럼 어쩌겠다는 거요.”
“저는 오늘 위원장과의 만남에서 얻은 결론을 말해야만 합니다. 불확실성은 정치든 경제든 가장 기피해야 할 1순위니까요. 그럼 어떤 결론을 말할 것인가. 그건 위원장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나더러 즉답을 내놓으라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 아니라 그편이 제게도, 위원장께도 이롭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회장 선생은 욕심이 많구만 기래. 애인하고 사귀자마자 잠자리까지 가는 부류인가 보오. 내래 즉답을 내놓지 않갔소.”
“그럼 대북 사업을 진중히 의논했으나 결렬됐다고 하겠습니다.”
“경고하갔소. 그만 협박하오.”
“위원장처럼 귀한 분을 언제 어디서 또 뵙겠습니까. 저도 바쁜 사람이고요.”
“기런데.”
“기회는 다시 잡기 힘들 겁니다. 수장끼리의 만남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면 실무자급 논의에서 어떻게 오늘만큼의 진전을 이뤄내겠습니까?”
“기어코 지금 대답을 듣갔다?”
“네.”
틈바구니에 낀 김형준 국제부장은 말을 보태지도, 침묵하지도 못해 우물거리기만 했다.
그런 그를 향해 김정은이 말했다.
“동무, 시간 얼마 남아서.”
“이제 겨우 10분 남짓입니다, 위원장 동지.”
“기차 멈추라.”
“예?”
“기차 멈추라 해서! 중국 쪽에도 알리라. 말미를 좀 허락하라고.”
“알겠습니다, 위원장 동지.”
김형준 부장은 허겁지겁 특실을 나가 중국 측에 연락을 하러 갔다.
김정은은 대찬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회장 선생도 잠깐 나가있으오. 기쪽이랑 같이 있으문 여우한테 홀리는 것 같아. 곧 대답을 줄 테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찬은 군말 없이 일어나 특실 밖으로 나갔다.
김정은은 바로 담배를 물었다.
베이징 문턱까지 다다른 기차는 철로 위에 멈춰 섰다.
김정은의 고민은 20분간 지속되었다.
그 사이 담배 다섯 대를 태웠다.
열차는 베이징역에 멈췄다.
중국 최고 지도부인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한 명이 김정은을 맞이하기 위해 베이징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김정은은 열차에서 내리며 반갑게 그와 악수를 나눴다.
북한 사람도, 중국 사람도 아닌 대찬은 그 틈바구니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는 김정은의 뒤이어 내리는 수행원들에 섞여 열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