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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36화 (536/556)

난 할 수 있어 536화

자기가 그렇게 당한 와중에 친구를 감싸주는 서화진이 애틋했다.

“그래? 일단 정상참작. 3번 줘봐.”

“3번은 좀 세더라.”

대찬은 조은찬으로부터 가해자 3 부모의 프로필을 넘겨받았다.

“이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네.”

“응, 얼굴도 몇 번 봤을 거야.”

“봤지. 금오그룹 회장 손주일 줄은 몰랐네.”

금오그룹은 한때 열 손가락에 꼽히는 대기업이었지만 지금은 상당히 몰락해 대기업이라는 간판도 반납한 상태였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여전히 존재감은 있었다.

박3, 박인우는 금오그룹 회장의 손자였다.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렇게 과감하게 나쁜 짓을 저질렀겠지.’

대찬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조은찬이 대찬에게 말했다.

“금오그룹이라고 해봤자 이빨 빠진 호랑이잖아. 회사 규모가 우리에 비하면 5% 수준밖에 안 돼.”

대찬은 어느새 로튼 프룻츠를 ‘우리’라고 말하는 조은찬이 웃겨서 흘끗 바라봤다.

조은찬도 내심 찔렸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그냥 네가 나서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뼈를 발라버려.”

“글쎄. 이쪽은 내가 마땅히 압박할 수단이 없는데. 우리랑 엮인 사업도 아예 없고.”

“방금 전까지 불처럼 화내더니 왜 갑자기 조심스러워진 건데?”

대찬은 조은찬을 보며 웃었다.

“뼈를 발라내려면 신중해야지. 어설프게 덤비면 아까운 살점을 놓칠 수도 있으니까.”

대찬은 일단 조수진을 만나 이 일을 알렸다.

조수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한참을 울었다.

다 자기 때문이라며 여러 번 자책했다.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아는 대찬은 충분히 자책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조수진이 진정하자, 대찬은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 학교폭력자치위원회 먼저 열자고 해. 따질 거 분명하게 따지고, 숨기는 것 하나 없이 낱낱이 다 고발해.”

“난 지금까지 내가 네 누나라는 거 철저히 감췄어. 충분히 지금까지 네 덕 보면서 살아서 더 이상 너한테 부담 주기 싫어.”

대찬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마음 잘 알아.”

“그 생각은 지금도 같아. 그런데 너도 말했지만 금오 손자가 가해자에 끼어있다며.”

“응.”

“그게 우리한테 불리하게 작용할 거야. 이 학교가 그래. 그 인간들 말마따나 애들이 잠깐 실수한 거, 뒤탈 없게 무마해 주는 것도 비싼 학비에 포함돼있는 서비스로 여긴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라 그럴 거야. 그러니까 밖에서는 깍듯하고 예의 바른 척 잘하는 어린 것들이 안에서는 그렇게 망나니짓을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거야.”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나는 내가 학폭위 기간에 개입해서 좀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기를 원하겠네.”

“너한테 부담될 거란 거 알아.”

대찬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부담? 무슨 부담.”

“그래도 금오 회장은 명색이 재계 큰 어른이잖아. 괜히 삐끗하면…….”

“아휴, 내가 한두 사람하고 싸움박질했어? 금오 박 회장 정도는 잽도 안 돼.”

“그럼… 부탁해도 될까?”

“만약 누나 말대로 학폭위가 대충 뭉개고 넘어가는 쪽으로 흘러간다면, 내가 개입 안 하는 게 좋겠어.”

조수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뭐?”

“확실하게 대가를 치르게 하려면, 그게 낫겠어.”

학폭위는 순조롭게 열리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앞길은 가시밭길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신호탄은 교장으로부터 나왔다.

학폭위가 열리기 전날, 교장은 조수진을 따로 불러냈다.

“화진이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프십니까.”

“…화진이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어요.”

“예, 저도 교장으로서 아주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조수진은 교장을 흘끗 바라봤다.

“그러세요?”

“그럼요.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할 책임, 그 꼭대기에 제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어머니?”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가해자는 제가 확실하게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가해학생이 박동훈이라는 녀석인데…….”

교장의 말에 조수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교장선생님, 박동훈이라는 아이도 있지만 그걸 사주한 건 박성훈, 박인우라는 친구예요.”

“성훈이하고 인우요? 걔들이 같은 방에 있기는 했지만…….”

“우리 화진이는 박동훈 학생이 가해자지만 피해자이기도 하다고 했어요. 박성훈, 박인우 두 학생이 윽박질러서.”

교장은 안경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제가 받은 객관적인 보고서에는 그렇게 적혀있지 않습니다. 박동훈이라는 학생이 적극적으로 폭행을 했다고…….”

“틀린 내용이에요.”

“허허, 박성훈, 박인우 학생과 박동훈 학생이 사소하게 다투는데, 그 과정에서 화진이가 갑자기 성훈이, 인우에게 폭언을 했고…….”

“뭐, 뭐라고요?”

“거기에 격분한 성훈이, 인우가 화진이랑 다투기는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엄연히 쌍방과실이고… 어쨌거나 빌미는 화진이 쪽이 먼저 제공했습니다.”

“저기요, 교장 선생님.”

교장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조수진의 말을 막았다.

“어머니, 물론 자식 편을 들고 싶으신 마음 잘 압니다. 제가 어머니라도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허…….”

“하지만 객관적인 정황이 아니라 자꾸 주관적인 주장을 하시면 어머니와 화진이에게 좋을 게 하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교장 선생님 말씀이야말로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데요.”

교장은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는 듯 미동도 없이 미소만 지었다.

“아무튼 박성훈, 박인우 학생 건은 어머니께서도 안 건드리시는 게 유리할 겁니다.”

“저기요.”

“꼭 그 두 학생까지 학폭위에 올리시겠다면, 화진이 역시 가해자로서 취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교장의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내용은 냉혹했다.

“저는 박성훈, 박인우 두 학생 역시 학폭위에 올릴 겁니다.”

“네, 그 반대급부 역시 어머니와 화진의 몫이라는 걸 분명히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그러죠.”

학폭위는 졸속으로 열렸다.

그 와중에 금오그룹 회장의 손자 박인우는 소극적으로 가담했고, 오히려 서화진에게 언어폭력을 당했다는 이유로 학폭위에서 배제되었다.

그나마 학폭위에 올라간 정도식품 사장의 아들 박성훈 역시 뚜렷한 가해자가 아니라 서화진과의 쌍방 폭행으로 화해를 권유받았다.

그러나 박동훈에게는 가차 없었다.

박동훈에게는 서화진의 목을 조르고 무자비하게 폭행한 죄를 물어 15일 출석정지와 학급교체 처분이 내려졌다.

처분을 들은 박동훈의 어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조아리며 조수진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화진이 어머니. 제가 더 엄하게 가르쳤어야 했는데…….”

“…….”

조수진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를 조수진은 대찬에게 들려주었다.

대찬은 조수진을 바라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인간들이…….”

“이래도 되는 거니?”

“이러면 안 되지.”

“이젠 어떡할 거야?”

“고생 많았어, 누나. 이다음부터는 내가 책임질게. 더 마음고생 할 거 없어.”

대찬은 자신의 손으로 조수진의 손을 덮었다.

대찬의 손이 커서 넉넉하게 덮였다.

사흘 후.

극동일보 산하 종편채널, 극동TV의 9시 뉴스.

비상한 시국이라 첫 꼭지에는 대통령의 얼굴을 내보내고, 그다음 두 번째 꼭지.

서화진의 모교가 모자이크된 채 배경으로 등장했다.

“정재계 인사와 유명 연예인의 자제들이 재학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은 서울 청담동의 한 사립초등학교에서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포문을 연 극동일보는 다음날 1면에 이 사건을 실어버렸다.

신문과 방송 양쪽에서 화약 냄새를 풍겼다.

-금오家 3세, 친구 목 졸라 기절·무차별 폭행…학교 측, ‘무마’ 의혹

그 시각.

가해학생 중 한 명인 박성훈의 부친이 운영하는 정도식품 사무실.

갑자기 RF 비바체에서 사람이 나왔다.

허운이었다.

원청업체 임원이 갑자기 출동하자 정도식품에는 비상이 걸렸다.

교외 골프장에 라운딩을 나갔던 정도식품 박 사장은 급거 회사에 복귀했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원청업체의 젊은 임원에게 해사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아이고, 이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잠깐 외근 다녀오느라.”

“아닙니다. 불쑥 찾아온 제 잘못이죠.”

허운은 웃으며 박 사장과 악수를 나눴다.

박 사장은 비서에게 달랑 커피만 주면 어떡하느냐며 당장 그럴듯한 간식이라도 더 내오라고 펄쩍 뛰었다.

그러자 허운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드릴 말씀만 드리고 금방 떠날 겁니다. 그러실 거 없습니다.”

“그, 그러십니까? 하하…….”

박 사장은 웃으며 허운과 마주앉았다.

그는 허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비바체에서 갑자기 저희 회사는 왜…….”

“아, 다른 건 아니고요. 오늘 극동일보 보셨습니까?”

“극동일보요? 아뇨, 저희는 아시아일보 구독하고 있어서.”

박 사장은 뜨끔했지만, 모르는 척 되물었다.

어차피 극동이 조지는 거야 금오 손자니까.

“그러세요? 아시아일보에서도 보도한 걸로 아는데. 송완초등학교 사건 못 들으셨어요?”

“하하, 예. 일밖에 모르고 살아서.”

“그래요? 아드님이 그 학교 다니시는데도 모르신다고요?”

“예? 아…….”

“그리고 그 사건에 아드님이 직접 엮여있는데 모르신다는 건 좀… 진실되지 못하시네요?”

허운은 웃으면서 박 사장의 정곡을 찔렀다.

뜨끔한 박 사장은 이마를 긁적였다.

“아… 아아, 그 사건이 이 사건이었습니까? 제 아들은 가벼운 다툼으로 결론이 나서 사건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가벼운 다툼이 아닌데 다툼으로 결론이 나서 사건이 된 겁니다.”

박 사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 말씀을 굳이 여기서 하시는 이유가…….”

“비바체 본사에서는 현재 이 사건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가정사일 뿐입니다.”

“보도가 되지 않았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국민의 공분을 사는 이상 본사에서도 리스크로 인식할 수밖에요.”

박 사장은 난감한 듯 웃었다.

“이 일은 RF 비바체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겁니다.”

“요즘 세상 무서워요. 설마 싶어서 놔두면 그게 꼭 불거지더라고요.”

“노파심이야 이해하겠지만 안심하셔도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시겠죠.”

“우리가 비바체에 우리 회사 로고 찍어서 납품하는 것도 아니고, 비바체 로고 찍어서 납품하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아무리 할 짓 없는 국민들이 많아도 이런 것까지 집요하게 캐진 않아요.”

“하지만 본사 지침이 그러니 별수 있습니까.”

“물론 그렇지만…….”

쓸데없는 걱정 그만 관두고 제발 좀 꺼져라.

그게 박 사장의 솔직한 마음이었지만, 감히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난처한 웃음만 생글생글 지었다.

되도 않는 걸로 트집을 잡아 갑질을 한다고 생각하는 박 사장에게, 허운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사족이지만 한 가지 덧붙여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예?”

“이번 사건의 피해학생 있지 않습니까. 서 모 군.”

“예.”

“서 모 군이 저희 회장님 조카거든요.”

그 말에 박 사장은 둔기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는 뻣뻣한 혀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서 군의 어머니가 회장님의 누님이십니다.”

“그, 그런 얘기는 전혀 못 들었는데요.”

“당연히 못 들으셨겠죠. 아들이 엮인 사건이 신문 1면에 나오는 것도 모를 만큼 일에 열중하시는 분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세세하게 아셨겠어요?”

“…….”

그제야 박 사장은 왜 극동에서 총대를 메고 작정하고 이 사건을 때려대는지 인지했다.

“회장님께서 이 사건을 직접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하.”

“안 좋은 문화이긴 합니다만, 저희 같은 아랫사람들도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거든요.”

“아, 예…….”

머리가 복잡해진 박 사장은 이마 긁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는 이미 내막을 파악하고 있었다.

교장, 그리고 박인우의 학부모인 금오그룹 2세와 말도 맞춰놓은 상태.

그런데 힘없는 먹잇감으로 여기던 서화진의 외삼촌이 원청업체 회장일 줄이야.

일이 어렵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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