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43화
“그럴 수는 없디요. 조 선생이 미리 약을 쳐놓았을지 누구래 알갔습니까.”
“허.”
“저 택시운전수도 잠깐 우리가 신병을 맡아야갔습니다.”
“…여러모로 민폐를 끼치시는군요.”
“공화국의 자력부강, 자력갱생의 기치 아래 주체혁명위업승리의 달성을 위한 일이니 한둘의 수고는 어쩔 수 없디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을 리터로 들이키시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리구성 참사관은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고령도자 동지의 명령이 있었댔기에 조 선생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꼭 좀 대사관으로 모셔야갔습니다.”
“어차피 시간낭비일 테지만 기어코 날 끌고 가려는 속셈이신 거 같으니, 그렇게 해드리죠.”
대찬은 리구성 참사관을 쏘아보며 대답했다.
바람이 휭 불었다.
바람에 쓸리는 사탕수수들의 소리가 대찬과 리구성 참사관 사이를 지나갔다.
리구성 참사관은 고갯짓으로 부하를 부려 대찬을 자신이 몰고 온 차량 안으로 데려갔다.
졸지에 택시기사와 마강국 역시 그들의 손에 이끌려 북한 대사관 앞에 주차를 하고 억류되어야만 했다.
택시기사는 덜덜 떨면서 두려움을 달래려 노래를 불렀다.
“키싸스, 키싸스, 키싸스…….”
노랫소리가 아까처럼 흥겹지 못했다.
마강국과 택시기사는 같은 방에 억류되었다.
대찬은 다른 방에서 리구성 참사관과 마주앉았다.
그의 명령을 받는 정찰총국의 요원들이 대찬의 전후좌우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개중 고약한 치는 허리춤에 찬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대찬은 코웃음만 쳤다.
저들이 자신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일개 참사관 따위가 저지를 사이즈의 일이 아니었다.
리구성 참사관은 대찬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조대찬 선생은 참 대범하십니다.”
“그렇습니까.”
“네, 호연지기가 대단합니다. 대사관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 끌려오는 사람 치구 어깨 안 움츠리는 사람이 없는데. 조대찬 선생은 동무 사랑방에 온 것처럼 편안해 보입니다.”
“나는 귀하가 동무처럼 느껴지진 않습니다.”
“그러시겠디요. 리해합니다.”
“시간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어떤 방식으로든 대북사업을 추진할 의사가 없습니다.”
“참 매몰차십니다.”
“어쩔 수 없는 입장이라고 이해해주시죠.”
“조 선생의 립장은 저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서두, 소상히 얘기를 들으시다보문 생각이 달라지실 수도 있습니다.”
“듣겠습니다.”
그 역시 남의 명령을 착실히 이행해야 하는 소임을 띤 공무원이다.
실패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변명은 당당히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매달려야 하는 입장.
대찬은 그의 입장을 최대한 들어주는 편이 사태를 조기에 종결하는 것임을 알았다.
리구성 참사관은 입맛을 다시며 대찬에게 가까이 앉았다.
“조대찬 선생의 말대루 승냥이 같은 미제놈들이 우리 공화국과 통하는 개인이나 회사를 탄압하구 못살게 구는 것은 사실입니다.”
“네.”
“그러나 하늘이 꺼져두 솟아날 구멍은 있댔습니다. 우리두 멍청이가 아니니 숨구멍 몇 개는 뚫어놓디 않았갔습니까?”
“국경지대에서 중국과의 밀무역이 이뤄지고 있다는 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예, 그쪽을 통하문 못할 것두 없디요.”
대찬은 웃음을 띠었다.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부담을 껴안고 그쪽하고 거래를 해야 합니까?”
“하시디요. 공화국에서는 력사적 대전환의 시운을 맞아 차츰 개혁개방으로의 전략을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조대찬 선생의 회사가 부담을 일찍이 감수해주시문 차후 우리 공화국의 개혁개방이 잉태하는 달큼한 과실을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많이 취할 수 있지 않갔습니까?”
대찬은 피식 웃었다.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개혁개방 외치다가 자력갱생으로 꼬리 자르기 한 게 어디 한두 번입니까?”
그러자 대찬의 뒤에 서 있던 녀석이 총구를 그의 뒤통수에 들이댔다.
“최고령도자의 존함을 함부로 불러제끼지 말라. 한 번만 더 씨불였다가는 머리를 날려주갔어.”
“머리를 날려? 그럼 네가 죽고 못 사는 수령이 널 용서할까.”
“이 새끼……!”
리구성 참사관은 총구를 겨눈 녀석에게 호통을 쳤다.
“당장 총 내려놓으라!”
“하지만… 참사관 동지!”
“당의 이름에 먹칠을 할 참이야!”
녀석은 대찬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총을 내려놓았다.
리구성 참사관은 대찬에게도 경고했다.
“조 선생, 최소한의 례의는 지켜주시디요.”
“여기에 강제로 끌고 온 이상 예의는 기대하지 마셔야죠.”
리구성 참사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 조 선생도 어지간합니다.”
“저는 북한 정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남한 사람 중에 북 정권의 말을 신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본주의를 배격하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동의하는 충의지사들은 신뢰하겠지요.”
“아마 그 사람들도 자기 돈 걸라고 하면 쉽게 걸겠다고 못할 겁니다.”
리구성 참사관은 대찬의 말본새 길들이기를 포기했다.
“조대찬 선생,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보시라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내래 듣기로는 조 선생의 도전의식이 상당히 높다고 하던데. 도전해볼 가치가 충분하지 않갔습니까?”
“밀무역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끝장입니다.”
“세상엔 돈세탁만 있는 게 아니디요. 고기세탁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러 번 우회하여 진행하문 조 선생의 회사에 폐 끼칠 일이 전연 없습니다.”
대찬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안 합니다. 안 한다고요. 김정은 목 따고 날 수령 시켜준다고 해도 안 합니다. 알겠어요?”
“조대찬 선생!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대찬은 책상을 쾅 내리치며 일어섰다.
“내 인내심은 진작 바닥났습니다! 바쁜 사람 붙들고 이게 도대체 뭐 하자는 수작입니까!”
“조 선생!”
“난 이만 가야겠습니다. 다신 보지 맙시다.”
대찬은 리구성 참사관을 쏘아보고 뒤돌아 문을 향했다.
리구성 참사관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조 선생, 맘대로 못 가십니다.”
총을 든 이들이 대찬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찬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리구성 참사관은 대찬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최소한의 성의조차 안 보이시문 우리도 곱게 못 돌려보내드리디요.”
“내 사지를 찢어도 원하는 답은 못 들으실 겁니다.”
“…그러다 사지를 정말 찢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대찬은 냉소를 짓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리구성 참사관과 요원들은 대찬의 수상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찬은 주머니를 뒤져 작은 직사각형의 물체를 들어 보였다.
“리 참사관, 이게 뭔 줄 아십니까.”
“…….”
“쿠바 정부가 특별히 나를 위해 마련한 선물입니다. 귀빈특혜증이라고 하데요. 이름부터 특별하죠.”
“귀빈… 특혜증?”
“이것만 있으면 쿠바 내의 식당이나 술집, 호텔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경찰서, 소방서 등 모든 행정기관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증표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귀빈을 위해서 아주 특별한 기능을 마련했더라고요. 우리 참사관 동지는 그게 무슨 기능인지 아십네까?”
리구성 참사관은 증표를 들고 있는 대찬을 노려보았다.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꼬레아 델 노르떼! 메 세꿰스트로! 꼬레아! 델! 노르떼! 메! 세꿰스트로!”
귀가 찢어질 정도로 큰소리에 대찬을 도청하던 북한 측 요원은 헤드셋을 벗어 던졌다.
그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쿠바 정보국 요원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대찬을 도청하던 북한 측 요원은 쿠바 요원을 보고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 잘못 들은 거야.”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때 대찬이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꼬레아 델 노르떼 메 세꿰스트로!
쿠바 정보국 요원은 그 외침이 다시 들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뛰쳐나갔다.
대찬은 순식간에 목이 칼칼해질 정도로 외치고 귀빈특혜증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웃으면서 리구성 참사관을 바라봤다.
“바로 긴급호출 기능이에요. 이 정도면 귀빈특혜증이라고 부를 만하죠?”
“조, 조대찬 선생……!”
“여기서 내 사지를 찢겠다고요. 어디 그렇게 해보시죠.”
“…….”
“쿠바가 자국 영토에서 한반도의 동족상잔이 일어나길 바라진 않을 테죠. 그것도 피해자가 방금 전 자신들이랑 비즈니스 계약을 맺은 사람이면 더더욱. 그렇죠?”
“조 선생…….”
리구성 참사관은 입술을 악물었다.
정말 성질대로 대찬의 사지를 찢으면.
그는 얼마 안 되는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절단 낸 당사자로 지목될 것이다.
그 대가는 누구나 알다시피 최소 노동캠프, 최대 총살.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은 과연 사회주의 혈맹답게 수도의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덕분에 쿠바 경찰당국이 명령을 받고 긴급출동하여 대사관에 도착하는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북한 대사관 밖으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하게 달려오는 여러 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대찬은 리구성 참사관을 흘끗 바라보고 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 쿠바의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대찬은 리구성 참사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랑 비즈니스를 하고 싶으면 당신 같은 하수인 시키지 말고 당신네 수령 보고 직접 만나라고 해. 알았습니까?”
“…….”
리구성 참사관은 가만히 대찬을 노려보기만 했다.
대찬은 그와 더 말을 섞지 않고 쿠바 경찰들의 에스코트를 받아 대사관을 떠났다.
근처 방에 억류되어 있던 택시기사와 마강국도 함께 풀려났다.
새벽에 돈 많은 손님을 물었다가 난데없이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아마 그가 문학적 자질이 있다면 쿠바 판 ‘운수 좋은 날’이 쓰였을지도.
쿠바를 떠나 뉴욕으로, 그리고 다시 흥읍으로 돌아온 대찬.
그는 한동안 그날의 기억을 잊었다.
그런 그날의 기억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되살아났다.
모름지기 로튼 프룻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장은 사우디아라비아를 필두로 한 중동시장, 미국시장, 그리고 중국시장이었다.
특히 중국시장.
아프리카 돼지열병의 창궐.
로튼 프룻츠의 비도축육 2.0 출범.
그리고 몇 달간 세계가 크게 앓았던 코로나19의 숙주가 야생동물의 비위생적인 취급에 있다는 정설에 가까운 주장.
여러 요인이 맞물리면서 중국에서 소비되는 쇠고기의 20%를 로튼 프룻츠 산 비도축육이 차지했다.
아울러 쇠고기보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그들의 식성에 맞춰 돼지고기 비도축육의 개발마저 성료.
돼지고기 역시 중국 내 전체 소비량의 5%를 로튼 프룻츠가 차지했다.
그야말로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 수준이었다.
그에 발맞춰 중국 내 로튼 프룻츠 생산설비는 길림성부터 티베트까지 50곳, 잠정적인 계획으로는 2025년까지 100곳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대찬 역시 중국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도 가까워서 중국 출장이 자주 잡혔다.
로튼 프룻츠의 중국 측 파트너인 정봉무역 역시 차, 커피 등 음료를 취급하던 작은 무역회사에서 급격히 덩치를 불렸다.
중국과의 무역에서는 소위 ‘꽌시’가 중요하다.
어딜 가나 공산당 간부의 입김이 강하게 미치니 그들을 음으로 양으로 우대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대찬 역시 중국공산당의 여러 요인과 접촉하면서 그들과의 우호 다지기에 주력했다.
대찬은 중국공산당 측에서도 반기는 인물이었다.
그가 만난 공산당의 고위인사 중에서는 한국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중국에게 중요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이기는 했다.
그러나 인사치레라도 웬만한 위상이 아니고서야 그런 말은 도리어 조롱이나 실례로 들릴 뿐이었다.
대찬은 그들이 앞에선 그렇게 얘기하면서 뒤로는 국가 주도로 열심히 비도축육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하기야 남이 만든 고기로 자기네 국민 먹이려니 배가 아프기는 할 터.
저들이 기술개발에 열중할수록 대찬의 가치가 언제 똥값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로서도 최대한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해 경쟁자들을 멀리 따돌리려 노력할 뿐이었다.
베이징.
대찬은 정봉무역 총경리인 왕웨이핑의 주선으로 중국 중앙정치의 요인들과 연달아 만났다.
지금까지 만난 이들은 대개 경제관료나 농업관료들이었다.
혹은 이해관계가 얽힌 기업인들.
그런데 왕웨이핑은 뜬금없이 자리에 외교관을 불러들였다.
왕웨이핑은 유독 그를 어려워하면서 대찬에게 소개해주었다.
어려워한다는 건, 별로 안 친하다는 뜻이었다.
“이쪽은 중국공산당 산하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부주임 겸 외교부상무부부장이신 러위청(乐玉成) 선생입니다.”
중앙외사공작위원회는 공산당 산하 실질적인 외교정책이 결정되는 기구였다.
그곳의 판공실부주임은 실무 2인자.
외교부부부장은 우리로 치면 외교부 차관.
즉, 러위청은 중국 외교라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내는 인물이었다.
‘어째 느낌이 쎄한데.’
대찬은 떨떠름했지만 일단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