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46화
기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랴오닝성 서기는 혹시 북한의 지도자가 나와서 자신과 만날까 봐 긴장한 표정으로 기립을 유지했다.
하지만 기차 밖으로 나온 것은 지도자의 의전비서관 하나뿐이었다.
그는 랴오닝성 서기에게는 꾸벅 잠깐 인사만 하고, 서 있는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대찬 회장 선생, 기차 타고 북경까지 가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죠.”
예상하고 있었던 일.
대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열차에 올랐다.
그는 열차에 올라서며 랴오닝성 서기에게 말했다.
“이후 일정에 대한 모든 권한은 우리 회사 한태윤 대표에게 일임했습니다. 차후에는 그분과 논의하시면 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대찬은 플랫폼을 디디던 나머지 한 발도 열차 위에 올려놓았다.
그를 태우자마자 열차는 지체 없이 떠났다.
선양에서 베이징까지는 5시간이 소요될 예정이었다.
열차에 올라타자마자 깐깐한 몸수색이 이뤄졌다.
제복을 입은 군인 몇몇이 대찬에게 달려들어 이곳저곳을 뒤졌다.
“거긴 좀 민감한 부윈데.”
대찬은 제 딴에 분위기 좀 가볍게 하려고 농담을 던졌지만, 제복들의 표정은 계속 뻣뻣했다.
대찬만 머쓱하게 되었다.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수색을 받았다.
수색이 끝나자 북한 지도자의 의전비서관이 대찬에게 다가와 말했다.
“조대찬 회장 선생, 내래 몇 가지 당부 좀 드리려고 하오만.”
“당부요.”
비서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조선 사람들 중에 공화국 최고존엄과 독대를 나눈 사람은 대통령과 조 선생 둘뿐이라요.”
“아, 그렇게 되나요.”
“물론 조대찬 선생은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겠지만, 공화국 최고존엄에 대한 충분한 예의를 갖춰주길 바랍니다.”
늙은 비서관은 대찬에게 여러 번 같은 내용을 일러주었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말 것, 시종 공손한 태도를 유지할 것, 악수를 제외한 신체접촉은 일절 금할 것 등등.
그는 유치원생을 가르치듯 천천히 여러 번 설명했다.
대찬은 웃으며 대꾸했다.
“잘 알아들었으니 그쯤 하시죠. 제가 알고 있는 상식선의 예의를 지킬 테니 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회장 선생.”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비서관은 이후에도 똑같은 내용을 두 번 더 말하고는, 열차 특실의 문을 열었다.
특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담배 냄새가 대찬의 코를 찔렀다.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대찬은 콜록, 약한 기침을 하고 앞을 바라봤다.
앞에는 검은 인민복 차림의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늙은 비서관이 다가가 젊은 위원장에게 공손히 말했다.
“위원장 동지, 조대찬 회장이 왔습니다.”
그러자 김정은은 치이익, 재떨이에 피다 만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대찬의 정면으로 몸을 틀었다.
그간 대찬이 만난 거물급 인사는 한둘이 아니었다.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의 부통령과 긴밀한 사이였고 중국 국가주석도 가까이에서 봤으니 북한의 국무위원장이야 유별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대찬은 다른 누구보다도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그가 제일 신기했다.
은둔의 독재자가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쌕쌕 숨을 쉬고 있다.
‘별일 다 있다, 진짜.’
대찬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김정은은 대찬에게 살짝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조대찬 회장 선생,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김정은이요.”
“로튼 프룻츠 조대찬입니다.”
대찬은 한 손으로 김정은의 손을 맞잡았다.
‘두 손으로 하라니까!’
늙은 의전비서관은 아찔했다.
김정은은 피식 웃으며 대찬의 손을 두 번 흔들고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오.”
“네, 그럼.”
대찬은 김정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눈 마주치지 말라니까!’
의전비서관은 자신의 수명이 실시간으로 1년씩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회장 선생은 담배 좀 태우시오?”
“요즘 잘 안 피우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피웁니다.”
김정은은 픽 웃었다.
“기카믄 지금 한 대 태우셔야갔구만. 오늘 만남이 내키지 않았을 테니 말이오.”
“아니라고는 안 하겠습니다.”
“흐허허, 배포 한번 두둑하오.”
‘저 간나 새끼!’
의전비서관은 혼절할 지경이었다.
김정은은 직접 두꺼운 손가락으로 담배 한 개비를 골라 대찬에게 내밀었다.
“태우시오.”
“그럼 사양 않겠습니다.”
의전비서관은 대찬이 이제는 김정은에게 불까지 붙여달라고 할까 봐 황급히 대찬에게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대찬과 김정은은 마주 앉아 맞담배를 피웠다.
의전비서관은 달달 떨며 대찬에게 말했다.
“회장 선생, 연기는 모쪼록 고개를 돌리고…….”
그러자 김정은은 손을 내저었다.
“아, 됐소. 담배는 편히 피워야 맛이지.”
“아, 알았습니다…….”
“동무는 그만 나가오. 편히 얘기하고 싶으니.”
“보위부 요원들은…….”
김정은은 말없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나가라는 뜻.
의전비서관과 보위부 요원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며 특실 바깥으로 나갔다.
이제 열차 특실 안에는 대찬과 김정은만이 있었다.
김정은은 한 호흡에 담배를 한참 태우곤 대찬에게 말했다.
“일단 사과드리오. 꾸바에서는 미련한 동무들이 결례를 저질렀단 말이오.”
“직접 사과하시니 받아들이겠습니다.”
“동무래 니네 수령 나오라, 기케 말했다고 들었소. 그래서 내래 직접 회장 선생을 부른 것이오.”
“감정이 격해져 그런 것이니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오. 그런 중요한 문제를 론의하려면 수령이 직접 나서는 게 맞디요. 괜히 아랫것들 부리다가 사달이 났잖소.”
대찬은 묵묵히 담배를 태우며 김정은의 말을 들었다.
열차 안은 숫제 너구리굴이었다.
“내가 지금 북경에서 습근평(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는 것으로 하여 동북아세아의 정세가 크게 달라질 것이오.”
“모쪼록 평화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기를 기대합니다.”
“회장 선생이 도와준다면 영 불가능한 것도 아니오.”
대찬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비며 김정은에게 말했다.
“솔직히 얼떨떨했습니다. 세상에 회사가 한둘이 아닌데 하필 우리 회사가 도마 위에 올랐으니까요.”
“고거이 우연이 아니오. 로튼 프룻츠는 지구에서 유일하게 살림고기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오.”
대찬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살림고기요?”
“아, 기쪽에서는 비도축육이라고 부른다고 했디요. 우리는 살림고기로 부르기로 하였소. 죽이지 않으니까니 살리는 것 아니오. 기래서 살림고기라 한단 말이오.”
“그쪽이 듣기 더 편하긴 하군요.”
김정은은 호탕하게 웃었다.
“아예 낱말을 바꿔치기하는 것도 한번 고려해보오.”
“그러죠.”
열차는 덜컹거리며 베이징을 향해 부단히 움직였다.
김정은은 대찬을 만나고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지간히도 골초다.
그는 훅, 연기를 뱉고는 대찬에게 말했다.
“회장 선생이 남조선에서 안 태어나고 우리 공화국에서 태어났으문 핵심일군으로 공화국 경제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오. 참 아까운 일이란 말이오.”
대찬은 난감하게 웃으면서도 할 말은 했다.
“글쎄요. 아마 아니었을 겁니다.”
김정은은 대찬을 흘끗 바라보았다.
‘조선말’을 구사하는 인간들 중에 자신한테 이렇게 삐딱하게 구는 인간은 대찬이 처음이었다.
순간 짜증이 난 듯했지만 일단 그도 분을 삭이는 모양새였다.
그는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깍지를 꼈다.
“나는 몇 해 전 미국에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으나, 다시 한 번 국제사회와 왕래하기로 결단하였소.”
“바람직한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장 선생도 이미 들었겠디마는 이 어려운 문제를 단칼에 풀 생각은 아니란 말이오.”
“민간 차원에서 시작하여 차근차근 풀어나가시겠다고…….”
김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회장 선생과 그 시작을 열려고 하오.”
“어떻게 말입니까.”
“개성공단에 살림고기 설비를 구축하문, 우리도 회장 선생이 결단을 내린 데 대하여 일단의 핵무기 시설을 해체하는 것으로 상응할 것이오. 그러니까 우리 공화국을 향한 제재를 국제련합과 미국이 일부 해제를 하문, 우리가 핵시설 일부 해체로 화답하겠다 이 말이오.”
김정은은 그것이 제 딴에는 과감한 결단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찬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그건 어렵겠습니다.”
“뭐이야?”
면전에서 단칼에 거절당하자 김정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대찬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개성공단의 짧은 역사 동안 몇 차례나 문을 닫았습니다. 제가 뭘 믿고 개성공단에 설비를 구축한단 말입니까?”
“2016년의 폐쇄 결정은 공화국이 아이라 남조선 정부래 내렸다는 것을 회장 선생은 모르오?”
“압니다. 위원장의 핵실험에 의한 결정이지만요.”
“개성공단은 정치적 리해관계에 상관하지 않고 멈춤 없이 유지하자는 것이 북남 사이의 결론이었단 말이오. 남조선 정부가 그걸 뒤집었는데, 그 책임을 나한테 묻는 것이오?”
김정은의 말이 빨라졌다.
“그 책임이 대한민국 정부에 있다고 해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정치에 의해 저희 회사의 이익이 침해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는 민족의 력사에 분명한 족적을 남기는 일인데, 회장 선생은 어째 좁쌀만 한 회사의 리익만 고려한단 말이오?”
“저는 위원장이나 각국의 수장처럼 무거운 책무를 짊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무고한 민간인을 기어코 십자가에 매달아야겠다면, 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겠습니다.”
“참 답답하구만 기래.”
김정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담배를 물었다.
이제 그의 얼굴에 미소는 사라졌다.
대찬 역시 살가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열차 안의 공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민간은 정치의 명령을 받들지 않습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민간을 움직이려면 그에 합당한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기럼 회장 선생이 기탄없이 얘기해보오.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오.”
“북한에 비도축육을 공급하는 건 문제없습니다. 합당한 비용만 받으면 못할 것도 없죠.”
“아이띠 공화국에는 원가에 가깝게 공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소.”
“네, 북한에도 그렇게 할 용의가 있습니다. 남북은 특수한 관계니까. 이역만리 아이티보다 더 극진하게 대우할 수 있습니다.”
“기까지는 말씀이 시원시원하오.”
“하지만 개성공단에 설비를 구축하는 건 안 되겠습니다.”
“기럼 어찌하면 좋가서.”
대찬은 김정은의 열차에 올라타기 전, 측근들과 여러 방법을 논의했다.
최대한의 양보가 가능한 부분, 그리고 최소한 지켜야 할 부분을 정해놓았다.
그렇게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결과.
한 가지 방안에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개성과 접경한 파주 일대에 대북 공급 물량만을 생산하는 설비를 구축하겠습니다.”
“…파주?”
“북한에서는 다리 하나만 건너오면 되는 거립니다.”
“하지만 남조선 땅 아니오.”
“대한민국 땅이어야만 저는 믿고 설비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김정은은 한참 담배를 뻑뻑 피우다가 말했다.
“정히 공화국을 못 믿겠다문 중국은 어떻소. 조중접경지대에 설비를 구축…….”
대찬은 김정은의 말을 끊었다.
“중국도 못 믿습니다. 대한민국.”
“…로씨야도 있소.”
“대한민국.”
“이거 참, 동무는 고집이 너무 심한 거 아니간!”
김정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보위부 요원들이 특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위원장 동지! 일없습니까!”
그들은 일제히 대찬에게 총을 겨눴다.
대찬은 자신을 겨눈 총부리들을 보고서도 태연했다.
잔뜩 열 받은 김정은은 요원들을 향해 거칠게 소리쳤다.
“내래 회장 선생이랑 단둘이 얘기한다고 해서! 감히 여기래 어디라고 박차고 들어오나!”
“죄, 죄송합니다, 위원장 동지!”
김정은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어 보위부 요원들을 쫓아냈다.
그는 대찬을 향해 형형한 눈빛을 쏘았다.
“내래 회장 선생이 품은 시커먼 뜻을 모를 것 같소?”
“시커먼 뜻이라뇨.”
“휴전선 아래 살림고기 설비를 틀어쥐고 공화국에 목줄을 채우려는 심사 아니오.”
“그 말씀 그대로 돌려드리면, 위원장께서는 개성에 남의 돈으로 설비를 지어놓고 제 것처럼 쓰겠다는 시커먼 뜻을 품으신 건 아닌지.”
“회장 선생! 인내심에도 한계란 게 있소!”
“시커먼 뜻을 입에 올린 건 위원장이 먼저이십니다. 제 인내심 또한 무한대는 아닙니다.”
김정은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도대체 이 발칙한 놈은 뭘 믿고 이렇게 뻗대는 거야.
왕처럼 떠받들어지는 데 익숙한 그는 대찬의 툭툭 뱉는 듯한 삐딱한 언사에 당최 적응이 안 됐다.
자기 딴에는 최선의 예우로 대찬을 대하는데, 대찬은 말 한 마디를 안 지고 또박또박 받아치질 않는가.
자기한테 시커먼 뜻 운운한 건 미국 대통령한테도 못 들어본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