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40화
대찬은 잠깐 업무 차 재단 사무실에 들렀다가 비어있는 조은찬의 자리를 보고, 옆자리의 직원에게 물었다.
“조 차장 어디 갔어요?”
“당당하게 땡땡이친다고 하시고 사라지셨어요. 벌써 몇 시간 됐습니다.”
그러자 대찬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뭐라고요?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대찬이 입술을 악물고 빈자리를 노려보던 그때.
조은찬이 돌아왔다.
대찬은 그를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1인분 제대로 하라고 했지. 너 벌써부터 이따위로 할래?”
“이거 왜 이래. 방금 1인분 하고 오는 길이구만.”
“회장한테 말을 까?”
“네가 존대할 땐 나도 존대하고, 네가 반말하면 나도 반말하라며. 일구이언 하지 맙시다?”
대찬은 조은찬을 윽박지르려다가 자신이 한 말이 맞긴 맞아서 부르르 떨었다.
“망할 자식.”
“그러지 좀 마. 나 방금 우리 조 회장님이 케어 못한 건수 해결하고 오는 길이니까.”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너는 박 회장 실컷 조져놓고 왜 당사자인 꼬마는 가만 놔두냐?”
“뭘 가만 놔둬. 학폭위 다시 열려서 징계 받았잖아.”
조은찬은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 새끼, 가만 보면 조카를 안 사랑하는 거 같아.”
“뭐?”
회사에서는 조 회장, 재단에서는 조 이사장.
흥읍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대찬인데.
그런 그에게 이 새끼, 저 새끼 들먹이는 풍경이 재단 직원에게는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조은찬은 한껏 으스대며 말했다.
“조카 온몸에 피멍이 들었는데 그깟 징계 아무리 때려도 싱겁지.”
“설마 너 걔 패기라도 했어?”
“미쳤니.”
“그럼 뭐야.”
“세 치 혀로 몇 마디 참교육 좀 해줬지. 오럴 에듀케이션. 그렇게 해주니까 눈물 짜고 오줌 지리고, 볼 만했지.”
“뭐라고 했는데.”
조은찬은 대찬의 귀에다 대고 했던 말을 다시 속닥거렸다.
그러자 대찬은 경악했다.
“뭐? 너는 그게 애한테 할 소리냐?”
“애한테 할 소리는 아니지. 근데 성질 흉악한 놈한테는 할 소리지.”
“너도 참 너다.”
“나는 나지, 그럼. 내가 너 같이 점잔이나 빼는 선비인 줄 알았어?”
대찬은 어이가 없다는 듯 조은찬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 점 부끄럼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고 질린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무실을 나서던 대찬은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힌 듯 뒤를 돌아 조은찬을 바라봤다.
조은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게 물었다.
“어쩌라고?”
“허, 참 나.”
대찬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사무실을 나섰다.
조은찬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를 따라 나와 서화진의 등하굣길에 사람을 붙이라고 닦달했다.
대찬은 난색을 표했다.
“화진이가 싫다잖아. 어울릴 화! 먼지 진! 먼지랑 어울릴 운명이라고.”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하네. 폭행 저지른 새끼도 기사가 잘만 모시고 다니는데, 당한 놈은 고상한 척하느라고 그러지도 못하냐?”
“저지른 놈은 켕기는 게 많으니까 그런 거지.”
조은찬은 대찬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우리 화진이도 보호받을 가치가 있어. 다른 놈이 만만하게 보고 건들지 못하게 해야 될 거 아냐. 너는 일을 이만큼 저질러놓고 책임감도 못 느끼냐?”
“아주 잘난 당숙어르신 납셨네.”
“잘났지. 외삼촌보단 외당숙이지.”
“그렇게 잘났으면 네 돈으로 등하굣길 모셔. 왜 나한테 성화야?”
“내 연봉하고 네 연봉하고 비교가 되냐? 돈도 많은 게 왜 이렇게 짜게 굴어. 네 돈으로 해. 티도 안 나겠다, 야. 아님 내 돈으로 기사 고용할 테니 연봉 인상해주든가.”
“싫은데?”
“너 진짜 이따위로 나올 거야? 직장상사라고 갑질 할래?”
“그러게 누가 번듯한 직장에서 비리나 저지르래?”
“썅!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결국 논의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못하고, 누가 잘났네 하는 애만도 못한 유치한 어른싸움으로 바뀌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운전기사 붙일게. 그럼으로써 우리 소중한 조카의 안전한 등하굣길을 보장하겠습니다. 됐냐?”
“진작 그럴 것이지.”
결국 대찬은 조은찬의 주장에 굴복했다.
무슨 운전기사냐며 항의하는 서화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서화진은 차로 등교해서 차로 하교했다.
대찬이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생활로 좌충우돌하던 때에도 로튼 프룻츠는 끝없이 확장했다.
로튼 프룻츠와 그 산하에서 활동하는 해외의 비도축육 계열사들, 그러니까 사우디를 시작으로 중동시장을 개척한 알에프셀, 북중미시장을 담당하는 그린블러드, 그리고 일본시장을 준비하는 코테츠 키친까지.
모두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이제 비도축육 분야에 한정하면 국내시장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5% 미만으로 떨어졌다.
따라서 해외영업본부장인 정덕춘 이사의 소임도 더욱 막중해졌다.
대찬은 그녀를 포함해 국내영업본부장인 남인수 이사, 경영지원본부장인 추승호 이사를 모두 승진시켰다.
남인수 이사와 추승호 이사는 직급이 몇 계단이나 올라 부사장이 되었다.
정덕춘 이사의 보직인 해외영업본부장은 그 중요도를 감안하여, 그들보다 한 계단 높은 사장급으로 조정되었다.
정덕춘 본부장은 좋으면서도 괜히 대찬에게 심술을 부렸다.
“직급 인플레가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명색이 본사 2인자인데 언제까지 이사 직함에 눌러 앉힐 수는 없잖아요.”
“사장급은 처음이라 두근두근하네요.”
“얼굴이나 좀 빨개지면서 그런 말씀을 하셔야 진정성이 느껴지죠.”
“오늘 화장이 좀 짙게 됐나 보네. 지금 얼굴이 터질 지경인데.”
“어련하실까요.”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정덕춘 본부장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대찬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농담을 오래 주고받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네덜란드와 이스라엘에서도 초기 형태의 비도축육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습니다.”
“네, 그럴 때도 됐죠. 그쪽도 연구 시작한 지 오래 됐으니까.”
정덕춘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이 길을 걸어가면 그중에 한 명은 꼭 스승이 있다고 했죠. 나보다 나은 사람한테는 나은 것을 배우고, 못한 사람한테는 못한 걸 배우고.”
“후발주자들은 더 나은 건 우리한테서 배우고 더 못한 건 그린블러드와 코테츠 키친에게서 배우겠죠.”
“맞습니다. 그린블러드가 우리와 대등한 기술력을 확보했다고 착각해서 무리한 투자를 감행했다가 망한 걸 봤으니.”
“도광양회(韜光養晦), 밖으로 내세우지 않고 천천히 힘을 기르려 하겠죠.”
“맞습니다. 우리도 마냥 오만하게 굴지만 말고 기술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은오영하고 다르샨을 더 갈구란 말씀이시군요. 그건 제가 전문이죠.”
대찬은 가볍게 받아쳤지만 말은 무겁게 받아들였다.
언제까지 전 세계 시장을 독점할 수는 없다.
그런 각오는 항상 하고 있었다.
정덕춘 본부장은 대찬의 말에 공감하며 덧붙였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시장 장악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경쟁자들이 끼어들 틈을 내주지 말아야 해요.”
“전 세계 시장에 우리 회사의 인프라를 튼튼히 구축해야겠죠. 그건 아주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고요.”
“신규 시장에 진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충분한 인구와 경제력을 갖춘 나라 중에 아직 우리가 진출하지 않은 곳이 있습니까?”
“제법 됩니다. 그중에 일단 쿠바 측에서 신규 설비에 대한 요청이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쿠바 무역부로부터 직접 들어와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덜 발달한 나라일수록 우리가 진입하기는 수월하죠.”
로튼 프룻츠가 세계 시장에 발을 들인 계기는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계약이 결정적이었다.
중국과 사우디 모두 정치권력이 복잡하게 맞물린 이해관계 위에 군림하는 나라였다.
중국의 국가주석, 사우디의 왕세자는 로튼 프룻츠가 쉽게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북한과 더불어 공산주의가 가장 깊게 뿌리 내린 쿠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쿠바를 통치했던 피델 카스트로는 그 자신이 곧 쿠바 그 자체였다.
그가 죽고, 그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가 집권했다.
라울은 형인 피델과는 달리 개혁개방에 열의가 있었다.
그는 형처럼 장기집권하지 않고, 권력을 혈육이 아닌 이에게 넘겨주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쿠바의 정치권력은 권위적이었다.
그런 권위적인 쿠바 정부가 직접 요청을 했다면, 로튼 프룻츠의 진출은 용이할 것이었다.
정덕춘 본부장은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쿠바는 대외무역이 크게 발달한 나라가 아님에도 자국에서 소비되는 식량의 8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비도축육 설비를 구축해서 식량자급률을 높이겠다.”
“네, 그게 쿠바 정부의 의도입니다.”
“우리도 거부할 이유는 없어요. 쿠바라면 부유한 나라는 아니어도 잠재력이 있는 시장이고, 인구도 적지 않으니까.”
“회장님과 죽고 못 사는 관계인 아이티보다는 훨씬 유익한 친구가 될 겁니다.”
“꼭 그렇게 꼬집어야 속이 시원하세요?”
정덕춘 본부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시원—합니다.”
“참 나. 알겠어요. 쿠바시장 진출 건은 본부장님께 전권 위임할 테니 잘 처리해주세요.”
“그런데 쿠바 정부에서 조건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조건이라니요.”
“그린블러드가 아니라 RF 미트가 진출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북중미 시장은 본사 격인 RF 미트가 아니라 그린블러드가 책임지고 있었다.
쿠바 역시 아이티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섬나라다.
만약 쿠바 시장에 진출한다면 RF 미트가 아니라 그린블러드의 이름이 될 것이었다.
쿠바는 협상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일단 그것만은 안 된다고 하고 있었다.
“아?”
“그린블러드의 실질적인 주인은 우리지만, 그린블러드는 엄연한 미국 기업이니까요.”
“아.”
쿠바와 미국은 오랜 앙숙이다.
다시 외교관계를 수립하긴 했다지만 그 뿌리 깊은 반감은 여전히 유효했다.
미국은 쿠바의 경제를 한때 장악했고, 쿠바를 떡 주무르듯 주무르는 미국을 쫓아내고 세워진 게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공산당이었다.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겠다고 나서서 세계가 3차 대전의 위기에 처했던 것도 유명한 사건.
미국 CIA는 피델 카스트로의 암살을 638번 시도했다가 전부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리 명목상이라지만 미국 기업인 그린블러드가 쿠바의 식탁을 책임지는 건 받아들이기 껄끄러운 일이었다.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 아니니까 그렇게 하죠.”
“아, 그리고 디아스카넬 대통령이 회장님과 회담을 하고 싶다고…….”
대찬은 미소를 띠었다.
“국민의 식생활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위대한 수령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정치적 목적이겠죠.”
“선전과 선동을 빼면 공산당이 아니죠. 우리도 그 덕을 보는 게 있으니 보조 맞춰줘서 나쁠 건 없겠습니다.”
“그럼…….”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쿠바 정부하고 일정 잡아주세요. 디아스카넬 대통령하고 회담하겠습니다. 쿠바는 오랜만이네요. 필래 과장인가 차장 시절에 출장 차 가고 못 갔었는데.”
대찬은 일정이 잡히자마자 쿠바로 떠났다.
어차피 사진 찍어주러 가는 길이다.
세부사항은 실무자급에서 진행될 거고, 큰 그림만 짜면 된다.
큰 그림이야 대찬의 머릿속에 있으니 거추장스럽게 대인원을 동원할 필요는 없었다.
오랜 출장 메이트 김산호도 대동하지 않았다.
마강국 하나면 충분했다.
대찬은 마강국 하나만 대동하고 쿠바로 떠났다.
쿠바는 무역부의 고위관계자를 공항으로 파견해 대찬을 맞이했다.
이름이 카를로스라고 했다.
대찬은 그와 악수를 나누고 바로 카리브해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스위트룸에 여장을 풀었다.
카를로스는 웃으며 싹싹하게 말했다.
“숙소가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전망이 아주 좋네요.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직통전화로 연락을 주시면 되겠습니다.”
카를로스는 친절하게 말하며 대찬에게 명함을 건넸다.
대찬은 웃으며 그 명함을 받았다.
“파격적으로 대우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당연히 이 정도는 대우를 해드리는 게 맞지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이건 우호의 증표로 대통령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겁니다.”
“우호의 증표라뇨.”
카를로스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대찬에게 주었다.
쪽지 정도 크기로 직사각형의 물건이었다.
재질은 철인지 알루미늄인지 알 수는 없지만 플라스틱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 물건의 표면에는 쿠바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무어라 쓰여 있었다.
카를로스가 설명해주었다.
“이게 회장님께서 쿠바에 체류하시는 기간에 무제한의 편의를 제공할 겁니다.”
“이게 도대체 뭔데 그런 대단한 효험이 있습니까?”
카를로스는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