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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45화 (545/556)

난 할 수 있어 545화

대찬은 자리를 떠나려다가 뒤를 돌아 러위청을 바라보며 말했다.

“첫째, 대한민국 정부와 철저한 협의 속에 진행할 것.”

“……?”

러위청은 의아한 눈초리로 대찬을 바라봤다.

“둘째, 로튼 프룻츠에 어떠한 불이익도 없어야 할 것. 동시에 이익이 있어야 할 것.”

“조 회장. 지금 그게 무슨…….”

“두 가지 전제가 있다면 그 거대한 계획에 동참하겠습니다. 그걸 위해선 제가 아니라 미국부터 동참시키는 게 순서겠죠.”

대찬은 러위청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그의 뒤통수를 향해 러위청이 입을 열었다.

“조 회장, 노파심에 말해두지만 이건 탑 시크릿입니다. 서투르게 말을 흘렸다가는 정말 중국 시장에서 철수해야 할 겁니다.”

“그쯤은 말씀 안 하셔도 압니다.”

대찬은 그대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대찬이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일단 여지는 열어두었다.

러위청도 그걸 인지했다.

그 역시 로튼 프룻츠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감수하면서 이 아사리판에 끼어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도 조건은 당연히 어느 정도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으름장 놓기는.’

러위청은 씩 웃었다.

혼자 남은 러위청은 남은 술을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찬은 바로 한국으로 돌아와 정부와 접촉했다.

그는 청와대의 외교라인에 근무하는 관료와 식사를 함께하며 입장을 공유했다.

“최소한 제가 국가보안법으로 감방 안 들어가려면 정부와 협조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정부 입장은 어떻습니까?”

“기회라고 생각하지만 덮어놓고 달려들 생각은 현재 없습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될 것 같으면 저쪽에서 휙 토라져 버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니.”

“예, 일단 정부는 보폭을 최소한으로 유지할 생각입니다. 조 회장님의 역할에 따라 정부의 다음 행보도 결정될 겁니다. 졸지에 막중한 책무를 떠안으셨습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정부는 회장님께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의외네요.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달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더니.”

관료는 고개를 저었다.

“섣부르게 나섰다가는 저희가 도리어 회장님의 발목을 잡게 되니까요. 될 일도 안 될 테고.”

“그 말씀, 정말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예, 어차피 북한이 얼마나 의지를 갖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저희도 이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조 회장님을 꼭두각시로 부릴 의사는 없습니다. 부리겠다고 부려지는 분도 아니시고요.”

“다행이네요. 저한테 스파이 노릇을 요구하지 말라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제 연기력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

관료는 웃음을 지었다.

“회장님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십시오. 필요한 조치는 말씀해주시면 정부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든든합니다. 그럼 세계평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우리 회사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게 기업의 본령이니까요. 아… 그렇다고 이익 때문에 남파간첩 노릇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그거야말로 기업의 본령에 위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미국과는…….”

“물론 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때가 무르익으면 적절히 조치하겠다고 하더군요.”

“제재국면에 타격이 있어서 미국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바이든 행정부 역시 잘만 하면 큰 업적이 되는 만큼, 신중해하면서도 북한의 태도에 따라 전략을 수정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렇군요.”

“아, 햇치 부통령이 조 회장님은 각별히 신뢰해도 된다며 강력한 지지를 특별히 보내왔습니다.”

“그렇습니까.”

“부통령이 굳이 이런 메시지를 보낸 까닭이 뭘까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관료와의 대화를 종결했다.

일단 최소한의 안전망은 구축된 셈이었다.

대찬은 흥읍에 돌아오자마자 최측근들을 불러들였다.

러위청의 말대로 이 일은 탑 시크릿이었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들은 이상 이쪽에서도 준비는 해두어야 했다.

그래서 논의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에게만 이 소식을 일러주었다.

한태윤 대표, 민승기 대표, 정덕춘 본부장까지 3인이었다.

대찬에게 말을 전해 들은 로튼 프룻츠 핵심 3인방의 얼굴에 먹구름이 꼈다.

정덕춘 본부장은 이마를 탁 짚었다.

“어쩐지 지금까지 너무 잘나간다 했습니다.”

민승기는 대찬에게 눈을 흘기며 퉁을 놓았다.

“그러게 괜히 쿠바까지 직접 가셔서는…….”

“쿠바 안 갔으면 터질 일이 안 터졌겠어요? 납치당했다가 무사 생환한 걸 축하해주지는 못할망정.”

대찬 역시 지지 않고 눈을 흘겼다.

한태윤 대표가 대찬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중국 쪽에서 심하게 압박이 들어오면 우리도 적당히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미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겠죠. 그쪽에서 확실한 시그널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도 운신의 폭이 제한적입니다.”

한태윤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게다가 미국 이전에 UN 안보리 제재가…….”

“최소한 UN 대북제재에서 면제 승인을 받지 않고는 우리도 움직일 수 없죠. 미국의 암묵적인 승인도 필요하고.”

정덕춘 본부장이 대찬에게 말했다.

“하지만 시류에 휩쓸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예, 정신 바짝 차리고 우리도 능동적으로 움직여야죠.”

대찬은 심호흡을 했다.

졸지에 격동의 동북아 국제정치 한가운데 내던져졌다.

얼마 후.

북한이 사흘 연속으로 동해상에 미사일을 쐈다.

까먹을 만하면 저지르는 일이라 평소의 대찬이라면 그런가 보다 했을 것이다.

로튼 프룻츠도 그런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업종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대찬은 한없이 민감해졌다.

대찬은 극동일보의 전길재 편집국장과 저것과 관련된 얘기를 나누었다.

“돈 버는 것 말고는 통히 관심도 없는 분이 갑자기 북한 얘기를 하시는구만요.”

“섭섭한 말씀을. 다른 것에도 관심 많거든요.”

전길재는 히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것들이 저 지랄이냐, 궁금하시다고요?”

“한두 번도 아니고 사흘 연속으로 저러니까요.”

“관심 달라는 거죠. 별 거 없습니다.”

“아…….”

“집착 심한 헤어진 애인 같은 놈들이죠. 뭐해? 지금 자니? 귀찮게 문자 보내고 전화하는 거랑 다를 게 없습니다. 하기야 헤어진 애인한테 사흘 연속으로 연락이 오면 일이 터져도 터질 거 같죠?”

“무력도발이라도 하나요?”

“보통 무력도발은 기습적으로 감행했고, 핵실험 아니면 대화인데 이 시점에서 핵실험을 하진 않을 겁니다. 저는 후자의 가능성을 높게 봅니다. 어디까지나 예측이지만요.”

“그렇군요.”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길재는 기자 중에서도 촉이 좋은 편이었다.

무언가에 골몰하는 대찬의 표정을 보고 그는 픽 웃었다.

“물밑에서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구만요.”

“일이요? 아뇨, 없어요.”

“귀신을 속이세요. 알았어요. 도대체 무슨 곡절로 일개 재벌이 그 이상한 판에 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입 열기는 어려우시겠죠.”

대찬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말없이 웃기만 했다.

전길재는 대찬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안 캐물을게요. 대신 때가 무르익으면 남들보다는 빨리 우리가 실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만약 건수가 있다면, 그렇게 해드리죠.”

대찬은 끝까지 두루뭉술하게 나왔다.

대찬과 헤어지면서, 전길재는 대찬의 뒷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팔자 한번 사납기는.’

과연 사흘 연속의 미사일은 대화 국면에 들어가기에 앞서, 관심을 끌려는 의도였음이 드러났다.

북한은 곧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대외적으로 알렸다.

그즈음 대찬은 북한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중국 랴오닝성의 공산당 서기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명목은 랴오닝의 중심인 선양에 대규모 비도축육 설비를 구축하는 안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정이 묘했다.

정덕춘 본부장은 대찬에게 말했다.

“회장님께서 선양에 머무르시는 기간이 북한 김정은이 탑승한 열차가 그곳을 통과하는 시간과 겹칩니다.”

“그렇다고 설마하니 중간에 기차에서 내려서 시진핑보다 날 먼저 만날 리는 없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회장님께서도 대비는 해두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죠.”

“그럼 이번 선양 방문은 극비리에 최소인원으로 정하겠습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왜요?”

“회장님, 왜냐니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대찬은 정덕춘 본부장의 말을 막았다.

“중국 외교관이 저한테 말하기를, 이번 대화국면은 민간의 자연스러운 요구로 시작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

“또 청와대는 나에게 내 이익에 충실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말이야 그렇긴 한데…….”

“우리가 지레 겁먹고 몸을 사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는 순간 저 시커먼 정치인들의 꼭두각시 내지는 장기 말이 되는 거예요.”

정덕춘 본부장은 살짝 답답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인원은 어떻게 할까요.”

“매머드급으로 구성하죠. 본부장님은 물론이고 한태윤 대표님, 옥문영 대표님은 물론이고 설비 구축에 대한 논의니까 RF 시스템의 민승기 대표님 역시 동행해야겠습니다.”

“아예 회사 수뇌부 전체를 동행시키려고 하십니까?”

“네, 이제 슬슬 중국에도 우리 비바체 점포들을 진출시킬 채비를 해야 합니다. RF 미트, RF 비바체, RF 시스템의 수뇌부와 그 격에 맞는 규모의 실무진을 대동하고 선양으로 가겠습니다.”

정덕춘 본부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남의 눈에 띄시려고 작정을 하셨네요…….”

“나는 로튼 프룻츠의 경영자이지 외교관이나 간첩이 아니에요. 이용당하지 않고 우리 회사의 입지를 굳게 지키려면 우리도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대찬의 말이 워낙 강경한 터라 정덕춘 본부장도 더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대찬은 정덕춘 본부장, 한태윤 대표, 옥문영 대표, 민승기 대표를 좌우에 거느리고 선양 국제공항에 내렸다.

그 뒤로도 무수히 많은 실무진이 따랐다.

이날 대찬을 필두로 한 로튼 프룻츠 임직원은 아예 전세기 하나를 통으로 빌려 움직였다.

내근비서 진위생과 외근비서 마강국이 동시에 동행하여 대찬을 보좌했다.

그의 마중을 나온 랴오닝 당서기는 엄청난 규모에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조대찬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실 줄은…….”

“그만큼 랴오닝을 비롯한 중국 동북삼성에 대한 제 욕심이 크다고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허허, 말씀이야 감사합니다만…….”

대찬과 악수를 나누는 와중에도 로튼 프룻츠의 직원들이 끊임없이 입국장 안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을 보고 랴오닝 당서기는 어안이 벙벙했다.

대찬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체류비용은 전액 우리 쪽에서 부담할 테니 서기께서는 그 부분은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아유, 별말씀을……. 그런 걱정은 전혀 안 합니다.”

랴오닝성 서기는 그렇게 말해놓고도 뒤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혹시 다른 문제라도.”

“문제요? 아니요, 없습니다. 아니… 있습니다.”

랴오닝성 서기는 짧은 말을 하는 데도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편안하게 말씀하세요.”

“이따 그럼 저녁 식사 전에 잠깐 둘이 뵐 수 있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죠.”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밤, 선양역.

모든 차량이 통제되었다.

역 부근의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사람들의 통행 역시 금지되었다.

긴장한 표정의 공안들이 요소마다 좍 깔렸다.

외신들의 통제는 매우 엄격하게 이뤄졌다.

역사 내부에도 랴오닝성 서기를 비롯한 주요 간부와 관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 섞여 있는 한국인은 단 한 명이었다.

대찬은 일찌감치 역사에 나와 VIP 접객실에서 커피를 다섯 잔째 마시고 있었다.

해 떨어지기 전부터 선양역에 구금되다시피 한 그는 긴장보다는 따분함이 앞섰다.

살짝 눈이라도 붙일까 고민하던 그때.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랴오닝성 서기가 접객실 안으로 들어와 대찬에게 말했다.

“조 회장님, 준비를….”

대찬은 서기를 바라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고 기차가 멈추는 플랫폼으로 향했다.

플랫폼에는 역사보다 더 많은 공안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모두가 인민복 차림인 중국 관료들 사이에 멀쑥하게 정장을 입은 대찬의 차림은 다소 이질적이었다.

공안들도 꼿꼿한 부동자세를 유지하면서도 흘끔흘끔 대찬의 걸음을 따라 눈빛을 보냈다.

멀리서 기차가 천천히 플랫폼 안으로 진입했다.

랴오닝성 서기는 숨죽인 채 기차가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대찬 역시 그의 옆에서 들어오는 기차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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