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38화
“금오그룹 측에서는 조 회장님이 사적 권력을 남용해서 극동일보와 최재한 의원을 움직였다고 주장하는데요.”
“극동일보의 보도, 금오그룹 박 회장님의 증인출석 모두 제 요청에 의해 이뤄진 일이 맞습니다. 그런데 사적 권력 남용이요? 사적 권력은 그렇다 치고 남용은 맞습니까?”
“개인의 민원을 거대언론과 한 명 한 명이 헌법기관이나 다름없는 국회의원이 나서서 들어주는 건 남용이라고 볼 소지가…….”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체 없이 대답했다.
“개인의 민원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재벌 회장 할아버지 믿고 서슴없이 친구를 목 조르는 아이. 그걸 은폐하려는 학교. 이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교육당국. 어물쩍 넘어가려는 금오그룹. 이게 개인의 민원 정도로 생각할 규모의 사건일까요?”
“하지만 다른 많은 학교폭력 사건들은 송완초 사건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건이 더더욱 올바른 방향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힘깨나 있다는 사람의 친족이 당했는데도 시정되지 못한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학생들과 학부모가 피눈물을 흘리겠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당장 이 사건만 놓고 보면 서 모 군이 특혜를 받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특혜라.”
“특혜라는 말이 불편하시다면 특별대우라는 말로 정정하겠습니다.”
“정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조카는 아직 어떤 처분도 받지 못했을뿐더러, 사건이 올바로 해결돼도 그건 정당한 결론을 얻은 것이지 특별대우를 받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네, 부당한 눈물을 흘린 학생들, 그리고 앞으로 흘릴 학생들. 저는 그 학생들을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고, 아는 만큼 보이더군요.”
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참을성 있게 대찬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일을 계기로 학교폭력 피해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구체적인 방안은요?”
“조윤재단을 통해 학교폭력 피해학생들에 대한 치료와 심리상담, 무료 법률지원을 포함하여 오랜 치유과정에서 보탬이 될 프로그램을 마련하겠습니다. 이 지원 사업은 오롯이 제 사비로 충당하겠습니다. 구체적인 액수를 말씀드려야 할까요. 최소 연간 200억 규모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소입니다.”
“…….”
대찬의 말이 기자의 입을 다물게 했다.
대찬은 내친김에 말을 이었다.
“돈으로 땜질한다고 비판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00억은 돈 좀 벌었다는 저한테도 조금 곤란한 상황 모면하기 위해 쓰기에는 너무 큰돈입니다.”
“아, 예… 큰돈이죠.”
200억이란 말에 기자들도 입을 다물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기자들에게 말했다.
“기자 여러분께서도 모쪼록 이런 사건들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재벌 회장이나 되니까 이런 사건 언론에서 다뤄준다는 얘기가 안 나오게요.”
“…….”
박 회장의 회심의 일격은 200억으로 방어되었다.
박 회장은 길길이 날뛰었다.
“제깟 놈이 돈 좀 번다고 유세란 유세는 다 떠는구나! 어린 것이 영악해서는……!”
그의 축 처진 턱살이 부르르 떨렸다.
이 화를 해소하지 못하면 화병이 생겨 수명이 줄 것만 같았다.
박 회장은 어떻게든 대찬을 코너로 몰고 싶었다.
금오그룹은 몰락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과거에 비해 약해졌다.
그러나 예전의 명성은 그래도 쥐고 있었다.
전경련이 재계의 대표기관이라는 이름이 유명무실해진 이후.
경영자총연맹, 줄임말로 경맹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금오그룹 박 회장은 그 경맹의 부회장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경맹을 포섭하여 대찬을 압박하고자 했다.
경맹 정기총회에서 그는 마이크를 붙들고 읍소했다.
이 자리에서 박 회장은 휠체어에 앉지도, 목과 얼굴을 목도리로 둘둘 말지도 않았다.
목소리는 쩌렁쩌렁 기력이 느껴졌다.
“최근 사소한 일이 특정 세력에 의해 짜깁기되고 부풀려져 많은 분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린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경맹의 정기총회에는 굴지의 기업들이 참석했다.
대기업 오너가 직접 참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각 대기업을 대표하는 얼굴들은 오너의 심복 내지는 최측근으로 꼽히는 자들.
그러니 실질적으로는 대기업의 총수들이 참석한 것에 버금갔다.
정기총회에 참석한 대기업 중에 총수가 직접 참석한 기업은 딱 한 곳이었다.
필래의 서원웅.
그는 대찬과 가까운 입장으로서, 사건의 당사자인 박 회장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현장에서 보기 위해 정해진 일정을 취소하고 정기총회에 직접 참석했다.
금오그룹 박 회장은 그들에게 인정으로 호소했다.
“최근의 사건은 특정 세력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저지른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그는 양손으로 단상을 꽉 붙든 채 열변을 토했다.
“로튼 프룻츠, 그리고 설립자인 조대찬 회장은 재계의 돈키호테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박 회장은 바로 대찬을 공격했다.
“조대찬 회장은 재계의 일관된 입장과는 아예 딴판으로 행동하는 자입니다.”
역시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언행에 서원웅은 지루해져 턱을 괬다.
“로튼 프룻츠의 행보를 보십시오. 임금정상화라는 구실로 인건비를 지나치게 책정해 경영계의 고민을 깊게 만들고. 상생경영이니 어쩌니 하는 소리로 원청과 하청의 상하질서를 흔들고. 대통령이 중국 가자고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서 경영인의 채신머리를 땅바닥에 처박고. 아이티에서는 원가에 근접한 액수를 정가로 책정하여 고기를 거의 무상배급하다시피 합니다.”
박 회장은 꿀꺽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말이야 꿀 같은 말이죠. 우리도 우물에서 돈을 푸는 수준으로 벌면 무슨 선행을 못하겠습니까? 쉽게 번 돈으로 예수님, 부처님처럼 생색내는 건 아주 쉽습니다. 나 같아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 회장의 말은 점점 더 빨라졌다.
“하지만 세상살이 어디 그렇게 쉽답니까? 우리는 산업계의 최전선에서 이를 악물고 싸우고 있어요. 다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몇 조를 굴린다고 해서 씀씀이 헤프게 가져갈 입장이 아니란 거. 로튼 프룻츠 조 회장 저 인간 때문에 우리의 사투, 분투, 혈투가 한낱 물욕으로 비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 회장 저 인간? 슬슬 성질 나오시네.’
서원웅은 피식 웃었다.
“그 인간의 진면목은 이번에도 드러났습니다. 자기가 조금 궁지에 몰리니까 바로 연 200억을 들먹이며 자긴 날개 없는 천사라고 역겨운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습니까?”
총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경청하는 체해도 속으로는 모두 딴생각을 품었다.
그들의 귀에는 그저 노인네 신세한탄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박 회장도 그런 기류를 인식했는지 발언의 수위를 높였다.
“이건 조대찬을 내세워 경영계를 손보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수작이 분명합니다. 지금은 나처럼 힘없는 늙은이가 당하지만, 언제 그 칼날이 여기 계신 여러분을 향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박 회장은 주먹을 휘휘 저으며 웅변조로 말했다.
“이 늙은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건 경영계를 뒤흔들려는 보이지 않는 손의 흉계입니다. 시류에 아첨하는 젊은 재벌과 묵묵히 이 나라의 경제와 산업을 위해 일하는 기성 재벌 간의 주도권 다툼입니다. 부디 이 늙은이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 힘을 모아주십시오!”
박 회장은 그렇게 열변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에 대한 반응은 간헐적이고 무성의한 박수 몇 번이 전부였다.
사회자는 박 회장에게 예의상 인사를 던졌다.
“금오그룹 박 회장님, 감사합니다. 발언을 신청해주신 회원이 한 분 더 계셔서 모시겠습니다. 우리 경맹의 부회장 중 한 분이신 서원웅 필래그룹 회장이십니다.”
단상으로 올라가는 서원웅에게 호응하는 박수는, 박 회장의 연설 클라이맥스에 터졌던 것보다 컸다.
박 회장은 뚱한 얼굴로 날렵한 걸음으로 단상을 향하는 서원웅을 바라봤다.
단상에 올라선 서원웅 역시 박 회장을 흘끔 보고 마이크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안녕하십니까, 경맹 부회장 서원웅입니다. 많은 재계 선배님들이 참석하신 가운데, 제 발언으로 선배님들의 귀한 시간을 지나치게 많이 뺏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최대한 빨리 발언하고 빨리 내려오겠습니다.”
싹싹한 말에 참석자들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선 금오 박 회장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 심정에는 저도 동감합니다. 금쪽같은 손자가 언론의 십자포화를 받는 일, 당연히 가슴 아프실 겁니다.”
‘저놈이 웬일로…….’
내 연설에 감화되어 죽마고우를 버리고 재벌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그러는구나.
박 회장이 품은 제멋대로의 희망사항을, 서원웅은 바로 폐기했다.
“그러나 심정에는 동감하되 취지에는 동감하지 못하겠습니다.”
‘되바라진 놈!’
“드러난 정황으로 보았을 때, 박 군의 폭행, 학교 측의 은폐, 박 회장님의 거짓말. 모두 사실로 판명되었습니다.”
“저, 저놈이……!”
박 회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죄를 지으면 죗값을 치르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박 회장님께서는 본인에게 닥친 악재를 해소하고자 우리 재계 전체를 끌어들이려 하고 계십니다.”
“이봐요, 서 회장!”
마이크가 없는 박 회장의 말은 서원웅에게 충분히 닿지 못했다.
그저 어항 속 금붕어가 벙긋거리는 수준.
서원웅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그 말씀이 합리적이라면 저도 기꺼이 박 회장님과 나란히 서겠지만 말씀은 언어도단이고 억지고 생떼일 뿐입니다.”
“야!”
“재계의 이익이 침해되었을 때, 우리는 단결하여 우리의 이익을 방어해냅니다. 지금 박 회장님께 닥친 고난은 개인의 고난일 뿐, 재계의 고난이 아닙니다. 재계의 이익은 침해받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개인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모두에게 고난을 짐 지우려는 박 회장님의 시도가 우리의 이익을 침해합니다.”
서원웅은 빠른 박자로 말을 쏟아냈다.
“이에 저는 경맹 정관에 명시된 부회장의 권한으로 제안 드립니다. 재계의 이익을 침해하려 한 박 회장님의 경맹 부회장직을 박탈하고, 경맹의 회원명부에서 제명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단결하여 우리의 이익을 방어해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저런 오만방자한……! 야! 나는 네 애비 서청수가 경맹, 그 이전 전경련에 가입하기 전부터 경맹과 전경련의 간부였어! 감히 누가 누굴……!”
서원웅은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 주눅이 드는 소심한 속성은 진즉에 벗어던진 상태였다.
“이것으로 제 발언을 마치겠습니다. 정기총회 의장께서는 제 제안을 정식 안건으로 상정해주시고, 표결에 들어갈 것을 요청합니다.”
박 회장은 자리를 박차고 단상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서원웅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나 역시 경맹 정관에 명시된 부회장의 권한으로 제안하지요. 조대찬의 절친한 친구로서 친구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재계의 단결을 흩뜨리려는 시도야말로 재계의 이익을 침해하는 바, 나는 필래 서원웅을 경맹 회원명부에서 제명할 것을 제안합니다!”
고성이 오가는 사이.
대찬이 올라탄 차가 경영자총연맹 정기총회가 열리고 있던 호텔 앞에 멈춰 섰다.
대찬은 내릴 채비를 하며 운전석에 앉은 마강국에게 말했다.
“지금 서원웅이 전례 없이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고 있대.”
“그래? 나도 빨리 주차하고 들어가서 볼래.”
“어허, 어딜. 우리 강국이는 저기 가서 뼈해장국이나 한 사발 하고 와.”
대찬은 마강국에게 오만 원 권 한 장을 찔러주고 차에서 내렸다.
마강국은 멀어져가는 대찬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뼈해장국? 감자탕 대 자 시켜서 혼자 다 먹을 거다. 나쁜 새끼.”
대찬은 탁, 외투를 올바르게 매만지고 정기총회가 열리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대찬이 모습을 드러내자 정기총회가 열리는 연회장 앞에 서 있던 경맹 직원들의 시선이 쏠렸다.
“내가 서원웅 네 새끼 목 먼저 날리고 그다음에는 조대찬이도 날려버릴 거야, 알아!”
박 회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닫힌 문틈을 뚫고 대찬의 귀에도 박혔다.
역시 그 말을 들은 경맹 직원들은 멋쩍게 웃었다.
대찬은 웃음을 머금은 채 직원들에게 말했다.
“이전 일정이 좀 늦어지는 바람에 시간 맞춰 못 왔네요. 지금 입장 가능하시죠?”
“회, 회장님도 경맹 회원이셨습니까?”
“섭섭하게 왜 이래요. 로튼 프룻츠도 회원사예요. 일반회원이지만. 회원이면 누구나 총회 참석 자격은 있잖아요.”
“아, 그, 그러셨군요.”
경맹 직원들은 로튼 프룻츠 정도 되는 회원사는 당연히 회장단에 포함이 돼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회장단 명단에는 로튼 프룻츠나 조대찬의 이름이 없으니 당연히 경맹 회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찬은 닫힌 문을 가리키며 직원에게 물었다.
“저, 들어갑니다?”
“아, 예예, 물론이죠.”
직원은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자 박 회장의 고함이 더 적나라하게 대찬의 고막을 울렸다.
“경영계를 망치는 이 새파란 망아지 같은 놈들! 내가 다 쳐낼 거야! 어!”
거대한 문이 열리자.
박 회장의 난동에 난색을 표하던 참석자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대찬이 유유히 안으로 입장했다.
박 회장이 쏟아내는 육두문자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점입가경.
참석자들은 그의 등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서원웅 역시 놀란 눈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그는, 입 모양으로 물었다.
여길 왜 왔어.
대찬은 서원웅에게 눈웃음을 짓고 일반회원사를 위해 마련된 저 끝자리를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