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44화
“반갑습니다, 부부장 선생. 로튼 프룻츠 조대찬 회장입니다.”
“뉴스에서 많이 뵀습니다. 당의 동료들에게서도 말씀 많이 들었고요. 성품도 훌륭하시고, 능력도 뛰어나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삽시간에 대륙의 식탁을 점령한 수완이라면 과찬은 아니겠지요.”
대찬은 그 말이 마냥 칭찬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그건 자기네들이 그의 물건을 많이 팔아주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즉, 우리가 당신의 큰손이니 잘 보이는 게 좋을 거다.
대찬은 웃음을 지었다.
“더 양질의 제품을 제공하도록 회사 측에서도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훌륭한데 얼마나 더 우리나라에서 돈을 벌어가시려고.”
“하하, 제가 돈을 많이 벌어가긴 합니다만 워낙 사람이 많으니 중국 전체로 보면 티도 안 납니다.”
러위청은 피식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50도가 넘는 백주였다.
“술을 잘하신다고 들었는데…….”
“즐기는 편이지만 요즘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몸이 많이 상해서.”
“조 회장님은 아직 마흔도 안 되셨는데 그럴 나이는 아니지요. 몇 잔만 합시다.”
러위청은 웃는 낯으로 대찬에게 술을 권했다.
“모처럼 귀한 분을 뵀으니 딱 세 잔만 하겠습니다.”
“이거 술을 잔이 아니라 사발에 따라드려야겠구만.”
“하하,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대찬은 꽌시를 위해 술을 마다하는 편이 아니었다. 주량에는 꽤 자신이 있기도 했고.
하지만 대찬은 러위청의 앞에서는 술을 뺐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지, 조금이라도 흐트러졌다가는 대책 없이 커다란 부담을 떠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언한 대로 대찬은 딱 세 잔만 받고는 러위청에게 술만 따라주었다.
그러자 왕웨이핑은 웃으며 살짝 그에게 견제구를 던졌다.
“조 회장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십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몸이 안 좋아요. 부부장께만 술을 따라드리고 왕총께는 안 따라드리니까 심술부리시는 겁니까?”
“하하, 심술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러위청은 대찬이 따라준 술을 천천히 마시곤 그를 응시하며 웃었다.
탁.
잔을 내려놓은 러위청은 대찬에게 말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시니 제가 용건이 있다는 걸 눈치채신 모양입니다.”
“부부장처럼 지체 높은 분이 용건 없이 이 자리에 나오진 않으셨겠죠.”
러위청은 호탕하게 웃고 왕웨이핑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총, 당신은 그만 일어나줘야겠습니다.”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왕웨이핑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떴다.
러위청은 대찬의 옆에 앉은 통역 겸 비서 진위생에게도 말했다.
“자네도 자리를 비켜줬으면 하는데. 조 회장님, 영어로 말씀 나눠도 되겠지요.”
진위생은 대찬이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동의를 표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전식 테이블이 놓인 넓은 연회장에는 이제 대찬과 러위청, 둘만 남았다.
스산한 공기가 연회장 안에 가득 찼다.
러위청은 술잔을 저만치 치워버리고 대찬을 바라봤다.
“쿠바에서 봉변을 당하셨다고.”
“봉변이랄 것까진 없습니다. 해프닝이죠. 귀가 밝으시네요. 그런 사소한 일까지 다 알고 계시고.”
“귀가 어두워서야 어떻게 대국의 외교를 책임지겠습니까.”
대찬은 태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시군요.”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그편이 저도 좋습니다.”
“잠시, 술 한 잔 마시고 드려야겠습니다. 조 회장님도 한 잔 하고 들으시겠습니까?”
“예, 정월대보름 아침에 마시는 술은 귀를 밝게 해준다고 해서 귀밝이술이라고 합니다. 오늘이 정월대보름 아침은 아니지만, 중요한 말씀 제대로 들으려면 한 잔 해야겠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러위청은 웃으며 대찬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대찬은 잔을 받고 그에게도 술을 따라주었다.
50도짜리 백주가 대찬의 식도를 찌르르 타고 흘렀다.
한 잔의 술로 정신이 각성되는 느낌이었다.
러위청은 안주도 먹지 않고 약한 술 냄새를 풍기며 말했다.
“쿠바에서의 일은 북한의 실수가 맞습니다.”
“실수라기보다는 잘못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죠.”
러위청은 미소를 띠었다.
“물론 잘못도 잘못입니다만. 아랫것들이 당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북한 지도부는 조 회장님께서 쿠바 출장을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기회요.”
러위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쿠바는 한반도 밖에서 가장 북한에 우호적인 나라입니다. 보는 시선도 적고요.”
“예.”
“미국이나 중국, 한국, 기타 여러 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조 회장님과 단독으로 접선하기에는 오히려 북한보다도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대찬 회장과 접촉하라. 그래서 비도축육 설비 구축에 대한 사업논의를 개시하라. 그게 당에서 내려온 명령입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군요. 그 명령은 달성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처사였습니다.”
“맥락이라뇨.”
“밀무역 운운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예. 작은 기업이야 명운을 걸어볼 만하겠지만, 우리 같은 덩치의 회사한테는 터무니없는 요구입니다.”
“자기 그릇만큼 보이는 법이죠.”
대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죠?”
“일개 참사관 따위가 지도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그 사람들이 항상 해오던 사업이 그런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었으니까.”
“그럼 부부장께서 말씀하시는 지도부의 뜻은 무엇입니까.”
“북한은 벌써 몇 년째 이뤄지고 있는 삼중사중의 대북제재, 그리고 지도부의 비효율적인 경제정책, 돼지열병과 코로나19 사태로 더 이상 버틸 상황이 아닙니다.”
“경제성장률이 볼 만하더군요. 17년 –3.5%, 18년 –4.2%, 19년에는 1.8%로 잠깐 반등했지만 작년에는 다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쿠바에서 리구성 참사관과 만나고 귀국한 뒤.
대찬은 그동안 등한시했던 북한의 자료들을 찾아 개괄적인 정보는 익혀둔 상태였다.
당장 대북사업을 진행할 용의는 없었다.
하지만 북 정권에서 직접 의사가 타진되었으니 기회가 보이면 진입할 가능성을 아예 닫아 두지는 않았다.
경제 상황을 훑어본 대찬은 북한의 요구는 역시 안 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러위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은 17년 7.2%를 시작으로 4.7, 4.8, 5.5. 가파르게 올랐습니다. 이 상태가 몇 년 더 지속되면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럼 본격적인 개혁개방으로 나서겠다는 뜻입니까?”
대찬의 물음에 러위창은 반은 긍정하고 반은 부정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협상에 실패했습니다. 당시의 방식은 지도자들이 만나서 부딪쳐 통 크게 결정하자는 것이었죠.”
“네, 그래서 하노이 회담도 황당하게 결렬됐고요.”
러위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국제사회와 다시 대화에 나서되, 차근차근 기초부터 쌓아올리는 방식을 택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군요.”
“대화국면이 인위적인 결단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발현되기를, 북한도, 우리 중국도 바랍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정부의 줄다리기가 아니라 민간의 요구에 정치가 화답하는 방식을 원합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민간이 저희 회사를 의미하는 겁니까?”
“예.”
“왜 하필 저흽니까.”
“로튼 프룻츠는 그 지위가 특별한 기업이니까요.”
로튼 프룻츠는 중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기업이었다.
중국 측에서 회유하거나 압박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북한 측에서도 그 어떤 기업보다 반길 만했다.
대북제재의 핵심은 ‘석유’였다.
조선노동당이 지휘하는 계획경제는 자본주의 경제 생태계와는 사뭇 시스템이 달랐다.
어지럽고 복잡하게 주고받는 자본주의 시스템과는 달리, 북한의 경제는 획일적이었다.
외부에서 석유가 들어오면 그걸로 트랙터를 움직이고.
그 트랙터로 농사를 지어 ‘인민’을 먹여 살리는 아주 단순한 구조.
그런데 대북제재로 기름구멍이 꽉 막혀버리니 트랙터 공장은 휴업.
기름으로 돌리던 트랙터도 무용지물.
농사도 꽝.
사회와 경제가 일시에 마비되는 것이다.
‘한반도 공룡은 죽어서 석유도 못 되고, 아무튼 이 나라 조상들은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없다.’
그런 염세적인 농담이 나돌 정도.
그만큼 한반도는 석유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니 몇 년째 당 지도부에서 아무리 ‘자력갱생’을 외치며 으쌰으쌰 해도 도대체 경제가 안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도축육은 좌절적인 상황에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었다.
북한 주민들이 고기를 구경도 못하는 이유는, 가축이 사람보다 곡물을 더 많이 소비하기 때문이다.
당장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가축 먹일 곡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비도축육은 전기 자극만 주면 자기가 저절로 자라난다.
곡물이 필요가 없다.
그리고 기름을 넣고 트랙터를 돌려 생산하는 곡물과 달리, 비도축육에는 기름이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는다.
최첨단의 설비를 가동하는 데 필요한 건 약간의 전기일 뿐이다.
북한은 전체 전력의 60%를 수력발전으로 직접 충당한다.
거기에 발전소를 공격적으로 건설해 전력수급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석유는 ‘자력갱생’이 불가능해도 전기는 자력갱생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비도축육은 김씨 일가가 주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은혜를 내리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석유로 밭을 가는 대신 전기로 비도축육을 만들면.
상대적으로 석유 수급에 숨통이 트이는 것이었다.
식량난을 해소하고 동시에 에너지 재앙을 일부분 극복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을시고.
이미 아이티를 위시하여 농사가 어려운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 수자원이 부족한 중동제국이 비도축육의 혜택을 봤다.
이미 검증도 끝난 상황이다.
물론 그건 대찬의 결단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전에는 그저 단꿈에 불과했다.
대찬은 인민의 고혈을 짜먹고 잭 머피보다 피둥피둥 살이 찐 북한의 지도자를 위해 그런 선의를 베풀 요량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단순한 적개심 이전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쇠고랑을 찰 일이었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중국과 북한의 계획에 동참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하면 안 됩니다.”
“조대찬 회장님이 물꼬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말이 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와도 입장과 정보를 공유할 겁니다. 한국 정부 역시 모든 가능성을 터놓고 예의주시하겠다고 우리 측에 알려왔습니다.”
“가능성을 터놓고 예의주시하겠다는 건 그냥 가만히 있겠다는 말을 길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마 그림이 그려지면 동참하게 될 겁니다.”
“그럼 그림 다 그리시면 그때 불러주시죠.”
“조 회장님.”
대찬은 무례를 무릅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저는 관계하지 않겠습니다.”
러위청은 대찬에게 형형한 눈빛을 쏘았다.
“조대찬 회장, 지나치게 무례한 태도는 당신의 비즈니스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로튼 프룻츠를 중국에서 쫓아내기라도 하실 요량입니까?”
러위청은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정치적으로 필요하다면.”
“중국이 제가 예뻐서 우리 회사 고기를 사주는 겁니까? 필요하니까 사는 것이죠. 그 말은 저희가 쫓겨나면 중국도 피해를 본다는 뜻입니다.”
“로튼 프룻츠의 비도축육은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대찬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는 애써 키운 시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장한 모습, 위축된 모습을 저쪽에 드러내서는 안 된다.
당당해야 한다.
대찬은 덤덤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정치적 목적으로 경제를 탄압하는 건 북한 같은 유사국가나 저지르는 일입니다. 중국이 북한과 동격으로 전락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조 회장!”
“더 묻지 마십시오.”
대찬은 자신이 가져온 가방을 손에 들었다.
그 잠깐 동안 대찬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만일 정말 이대로 단칼에 저쪽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중국은 어떤 방식으로든 보복 카드를 꺼낼 것이다.
작게는 비도축육에 안전 문제가 있다며 흠집을 내려고 할 수도 있다.
세무조사를 한다든지, 로튼 프룻츠의 중국 측 파트너를 압박할 수도 있었다.
정말 심하면 중국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중동, 중국, 미국의 세 축으로 형성된 로튼 프룻츠의 수익구조에 큰 타격이 발생하는 것.
그래서 대찬도 호기롭게 큰 목소리는 내도 저쪽과 아예 연이 끊어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이대로 자리를 박차고 떠나면 정말 심각해질 수 있었다.
대찬이 북한이든 중국이든 얽히고 싶지 않은 건 회사에 불이익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리어 얽히지 않아서 불이익이 생길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