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37화
어렵게 된 정도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회사가 송두리째 날아갈 수 있다.
정도식품의 전체 매출 340억에서 비바체에 납품하면서 벌어들인 80억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린다면.
그건 단순히 매출의 30%가량이 주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비바체의 물량을 소화하던 설비를 그냥 놀려야 된다.
마찬가지로 직원들 역시 놀리면서 꼬박꼬박 월급을 챙겨줘야 했다.
게다가 비바체가 정도식품을 버리면, 신뢰도가 떨어져 기존의 고객들 역시 떠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박 사장은 오래전에 고쳤다고 생각했던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 되살아났다.
허운은 차분하게 말했다.
“이 사건은 분명 비즈니스 밖의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음을 박 사장님은 잘 아실 겁니다.”
“…예.”
“제가 조언할 입장은 아니지만 참고삼으시라고 말씀 좀 드리겠습니다.”
허운은 그렇게 포장했지만, 실상은 그게 회장의 요구사항임을 박 사장이 모르지 않았다.
박 사장은 혀를 날름거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회장님께 유리하도록 사실을 날조하거나 거짓 증언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그저, 박 사장님이건 사장님 아드님이건 거짓을 말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뿐입니다.”
“그러면, 비바체와의 거래중단 같은 일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허운은 손사래를 쳤다.
“어휴, 제가 언제 거래중단의 거 자도 꺼낸 적이 있던가요? 이건 그저 노파심에 드리는 조언일 뿐입니다. 귀담아듣지 마세요.”
“아, 예…….”
허운의 말은 반대로 들으면 제대로 들은 것이었다.
그것으로 박성훈의 부친, 정도식품의 박 사장은 완전히 이쪽으로 포섭되었다.
허운이 떠나고, 그와 교대하듯 극동일보 기자가 취재 차 정도식품을 방문했다.
허운은 주차장에 대놓은 차를 빼지 않고, 기자가 나올 때까지 대기했다.
그 전언이 부하직원의 귀를 통해 박 사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피해자인 서 모 군의 어머니는 학교 측이 가해학생이 재벌가 3세라는 걸 의식해 사실을 왜곡하고 은폐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가해학생 중 한 명의 아버님으로서 동의하십니까?”
“…예, 동의합니다.”
보도가 나가고도 금오그룹은 의혹을 전면 부정하는 상태였다.
학폭위의 결론이 올바른 결론인데,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쪽에서 생떼를 쓴다고 했다.
‘한 고위 관계자’라고 자기 이름을 숨긴 금오그룹 임원은 피해자가 한몫 단단히 챙기려고 쇼를 한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는 ‘반반싸움’이 가능한 구도이기에 그랬다.
어차피 사건의 진실이야 아홉 살 무지렁이들만이 알고 있다.
작정하고 우기면 저쪽에서 증거를 내밀 방법이 없다.
그럼 싸움은 진흙탕 개싸움으로 변하고.
사실과 거짓은 어지럽게 섞여서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된다.
금오그룹은 그래서 자신 있게 배짱을 부릴 수 있었던 것.
그런데 가해학생 중 하나가 이 대열에서 이탈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박 사장의 취재를 마친 극동일보 기자는, 정도식품 사무실을 떠나면서 주차장으로 비적비적 걸어왔다.
그는 주차장에 서있는 허운의 차량을 향해 슬쩍 엄지와 검지를 말아 보여주었다.
허운은 그걸 보고 나서야 미소를 띠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박 사장은 아마 실상은 서화진이 가해자이고 박성훈이 피해자였어도, 허운이 거짓 진술을 하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회사를 망하게 하느니 눈 한번 질끈 감고 아들이 잠깐 억울한 게 나으니까.
결국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힘이었다.
물론 저쪽에서 먼저 진실을 비틀려고 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겠지만.
금오그룹이 극동일보의 보도를 부인하자마자, 극동일보는 바로 박 사장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가해학생 부친, “서 군이 피해자 맞다”…금오家 3세 혐의도 ‘인정’
박 사장이 인정하자 팽팽한 승부의 추가 갑자기 서화진 쪽으로 훅 쏠렸다.
언론이 판을 깔아주었으니 그다음은 정치인의 차례였다.
대찬의 우군은 국회에도 있었다.
마침 국정감사 기간.
최재한 의원은 금오그룹의 박 회장을 국정감사의 증인으로 출석하라고 요구했다.
극동일보에 이어 최재한까지.
물 흐르듯 이뤄지는 작업에 금오그룹 측은 당혹했다.
70세가 넘은 고령의 박 회장은 손자의 초등학교에서 날아온 뜻밖의 일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늙으면 자제심이 깊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한없이 얕아지는 사람이 있다.
박 회장은 후자에 속했다.
“이런 사소한 소동으로 회사에 누를 끼칠 수가 있어? 도대체 일들을 어떻게 하는 거야!”
금오그룹 박 회장은 임원들을 모아놓고 면박을 주었다.
회장 일가의, 그것도 아홉 살짜리 손자를 단속하는 건 임원들의 몫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항변할 수는 없기에.
임원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회장의 분노가 빨리 사그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자제심 얕은 박 회장의 분노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당신들, 책임지고 이 사건 무마시켜. 알았어? 가뜩이나 회사 분위기 안 좋은데 이런 걸로 내 얼굴에 기어코 똥칠을 해야 속들이 시원해!”
“죄송합니다, 회장님.”
“새파란 국회의원이 감히 나를 국회로 불러들여? 그 오만방자한 아가리를 만 원짜리 몇 장 물려서 다물게 하란 말이야, 알겠어!”
“옙! 회장님.”
“변변치 못한 놈들 같으니…….”
금오그룹 측은 박 회장의 건강이 좋지 못해 출석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슬쩍 뒷구멍으로는 최재한을 회유하려고 들었다.
기실 큰 정치적 이득이 걸린 일은 아니었으니 적당한 선에서 협상이 되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최재한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허튼수작 부리면 이것까지 국감에서 책임을 물을 겁니다, 아시겠어요?”
“하지만 회장님 건강이…….”
“그저께 나온 기사만 봐도 경영자총연맹 회의에 출석해서 또랑또랑하게 연설까지 하셨던데. 이틀 사이에 국감에 출석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만일 출석을 거부할 경우 형사처벌을 받을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최재한의 말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엄격했다.
금오그룹 임원들은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박 회장은 노구를 이끌고 국감장에 출석해야만 했다.
박 회장은 얼굴을 목도리로 친친 감고 휠체어에 오른 채 국회의사당을 향했다.
동정심을 이끌어보려는 수작이었는데, 최재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추문했다.
“회장님, 정 건강이 안 좋으시면 휠체어에 앉아서 대답하십시오.”
“…….”
“이번 사건에 본인이 왜 국감장까지 불려 나와야 하는지 납득이 안 되실 겁니다. 그렇죠?”
“…예.”
박 회장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학교폭력의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피해자의 보호, 치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저는 국민의 대표로서 이 사건을 어물쩍 넘길 수 없기에, 박 회장님을 출석시켜 이 사건을 제대로 따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회사 일만 하고 살았고요. 손자의 교육에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회장님의 손자인 박 군이 저런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건, 결국 회장님이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을 제공하신 분이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존경하는 최재한 의원님,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제 손자는 그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극동일보의 악의적인 보도로 손자가 많이 힘들어합니다.”
최재한은 박 회장을 흘끔 보고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신다더니 그래도 대충 상황은 알고 계신 것 같네요. 충분히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으신 것 같습니다.”
“콜록콜록…….”
박 회장은 얼굴을 감은 목도리를 부여잡고 격하게 기침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이 아까운 최재한은 질문을 던졌다.
“다른 가해학생의 부친이 사건의 전말을 모두 실토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회장님이 이를 부인하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 나이 때 애들은 치고받고 싸우며 자라는 것이지요…….”
“애들은 싸우며 자란다. 이게 싸움입니까?”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회에서 애들 싸움을 도마 위에 올리는 건 혈세 낭비 아닙니까.”
“회장님은 목 졸라 기절시키고 단체로 린치하는 걸 애들 싸움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애들이 싸운 거니 애들 싸움이지…….”
“이 사건은 단순히 애들 싸움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잔혹하고, 학교 측이 이를 은폐하려는 시도,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폭행을 저지른 학생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한 이상, 애들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의 문제가 됩니다.”
“학교 측에 문제가 있으면 교장이나 이사장을 불러 질문하는 게 온당하지 않은가요?”
“네, 그분들은 내일 오실 거고요. 일단 저는 그분들이 그런 비열한 선택을 하게 만든 회장님을 먼저 뵙고 싶었습니다.”
“허허… 그런 말씀은 지나치게 모욕적이네요…….”
“피해학생은 폭행을 당한 이후, 몸과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곳곳에 끔찍한 피멍이 들었고, 현재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단 말씀이시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학생에게 상처가 있다고 무작정 피해자라고 할 순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재조사를 해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게 먼저입니다.”
“이 사건이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어물쩍 없던 일로 하시려고요?”
“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시는 건 알겠지만, 아무 혐의도 밝혀지지 않은, 더군다나 제3자인 저를 범죄자 다루듯 하는 건 좀…….”
“교육부의 재조사가 이뤄질 겁니다. 그러나 그 전에 전말을 알고 있는, 가해자 측의 큰 어른으로서 자꾸 이렇게 뻔뻔하게 오리발만 내미실 겁니까?”
최재한은 점점 발언 강도의 수위를 높였다.
그러자 고분고분 받아치던 박 회장의 언성도 천천히 높아졌다.
다시 상기시키자면, 박 회장은 자제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뻔뻔하다니.”
“지금 이 자리에서 입장을 표명하기 어려우시면 이렇게 하죠.”
“…….”
“만일 교육부의 재조사가 이뤄진 이후, 손자의 잘못이 여실히 드러나면 그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손자가 합당한 처분을 받겠지요.”
“회장님은 별도의 책임을 안 지실 겁니까?”
“내가 왜요?”
“회장님은 방금 전에 손자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재조사 결과 잘못이 있는 걸로 나오면 이건 위증죄에 해당이 됩니다.”
그러자 박 회장은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을 쳤다.
“어딜 위증죄 운운하고 있어! 애들 문제로 이렇게 늙은이 불러다가 망신 주고, 이제는 감방에까지 처넣겠다고? 이 사람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어라, 일어나실 수 있었네요?”
“…….”
“듣기로는 거동이 많이 불편하신데 제 무리한 요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하셨다고 들었는데.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박 회장은 허겁지겁 다시 휠체어에 주저앉아 목도리를 둘둘 둘렀다.
국회에서 모욕을 당한 박 회장은 약이 바짝 올랐다.
그러던 중, 그의 부하들이 쓸 만한 정보를 올렸다.
“회장님, 알고 보니 피해학생이…….”
“누가 피해학생이야!”
“아, 피, 피해학생이라고 주장하는 녀석이 조대찬이 조카랍니다.”
박 회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야? 로튼 프룻츠 조대찬이?”
“예.”
그러자 박 회장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허! 그래서 극동하고 최재한이가 그 난리였구만? 조대찬이하고 한통속인 녀석들이?”
“맞습니다.”
“그런 주제에 무슨 강자가 약자를 짓밟은 것처럼……!”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당연하지! 바로 알려! 우리가 약자 포지션을 가져와야 돼!”
“예, 회장님.”
오랜만에 정강이가 무사한 채로 회장실은 나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원들은 즐거웠다.
금오그룹은 서화진이 대찬의 외조카라는 사실을 시끌벅적하게 광고했다.
그리고 이건 다 로튼 프룻츠의 사주를 받은 이들이 자신을 모함하려고 꾸민 일이라고 주장했다.
다소 효과는 있었다.
강자 대 약자보다, 강자 대 강자의 구도가 박 회장에게는 유리했으니까.
하지만 대단한 효과는 없었다.
서화진에게는 피멍이 있고, 그의 손자인 박인우에게는 피멍이 없었다.
이게 다 박 회장을 모함하려고 꾸민 일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려면.
대찬이 그 목적으로 외조카에게 그런 끔찍한 피멍을 안겼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져야만 했다.
하지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로튼 프룻츠와 금오그룹이 모종의 이해관계에 얽혀있다면 잠깐이라도 귀를 기울였겠지만.
두 기업 사이에는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무 연결고리가 없었다.
대찬 역시 아무 거리낌 없이 이 사실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조 회장님이 송완초 폭행사건 피해학생의 외숙부라는 말이 사실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대찬이 덤덤하게 대답하고, 기자들의 질문을 더 받아줄 자세를 취하자 기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