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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41화 (541/556)

난 할 수 있어 541화

“대통령께서 특별히 지시해 제작한 겁니다. 수도 아바나 소재의 식당, 주점, 호텔, 수영장 및 기타 편의시설들 모두 이 증표만 제시하면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고요.”

“대단한데요.”

“경찰서를 포함한 모든 관공서에 이 증표를 제시할 경우 전폭적인 협조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될는지.”

“그만큼 저희가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부담 드리는 겁니다.”

“허허… 뭐, 이런 파격 대우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감사히 받아두겠습니다.”

“네, 이건 일회용이 아니라 쿠바 방문하실 때마다 유효합니다.”

“도깨비방망이라도 얻은 기분이네요.”

대찬은 증표를 받아들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물론, 로튼 프룻츠 직원에 한해서 인수인계도 가능합니다.”

“이건 이름을 뭐라고 해두면 좋을까요?”

“뭐라고 부르셔도 관계는 없습니다.”

“아, 원래 있던 물건이 아닌가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대통령님의 특별한 지시로 제작했다고. 오로지 조 회장님을 위한 겁니다. 이름이야 아무렴 좋지만 귀빈특혜증이라고 해둘까요.”

“귀빈특혜증, 좋네요.”

카를로스는 뿌듯하게 웃었다.

“아, 그리고 대통령님과의 회담 때 말입니다.”

“네.”

“비도축육 사업과는 별개로, 한 가지 더 부탁을 하실 예정입니다. 미리 귀띔해드리는 겁니다.”

“한 가지 더라뇨?”

“조 회장님께서는 주한 아이티 명예영사이시지 않습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한 쿠바 명예영사도 겸임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한국과 쿠바는 수교국이 아니라.”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흔쾌히 승낙해주리라 생각했던 카를로스의 얼굴이 굳었다.

이렇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는데.

모로 보나 쿠바가 아이티보다 나은데 아이티는 해주고 쿠바는 안 해준다고?

기분이 나쁠 만했다.

대찬은 바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쿠바는 우리나라와는 수교하지 않고, 북한과는 수교하고 있습니다. 왜죠?”

“북한과는 사회주의 사상으로 연결된 동지의 나라니까요.”

“네, 그래서 안 됩니다. 그저 돈 많은 민간인에 불과한 제가 결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반드시 한국에서 문제가 될 겁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카를로스는 그 말을 듣고 더 우길 수는 없었다.

그는 단념했다.

“알겠습니다. 미리 귀띔해드리길 잘했군요. 대통령께 보고해서 이 논의는 없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일정이 잡히면 대통령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동안 편히 쉬십시오.”

“그러죠.”

카를로스는 꾸벅, 한국식으로 인사를 하고 호텔방에서 물러났다.

그가 나가는 걸 본 마강국은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유, 저 아저씨 더럽게 말 많네. 이렇게 오래 얘기할 줄 알았으면 바에서 모히또나 한 잔 하고 올 걸.”

대찬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카를로스가 건네주고 간 일명 ‘귀빈특혜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강국의 시선도 자연히 그쪽으로 갔다.

“그게 뭐야?”

“귀빈특혜증이래. 이거 있으면 식당, 술집, 호텔 어딜 가나 프리패스라네.”

“뭐? 그거 완전 암행어사 마패 아니냐?”

대찬은 피식 웃었다.

“말 듣고 보니 그렇네.”

“조대찬 출세하긴 했구나. 이런 특급대우를 다 받고.”

“출세했지, 그럼.”

대찬은 웃으면서 마강국의 손을 슬쩍 잡아당겼다.

‘왜?’

마강국은 그렇게 물으려다가 대찬이 쉿,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대찬은 슥슥 볼펜으로 쪽지에 무어라 썼다.

-안에 도청장치가 있을 것 같아.

마강국은 놀라며 입 모양으로 ‘뭐?’ 하고 놀랐다.

-이런 증서를 굳이 금속 재질로 만들 이유 없음. 글씨 작아서 제대로 읽히지도 않음.

‘그렇긴 하네.’

-이게 다른 귀빈들한테도 지급되는 거면 쿠바 사람들이 알아서 모실 거임. 근데 이건 나만을 위해 처음 제작한 것.

‘응.’

-쯩이 효력 있으려면 일선 공무원이나 민간업소나 상부에 물어봐서 확인 필요. 처음 보는 거니까.

‘그렇지.’

-쓸데없이 번거롭. 일일이 물어볼 거면 굳이 이게 왜 필요?

‘그렇네.’

-도청 100%. 아이티에서도 경험 有. 이 호텔도 안심 X.

열심히 손을 놀려 글씨를 쓰던 대찬은 손이 저려와 이제는 필담도 관두고 수화로 얘기했다.

대찬의 검지가 마강국을 가리켰다.

너.

그 다음 입술을 가리켰다.

입.

그 다음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조심해라.

벌써 둘이 교분을 맺은 지 이십 년이 넘었다.

마강국은 척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귀빈특혜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객실 탁자에 비치된 라디오를 틀고 그 위에 증을 올려놓았다.

끼이이이이이이—

그를 도청하던 이의 헤드셋에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설 정도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찬을 도청하던 이는 헤드셋을 집어던지며 외쳤다.

“우아악! 이놈의 새끼! 귀청 떨어질 뻔했네!”

쿠바 정보국의 요원들 중에서는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보국에서는 주 쿠바 북한대사관에서 요원을 파견해달라고 했다.

북한 대사관 측은 ‘남조선’의 거물급 재계 인사를 도청하면 쓸 만한 정보를 건질 수 있다고 판단, 그 요청을 수락했다.

덕분에 북녘 동포 하나가 대찬의 소음 공격에 잠깐 청각을 잃었다.

아무리 순진한 사람이라도 그런 수작을 눈치챈 이상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런 사람이라면 도청장치가 설치된 빌어먹을 증표를 멀리할 것이다.

조금 과격하거나 다혈질인 사람은 지체 없이 파기할 것이다.

대찬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증표를 자신에게 이롭게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걸 보고 대찬은, 차라리 많은 인원을 대동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수행원이 많았다면 필연적으로 그들과 숱하게 말을 섞어야 했다.

그럼 증표가 도청장치임을 인식하고 있어도 은연중에 저쪽에 정보를 흘릴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영영 입을 다물고 있자니, 저쪽에서 수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대찬은 마강국만을 대동했으니 말이 없어도 답답하게 여기긴 하겠지만 수상하게 여기진 않을 것이다.

대찬은 꿍한 표정으로 증표를 다시 들어 만지작거리며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런 쓸데없는 수작 안 부려도 어련히 잘해 줄 텐데.’

대찬은 심술이 나서 증표를 다시 한 번 라디오 위에 던져놓았다.

끼이이이이이이—

“썅! 이런 오물장에 내동댕이칠 개간나 새끼!”

헤드셋을 끼고 있던 북한 대사관 요원은 피를 토하며 대찬에게 상욕을 퍼부었다.

대찬은 쿠바의 디아스카넬 대통령과 회담을 나눴다.

디아스카넬 대통령은 흐뭇하게 웃으며 대찬에게 악수를 청했다.

“바로 이웃나라인 아이티를 여러 번 다녀가신 걸로 압니다. 한 번쯤 우리나라도 들러주실 줄 기대했는데 안 오시더군요.”

대찬은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죄송합니다. 먼저 이렇게 초청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 쿠바는 피델 동지의 강인한 뜻을 이어받고, 라울 동지의 혁명적인 대전환의 개방 정책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로튼 프룻츠가 그 대전환의 한 축을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네, 미력이나마 돕겠습니다. 서로에게 모두 이득이 되는 거래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지요. 그게 자본주의지.”

디아스카넬 대통령은 대찬과 사진 몇 장을 찍고, 좋은 풍경을 뒤에 두고 식사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그리고 실무는 쿠바 무역부에서 진행했다.

쿠바 무역부 측에서는 차관을 필두로 좌우에 많은 실무자들이 배석했다.

그만큼 비도축육 설비 유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 앉은 로튼 프룻츠 측은 대찬과 마강국, 그리고 일시적으로 고용한 통역뿐이었다.

사업에 대한 지식이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대찬에게만 있고 마강국에게는 없었다.

마강국의 자리는 사실 없어도 문제없었다.

그러나 대찬이 단독으로 임하기에는 어째 옆이 허전하기에 마강국을 앉혀놓았을 뿐이었다.

대찬은 협상을 낙관했다.

어차피 급한 건 쿠바 측이었다.

아무리 후발주자를 누르기 위해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게 로튼 프룻츠의 지상과제라지만.

쿠바라는 시장은 사실 없어도 잠깐 아쉬운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에 쿠바는 국내에서 소비되는 식품의 80%가량을 외국에서 들여오는 터.

상대적으로 절박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쿠바는 저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나라에서 로튼 프룻츠의 사업 모델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사우디 모델, 다른 나머지 하나는 아이티 모델.

사우디 모델은 생산만 로튼 프룻츠에서 맡고, 유통과 판매는 해당 국가의 기업이 맡는 방식이었다.

아이티 모델은 생산은 물론 유통, 판매까지 로튼 프룻츠가 전담하는 방식.

사우디 모델은 로튼 프룻츠가 막 해외시장을 개척할 때 주로 채택했다.

로튼 프룻츠가 채택했다기보다는 해외진출이 간절했던 당시, 주도권을 쥔 당사국의 요구를 로튼 프룻츠가 수용한 형태였다.

아이티 모델은 반대로 아쉬울 것 없는 로튼 프룻츠의 요구를 아쉬운 당사국이 받아들여 진행했다.

이제는 식량난을 겪는 나라들에서 러브콜이 쏟아지는 상황에다가 로튼 프룻츠가 유통 노하우를 가진 비바체를 품은 터.

로튼 프룻츠는 사우디 모델 대신 주로 아이티 모델을 요구했고 관철시켰다.

그런데 쿠바 측은 대담하게도 사우디 모델을 요구했다.

협상대표인 쿠바 무역부 차관은 대찬에게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로튼 프룻츠와 상생의 관계를 맺고 싶지, 아이티처럼 일방적으로 멍에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입장은 이해합니다만, 저희에게도 나름의 입장이 있어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핵심은 배급입니다. 배급의 주체는 오로지 당과 국가여야만 합니다. 기업이 당과 국가를 대신해 배급의 주체가 된다? 말도 안 되죠.”

“작은 부분에서는 협상의 여지가 물론 있습니다만, 큰 틀에서부터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협상은 어려울 겁니다.”

“첫날부터 결론이 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서로의 입장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하시고, 내일 다시 만나시죠.”

무역부 차관의 태연한 태도에 대찬은 그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그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대찬은 마강국이 운전하는 차량으로 호텔에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에 둘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도청을 의식한 탓이었다.

대찬은 뒷좌석에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되도 않는 배짱을 부리고 있어.’

쿠바 정부는 로튼 프룻츠를 물렁하게 보고 있는 듯했다.

대찬은 언짢아하면서도 그쪽의 생각이 아주 터무니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자기네 나라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하는 아이티에 퍼주다시피 하는 꼴을 봤으니.’

대찬은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대찬에게 있어 아이티는 단순히 인구 천만 명의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는 걸 그들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대찬은 미리 챙겨 나온 귀빈특혜증을 꺼내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는 뒷좌석에 앉은 채로 중얼거렸다.

우리말이 아니라 영어로.

“쿠바와의 협상은 더 이상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고집불통이더군요.”

대찬이 영어로 뭐라 중얼거리자 마강국이 백미러로 그를 흘끗 보며 말했다.

“지금 도처…….”

대찬은 그가 도청을 말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고 전방 주시나 잘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마강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대찬은 다시 영어로 중얼거렸다.

“저쪽은 사우디 모델을 원하는 것 같은데, 지금 미국이나 중국에서도 사우디 모델은 적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티보다는 당연히 우대받아야 한다는 사고가 그런 되도 않는 판단을 가능하게 한 것 같습니다.”

누가 보면 미국 드라마 대사를 따라 하면서 영어공부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참 열심히 산다.’

마강국이 헛웃음을 지으며 대찬을 백미러로 한 번 더 살피는데, 공교롭게 대찬과 눈이 마주쳤다.

대찬은 찌릿 눈빛을 쏘았고 마강국은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대찬은 다시 혼자서 중얼거렸다.

“제가 직접 쿠바에 온 건, 빨리 협상을 끝내고 미국에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질질 끌면 어쩔 수 없죠. 모레 미국으로 들어갈 테니까 일정 잡아주세요.”

대찬은 모노드라마를 마치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굳이 유창한 한국어를 놔두고 영어로 중얼거린 데는 까닭이 있었다.

대찬은 쿠바와 북한의 밀접한 관계를 잘 알았다.

두 눈으로도 확인했다.

대찬이 디아스카넬 대통령과 회담을 하러 대통령궁을 방문했을 때.

그는 붉은 깃발 바탕 위에 웃고 있는 김일성의 사진이 부착된 배지를 착용한 사람들을 여럿 발견했다.

쿠바 측에서는 단순한 행정적 도움을 위해 함께하는 거라고 말했지만, 대찬의 기분은 찝찝했다.

그러니 도청 역시 안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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