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39화
그러자 경맹 부회장 자리에 앉아있던 15위, 두천그룹의 대표로 나온 임원이 일어나 자기 자리를 내주었다.
“조 회장님, 괜찮으시면 여기 앉으시죠.”
“그럼 두천은…….”
“너무 시끄러워서 나가려던 참입니다.”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좌우에 앉은 부회장들에게 물었다.
“제가 주제넘게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
“…앉아도 되는 게 아니라 앉으셔야 될 것 같습니다. 조대찬 회장님이 지금 뜨거운 감자라.”
“실례하겠습니다.”
대찬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앉으려는 찰나.
박 회장이 먹잇감을 발견했다.
박 회장이 미워하는 정도로 따지자면 대찬이 서원웅의 열 곱절은 되었다.
“이, 이, 이, 이, 이 개새끼. 개새끼! 개잡새끼!”
안 그래도 진즉에 정신이 탈출한 박 회장은 대찬을 보고 아예 눈도 돌고 꼭지도 돌아버렸다.
박 회장은 겅중거리는 걸음으로 대찬에게 뛰어들었다.
“아유, 박 회장님. 화가 많이 나셨네. 아님 낮술 하셨나.”
대찬은 여유롭게 웃으며 늙어 느린 주먹을 가뿐하게 피했다.
“이, 이 개잡놈의 새끼. 족보도 없는 새끼.”
“족보는 없죠. 당신처럼 아빠 회사 물려받은 게 아니니까. 그래도 내가 당신보다는 나아요.”
“뭐, 뭐어?”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고, 우리 박 회장님은 유에서 무를 창조했고. 금오그룹 재계순위가 박 회장님 때 6위에서 60위로 미끄러졌죠?”
“이 개새끼가!”
“내가 왜 개새끼예요. 난 족보도 없다며. 개새끼는 개족보 물려받을 당신 아들, 손자가 개새끼지.”
“이 새끼가……!”
“그래도 알아듣는 귀는 있으시네요. 정정해주니까 바로 개 자는 빼주시네.”
대찬은 출입문 쪽에 서 있는 경호원들을 바라보며 박 회장을 가리켰다.
이 늙은이가 날 잡아 패려고 하니 빨리 치우라는 제스처였다.
경맹은 과연 이름답게 경호원들도 일의 순서를 재계서열대로 처리했다.
어느덧 재계서열 탑텐을 바라보는 회장의 제스처가 재계서열 60위의 분노보다 우선했다.
경호원이 우르르 달려들어 박 회장을 가뿐하게 떼어냈다.
대찬은 훅 한숨을 뱉고 착석한 회원사 대표들을 향해 말했다.
“저로 인해 뜻하지 않은 소란이 벌어진 점,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저에게는 재계 선배님들인데 못 미더운 후배가 폐를 끼쳤습니다.”
그는 깊이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 말을 이었다.
“들어오면서 들었는데, 두 가지 안건이 올라온 것 같습니다. 경영자총연맹 서원웅 부회장에 대한 제명안과 박구삼 부회장에 대한 제명안. 소란은 정리되었으니 총회를 속개했으면 합니다.”
그러자 재계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삼라그룹의 대표가 말했다.
“조 회장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얼른 속개하시죠. 다들 오후 일정 빡빡하실 텐데.”
의장은 삼라의 말에 껌뻑 죽었다.
“아, 예. 그럼 회의 속개하겠습니다.”
삼라그룹의 대표는 덧붙여 말했다.
“다들 시간 많지 않으니 거추장스러운 방식 대신 거수로 합시다.”
“예예, 거수로 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서원웅 부회장을 경맹 회원명부에서 제명하는 안에 찬성하시는 회원께서는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물음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금오그룹 박 회장만 경호원의 억센 아귀힘을 뚫고 한쪽 팔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회원 한 분을 제외한 전원이 반대하였으므로 서원웅 부회장의 제명안건은 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의장은 의사봉을 두드리고 말을 이었다.
“다음, 박구삼 부회장에 대한 제명안건을 상정합니다. 박구삼 부회장의 제명에 찬성하시는 분은 거수해주십시오.”
그 말에 전원이 손을 들었다.
박 회장은 멍한 시선으로 싱크로나이즈 선수처럼 일제히 같은 동작을 취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우두망찰했다.
의장은 냉정하게 선언했다.
“회원 한 분을 제외한 전원의 찬성으로, 박구삼 부회장의 제명안건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의사봉이 두드려졌다.
의장은 박 회장을 흘끗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오늘 한국경영자총연맹의 정기총회를 마치겠습니다. 폐회를 선언합니다.”
땅.
금오그룹은 수십 년간 몸담았던 경맹에서 제명되었다.
그의 제명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경맹 정기총회가 열리기 전.
서원웅은 안면이 있는 재계의 총수들과 전화 통화를 나누었다.
재계 5위의 필래그룹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총수들은 끊지 않았다.
서청규 사장의 필래유통이 떨어져 나가고 로튼 프룻츠가 비바체를 인수했어도, 여전히 필래는 유통업계의 공룡이었다.
유통업계는 만물을 사고 팔았으니, 필래와 이해관계로 얽히지 않은 기업은 없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서원웅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정기총회에서 금오 박 회장님 말씀입니다. 본인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우리를…….”
서원웅은 재계 1위 삼라부터 재계 20위 HCD그룹까지 전화를 돌렸다.
총수가 총수에게 직접 부탁을 하니 약발이 잘 먹혔다.
그렇지 않아도 재계 총수들은 금오그룹 박 회장의 추태에 영 못마땅한 상황이었다.
한때 열 손가락 안에 꼽히던 기업의 총수가 모양 빠지게 난타당하는 꼴이 영 불편했다.
동질감으로 지켜줄 가치도 딱히 없었다.
추락에 추락을 거듭한 금오그룹은 대기업 간판도 반납하고 중견기업으로 주저앉은 상태.
옛날의 영광에 취해, 많은 나이만 믿고 은근히 자기들과 같은 대열에 들려는 박 회장이 영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필래냐, 금오냐.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했을 때 총수들은 고민할 것도 없이 전자를 택했다.
특히 필래의 뒤에는 생략된 친구가 있었다.
괄호 열고 로튼 프룻츠, 괄호 닫고.
이미 그렇게 합의한 상황에서 박 회장이 서원웅의 제명을 운운하고 나섰으니 그들이 듣기에 개그콘서트보다 재밌었다.
금오그룹은 경맹에서도 제명되면서 완전히 버려졌다.
극동이 파도를 띄우고, 최재한이 조지고, 경맹에서 마무리되었다.
박 회장은 완전히 찢기고 발겼다.
언론도, 정치권도, 재계도 내팽개친 박 회장은 연약한 노인에 불과했다.
모든 상황이 정리된 상태에서, 교육부는 송완초등학교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에 착수한다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모든 결과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도식품 사장의 아들 박성훈과 금오그룹 회장의 손자 박인우는 사안의 중대성, 거기에 결과를 예의주시하는 여론을 고려하여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그리고 ‘부득이하게’에 대한 기준은 누구나 다르겠지만, 그런 소지를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는 박동훈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박동훈은 서화진에게 다가와 펑펑 울면서 말했다.
“화진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 진짜 그러면 안 됐는데…….”
서화진은 복잡한 시선으로 박동훈을 바라봤다.
서화진은 어른스러웠다.
어른스럽다는 말은, 어른이 아닌데 어른 같은 속성이 다소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어른스럽다는 말은 본바탕은 아이라는 걸 강조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어디까지나 ‘애’일 뿐인 서화진은 박동훈을 쉽게 용서하지 못했다.
그에게 목이 졸리던 순간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서화진은 울음기를 꿀꺽 목 뒤로 삼키고 박동훈의 손을 잡았다.
“박동훈.”
“응…….”
“나하고 약속 하나만 해주라.”
“약속?”
서화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터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땐 다른 선택을 해줘.”
“그럴게. 진짜 그럴게. 미안해, 화진아.”
서화진은 방긋 웃으면서 박동훈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응, 친하게.”
서화진은 어른스러웠다.
여론의 지탄을 이기지 못한 금오그룹 박구삼 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불민한 저에게 회초리를 내려쳐주십시오…….”
박 회장은 회장직을 내려놓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를 움직인 건 여론이 아니라, 금오그룹 계열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대주주들의 입김이었다.
회장직을 내려놓고 아들에게 물려주겠다고 해봤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 아들의 아들이 폭행 가해자였으니까.
결국 박 회장은 대주주들의 등쌀에 못 이겨 금오그룹을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리겠다고 선언했다.
로튼 프룻츠는 경맹에서 퇴출된 금오그룹의 빈자리를 차지했다.
대찬의 직함에 한국경영자총연맹 부회장이란 말이 추가되었다.
대찬은 그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더 손볼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조대찬, 이 쪼다 같은 놈.”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런 대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다.
조은찬이었다.
그는 잔뜩 심술 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박구삼 회장이 애 팼어? 애를 팬 건 결국 애야. 가혹한 처벌이라고 해봤자 화진이 온몸에 퍼진 피멍에 비할 수가 있어? 평생 안고 갈 트라우마에 비할 수 있냐고.”
그는 볼펜으로 애먼 책상만 쾅쾅 두드렸다.
대찬이 큰맘 먹고 사준 책상에 볼펜 때문에 팬 자국이 생겼다.
“그 사탄의 자식들한테 피멍은 아니더라도 트라우마는 똑같이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옆자리의 직원이 불안한 시선으로 조은찬을 바라봤다.
“차장님, 어디 가세요?”
“나 땡땡이 좀 치렵니다. 월급 까려면 까고, 정직 때리려면, 때리시든지.”
조은찬은 외투를 입고 뚜벅뚜벅 사무실 밖을 나섰다.
어차피 업무에 큰 도움은 안 되는 조은찬이기에, 옆자리의 직원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조은찬은 흥읍에서 서울까지 분노의 질주를 했다.
과속단속카메라에 여러 번 걸려 과태료 폭탄이 예정되었다.
행선지는 청담동 송완초등학교.
그는 교문 앞에 차를 세워놓고 하교시간을 기다렸다.
학교의 그날 마지막 종소리가 울리고.
초등학생들이 교문을 우르르 빠져 나왔다.
높으신 분들의 자제가 많이 다니는 학교라, 학생들을 모시러 나온 기사들이 제법 되었다.
아무리 쪼그라진 금오그룹이라지만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어린 손자를 위해 차 한 대, 기사 한 명쯤 붙여줄 여력은 충분히 되었다.
조은찬의 목표는 단 하나.
금오그룹이 보낸 기사보다 그 녀석, 박인우를 먼저 찾아내는 것이었다.
‘사진은 보고 또 보고, 우리 엄마 얼굴보다 더 익숙해질 정도로 봤으니까.’
조은찬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학생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 실핏줄이 곤두섰다.
‘찾았다.’
그는 축 처진 모습으로 터벅터벅 교문을 나서는 녀석을 발견했다.
그는 잰걸음으로 다가가 녀석의 어깨를 턱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 주변에 시달린 박인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아저씨 뭐야.”
“보자마자 반말부터 자동으로 나오는 거 보니까 네 놈이 맞구나.”
“…뭐라고요?”
“너 참 피부 깨끗하게 예쁘다.”
조은찬의 말에 박인우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뭐, 뭔데요.”
“내 조카는 온몸에 피멍이 표범무늬처럼 났는데. 너는 아주 새하얗고 예쁘다.”
“…서화진 때문에 이래요, 지금?”
“네 더러운 아가리에 올릴 이름이 아니지, 그 이름이. 응?”
“뭐야, 진짜…….”
박인우는 불만스러운 듯 꿍얼거렸다.
그때 조은찬의 뒤통수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감지했다.
박인우의 기사가 분명했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조은찬의 직성이 덜 풀렸다.
‘어쩌지, 더 지랄해줘야 되는데. 아주 개지랄을 해줘야 되는데.’
그는 초조한 듯 발을 구르다가 박인우의 어깨를 꽉 붙들고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박인우에게 접촉한 수상한 사람을 본 기사는 후다닥 뛰어갔다.
조은찬은 그를 흘끗 보고 입술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조은찬은 기사가 당도하기 직전에 유유히 사라졌다.
기사는 박인우를 붙들며 물었다.
“인우야, 괜찮아?”
“큽… 크흐윽…….”
박인우의 눈두덩에 뜨거운 물이 고였다.
이내 고인 물은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사는 화들짝 놀랐다.
“인우야! 왜 그래!”
“저, 저 아저씨가… 흐읍…….”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아랫도리에서도 줄줄줄 물이 흘러나왔다.
아랫도리에서 흐르는 물은 아랫도리를 적시는 것도 모자라 디디고 선 땅에 고였다.
박인우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저 아저씨가… 흐어어아앙.”
박인우는 정말 애처럼 펑펑 울기 시작했다.
기사는 당황해서 눈물을 닦아줘야 할지 아랫도리를 닦아줘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그를 들쳐 메고 후다닥 차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