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542화 (542/556)

난 할 수 있어 542화

만일 한국어로 말했다면 북한 측 인사를 통해 말이 왜곡될 수도 있는 터.

대찬은 그런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영어로 말했다.

물론 도청에 동원된 이가 북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또 북한 사람이 도청을 한다고 해도 영어를 할 줄 알 확률이 높기는 했다.

그러나 쿠바 정보당국 내에도 영어에 능통한 자는 차고 넘칠 테니 대찬의 말이 그 한 사람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은 차단된다.

‘나 그쪽이랑 협상 안 하겠다.’

같은 말이라도 어디서 하느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

협상장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다분히 허세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었다.

더군다나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쿠바 측 당국자라면 더더욱.

그러나 이렇듯 차 안에서 대찬이 제3자와 통화하는 상황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면.

그 강도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대찬이 도청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그렇게 말했다면.

정말 협상장을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뜻이니까.

쿠바 정보국 역시 도청을 통해 대찬의 말을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 효과는 즉각 발휘되었다.

다음날 협상에서 쿠바는 아이티 모델을 따르겠다고 선제적으로 제안했다.

대찬은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이것으로 강한 의심에 가까웠던 도청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바로 로튼 프룻츠 본사에서 쿠바로 실무팀을 파견하여 설비 구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대찬은 해안도로를 따라 죽 형성된 방파제 길을 마강국과 걸었다.

카리브해의 맑은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쳐 산산이 무너졌다.

튀기는 물방울에 햇빛이 투영되어 진주가 비산하는 느낌이었다.

호텔방에서 벗어나, 증표 역시 방 안에 두고 나온 대찬과 마강국은 자유롭게 얘기를 나눴다.

마강국은 웃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그래도 회장님이 직접 오니까 한 큐에 해결이 되네.”

“그게 무슨 말이야?”

“밑에 사람들이 왔어 봐. 지루한 줄다리기만 하다가 되돌아왔을걸.”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거야.”

“기왕 뱉어놓은 말이 있으니 정말 내일은 여길 떠야겠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바빠. 더 볼 일 없으니 빨리 돌아가야지. 워싱턴 잠깐 들러서 햇치 부통령 쪽하고 저녁이나 잠깐 하고.”

“그럼 오늘이 쿠바에서의 마지막 밤인데 술이나 진탕 먹고 가면 안 될까.”

대찬은 못 미더운 듯 마강국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너도 참 심심하긴 하겠다. 나 따라서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도 도대체 뭘 즐긴 적이 없으니.”

“저번에 너 따라서 뉴욕 갔을 때도 자유의 여신상 구경도 못했어.”

대찬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 오늘은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고.”

“좋았어.”

대찬과 마강국이 걸음을 옮기는데, 마주 걸어오는 한 떼의 사람들이 그들의 앞을 막았다.

대찬이 옆으로 비켜 지나가려는데, 그들도 옆으로 움직여 다시 막았다.

고개를 살짝 아래로 깔고 걷던 대찬은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면서 그들의 얼굴보다 먼저 보인 것은 가슴팍에 달린 김일성 배지였다.

대찬의 미간이 좁아졌다.

북측 인사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이가 대찬에게 말을 걸었다.

“조대찬 선생 되십니까.”

과연 북한 억양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네, 그런데요.”

“저는 꾸바 공화국 주재 조선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일하는 리구성이라고 합니다.”

대찬은 경계심을 품은 채로 물었다.

“저한테 용무 있으십니까?”

“있디요. 잠깐 저희와 함께 가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대찬은 단칼에 거절했다.

“용무가 있으시면 이 자리에서 말씀하시고, 아니면 이만 각자 갈 길 가시죠.”

“동포끼리 매정하게 굴깁니까.”

“동포끼리니까 다짜고짜 앞길 막고 같이 가자는 사람한테 화 안 내고 있는 겁니다.”

“중대한 사업을 논의하고 싶은데 여기서 하기에는 적절치 않디요.”

“개성공단에 고기 찍어내는 공장이라도 짓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까?”

“과연 조대찬 선생, 명석하십니다. 리해가 빠르십니다.”

리구성 참사관의 대답에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개성공단은 지금 7년째 문을 닫고 있습니다만.”

“꼭 개성에 지으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개성이 아니라 평양이든 나진이든 지을 수 없습니다. 북한과 교역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제재대상인 거 모르십니까?”

“일단 논의의 물꼬나 터보자는 것이디요.”

대찬은 손을 휘휘 저었다.

“죄송하지만 관심 없습니다.”

“조 선생.”

“북측 외교관과 접촉한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겁니다. 다시 마주치는 일 없도록 하시죠.”

대찬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바로 리구성 참사관을 지나쳤다.

마강국은 쭈뼛거리다가 후다닥 대찬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그는 가볍게 진저리치며 대찬에게 말했다.

“어우 야, 북한 외교관하고 다 말을 섞는다.”

“강국아, 아무래도 오늘 술은 안 되겠네. 얌전히 호텔방에 머물다가 이 나라 뜨자고.”

“그래. 더 있으면 안 될 느낌이야.”

마강국도 누울 자릴 보고 다리 뻗을 줄 알아서 애처럼 칭얼대지 않았다.

리구성 참사관은 쌩하니 자기를 지나치는 대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성질 급한 부하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이런 썅! 아새끼 드럽게 발칙하구만. 참사관 동지, 가만 놔둘 겁네까?”

“가만 안 놔두믄, 달려가서 조대찬이 대가리에 총알이라도 박으려고 하네?”

“지시만 하달해주시면 못할 것도 없디요.”

리구성 참사관은 부하를 잠깐 쏘아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랬다간 니두 총살, 나두 총살이야. 알간?”

“…예, 참사관 동지.”

“진지하게 마주 앉아서 저 아새끼랑 얘기 정도는 섞어야 우리도 할 말이 있지 않갔어? 이렇게 끝내는 것도 총살감이야.”

“그 말씀이 정확합니다, 참사관 동지.”

리구성 참사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이 싫다믄 억지로라도 자리를 만들어야지 어쩔 수 없어.”

대찬은 쿠바와의 협상이 종료되고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짐을 쌌다.

일정이 급하기도 하고, 이 나라를 떠야 북한과 얽힐 일도 없을 것이었다.

대찬은 그들과 단순히 말 몇 마디 섞는 것만으로도 큰 부담을 느꼈다.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도 없는 대한민국 일반인이 마찬가지의 북한 민간인과 접촉하는 것도 영 꺼림칙한 일이다.

그런데 대찬은 국내의 거대 언론에 강력한 입김을 불어 넣는 존재.

더하여 절친한 친구가 국회의원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기업의 총수.

그런 대찬이 북한 대사관의 요인과 접촉한다면.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무수한 헛소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논의라는 게 북한에 비도축육 설비를 구축해달라는 것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오금이 저려왔다.

UN 안보리는 이미 삼중사중의 대북 경제제재를 취하고 있으며, 미국은 북한 측과 거래하는 개인이나 기업은 모조리 때려잡겠다고 하는 판이었다.

북측과 거래하는 개인과 기업, 그리고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북측과 접촉하려는 이들 역시 계좌동결 등 고강도의 제재를 받게 되는 터였다.

그럼 로튼 프룻츠는 제재의 대상이 되어 졸지에 거지꼴이 되고 말 것이다.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쿠바 측에서 준 귀빈특혜증을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시간조차 대찬에게는 아까웠다.

1초라도 빨리 쿠바를 뜨고 싶었다.

그는 마강국에게 말했다.

“다 챙겼으면 나가자.”

“이건 뭐 야반도주도 아니고.”

“야반도주 맞아. 택시 불러놨지?”

마강국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프런트에 말해서 불러놨어.”

“오케이, 가자.”

대찬과 마강국은 바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시내에서 공항까지는 20km 남짓.

시가지의 풍경은 금방 사라지고 광활한 사탕수수 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사람 키를 훌쩍 넘겨 자라는 사탕수수 밭 사이로, 50년대 제작된 낡은 택시가 덜컹거리며 달렸다.

“씨엠쁘레 께 떼 쁘레군또— 께 꽌도 꼬모 이 돈데— 으흐으흠, 키싸스, 키싸스, 키싸스.”

새벽에 장거리 손님을 낚은 기사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핸들을 북처럼 두드렸다.

그 걸걸한 노랫소리가 대찬의 피로를 다소 씻어주었다.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던 대찬도 노래를 들으며 점점 저도 모르게 편안해졌다.

새벽부터 푸닥거리를 한 마강국은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창문에 여러 번 머리를 박으면서도 깊은 잠에 빠졌다.

노랫소리와 장단을 맞추듯 마강국은 리드미컬하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대찬의 눈도 천천히 감기고, 졸음기가 쏟아졌다.

“아아스따 꽌도— 아스따 꽌도.”

흥에 겨운 기사의 노랫소리에 음 이탈이 일어나 대찬의 정신이 살짝 각성된 그때.

뒤편에서 쪼이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차 안을 밝혔다.

깜깜한 밤인 데다가 사탕수수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도로는 말 그대로 암흑이었다.

그 도로에도 밝은 빛이 쪼였다.

빛을 쪼이자 한적한 도로 위에서 가만히 몸을 쉬던 도마뱀이 사탕수수 사이로 숨었다.

한두 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새벽의 한가운데.

이렇게 많은 차량이 쿠바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대찬은 마강국의 허벅지를 살짝 건드려 깨웠다.

그리고 기사에게 말했다.

“마스 라삐도.(더 빠르게)”

“씨.(네)”

기사는 더욱 과감하게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그러나 만들어진 지 70년이 넘은 고물차는 한계가 있었다.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은 체감이 안 되고, 더 덜컹거리는 것만 체감되었다.

택시가 구물거리는 동안, 뒤에서 헤드라이트를 쪼이던 차량들이 택시를 추월했다.

각각 양쪽에서 추월한 차량은 저만치 앞서갔다.

그것들은 바리케이드처럼 옆으로 비껴 멈춰 섰다.

뒤에서 따라오는 차들은 택시의 후미를 막아섰다.

삽시간에 갇히고 말았다.

대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뭐야, 저것들.”

마강국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사방을 주시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흥겹게 노래를 부르던 택시기사도 완전히 얼어붙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핸들만 꽉 붙들고 놀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 사이 택시를 둘러싼 차량에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대찬은 이를 악물었다.

쇠망치를 든 사람 앞에서 자라가 목을 껍데기 안으로 숨겨봤자 무슨 소용인가.

녹슬 대로 녹슨 차문을 걸어 잠가봤자.

아마 정찰총국 소속인 녀석들의 억센 아귀힘에 쉽게 뜯겨나갈 것이다.

대찬은 이를 악물고 택시를 둘러싸는 사람들을 봤다.

그는 구질구질한 농성전을 포기하고 선제적으로 차문을 박차고 나가려 했다.

그런 대찬의 손을 마강국이 움켜쥐었다.

“야, 괜찮겠어?”

“설마하니 내 몸에 구멍 내진 않겠지.”

“싸우라면 싸울게.”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그럼 진짜 구멍 날지도 몰라.”

대찬은 부드럽게 마강국의 손을 뿌리쳤다.

대찬은 문고리를 잡은 채, 잠깐 생각나는 것이 있어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쎄뇨르(아저씨).”

“…씨(네)?”

“Do you speak English(영어 하세요)?”

대찬이 묻자 택시기사는 검지와 엄지 사이를 살짝 벌리며 대답했다.

“A little(약간).”

“North Korea kidnapped me. In spanish(북한이 나를 납치했다. 스페인어로)?”

“꼬레아 델 노르떼 메 세꿰스트로.”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

기사는 덜덜 떨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대찬이 밖으로 나오자 그를 향해 달려오던 사람들이 되레 놀라는 기색이었다.

대찬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북한 대사관에서 나왔나?”

그 대답에 리구성 참사관이 대답했다.

“조 선생, 무례를 용서하시라요.”

“저질러놓고 용서하라니. 그게 말입니까?”

그러자 리구성 참사관의 곁에 선 녀석이 으르렁거렸다.

“참사관 동지한테 말버릇 똑바로 하라. 염통에 바람구멍 뚫리기 싫으믄.”

리구성 참사관은 그를 점잖게 제지하고 웃는 낯으로 말했다.

“조대찬 선생께서 우리와의 대화를 기어코 뿌리치시니 방법이 없댔습니다.”

“전 오늘 아침 비행기로 뉴욕에 가야 하는데요.”

“죄송하지만 취소하시디요. 나눌 말씀이 많습니다.”

“택시기사는 우리와 관계없는 사람이니 먼저 돌려보내죠.”

리성구 참사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