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34화
조수진이 알아야 할 얘기였다.
그 말을 듣자 조수진의 눈두덩에 물기가 그렁그렁 맺혔다.
“아휴,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 진짜 나쁜 년이네.”
“자식들 그렇게 가르친 걔들 부모가 잘못이지. 최소한 이 문제에서는 누나 잘못 없어. 화진이가 입 꾹 다물고 있는데 누나가 무슨 수로 알 거야.”
“내가 고집부려서 강남으로 이사만 안 갔어도 이런 일 안 겪어도 됐잖아.”
“강남에는 뭐 괴물들이 사나. 거기도 똑같이 사람 사는 동네야. 목동에도 사람 살고, 구로에도 사람 살고. 요즘 애들 게임하는 거 못 봤지? 애들 게임 한 판에 걔들 부모 열두 번씩은 더 난도질당해.”
“그래도…….”
“그래도 문제를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싸가지 없는 것들……. 애들이 아니라 그 부모들이 싸가지가 없어.”
개굴개굴개굴.
논두렁의 개구리들이 대찬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듯 시끄럽게 울었다.
연휴가 끝나고.
남해에 모였던 가족들은 다시 각자의 터전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대찬은 마지막까지 남아 친척들을 일일이 배웅했다.
“나 간다, 대찬아.”
“들어가세요, 큰고모.”
대찬은 늙은 큰고모를 차까지 부축했다.
그리고 대찬에게 일자리를 얻은 조은찬은 머쓱한 표정으로 소심하게 인사했다.
“나도 간다.”
“잘 가라. 아마 이제부턴 종종 보게 될 거야. 나 재단 사무실에도 자주 들르거든.”
“알았어. 사무실에서는 존대할게.”
“나도 존대할 거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직급은 경력 쳐서 차장으로 할게.”
생각보다 후한 대우에 조은찬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재단 직원들 다 좋은 사람들이니까 잘 지내고. 필요한 거 있음 말하고.”
“알았어.”
조은찬을 보내고, 주당 삼촌에게 고급 양주 한 병을 거하게 찔러준 대찬은 마지막으로 서인태, 조수진 내외와 서화진을 전송했다.
그는 특히 서화진의 손을 꼭 붙들고 그의 눈높이에 맞게 쪼그려 앉아 속닥거리며 당부를 남겼다.
“화진아, 이런 일 또 있으면 바로 삼촌한테 전화해. 알았지?”
“삼촌 바쁘잖아요.”
“아니야. 아침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언제든 전화해. 삼촌은 다른 일보다 화진이 일이 제일 중요하니까.”
서화진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이어 조수진과 눈을 맞췄다.
자기가 해결할 테니 일단 참고 가만히 있어 달라는 대찬의 눈빛.
조수진은 내키지는 않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흥읍으로 돌아온 대찬은 조카를 도와줄 방법을 고심했다.
사실 애들 싸움에 어른이 끼어들어서 잘된 예는 찾기 힘들었다.
서화진을 위해 뭐든 해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자칫 일을 더 망치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대찬이 그렇게 고심으로 며칠을 날린 사이.
서화진이 다니는 명문 사립초등학교는 가을을 맞아 수련회를 떠났다.
대찬은 그걸 기회로 여겼다.
그는 로튼 프룻츠 흥읍 본사 내에 위치한 조윤재단 사무실을 찾아갔다.
살금살금 들어가 까치발을 들고 조은찬이 일 잘하고 있나 슬쩍 엿보았다.
모니터에 시선을 박고 꼼짝도 안 하니 열심히 하기는 하는 모양.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회장님의 등장에 직원들은 모두 일어나 그를 맞았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하던 일 하세요. 조은찬 차장님.”
“네, 회장님.”
“잠깐 나 좀 봐요.”
대찬의 말에 조은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새끼 나 엿 먹이려고 일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자르는 거 아니야?’
본능적인 불안감이 그를 덮쳤다.
조은찬을 따로 불러낸 대찬은 작은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대찬은 빙긋 웃으며 조은찬에게 말했다.
“일은 할 만해?”
“어, 할 만해. …아니, 할 만합니다.”
“내가 존대하면 존대, 반말하면 반말. 그렇게 하자고.”
조은찬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만해. 사람들도 좋고.”
“그럼. 내가 가려 뽑은 사람들인데.”
“일 잘하나 못하나 감시하려고 온 거야?”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아니. 부탁 좀 하나 하려고.”
“…부탁?”
“이번에 화진이네 학교가 수련회 간다데.”
“그래서?”
서화진은 조은찬에게는 외당질이 되었다.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어른스러운 서화진은 조은찬에게도 귀여운 조카였다.
“이번에 우리 재단에서 RF 미트에서 출시한 비도축육 도시락을 후원하려고 하거든.”
“아, 그러면서 슬쩍 화진이가 우리 조카라는 티를 내려고?”
“나도 그럴까 생각은 했어. 그럼 화진이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구는 녀석들이 없어질 테니까.”
조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런데 화진이가 나한테 해준 얘기가 있어.”
“무슨?”
대찬은 서화진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간단하게 일러주었다.
조은찬은 피식 웃었다.
“암튼 그쪽 가족들 유별나.”
“애 생각이 그런데 우리가 멋대로 개입해서 뭉개는 것도 우스운 일이잖아.”
조은찬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래서 어떡하자는 거야?”
“수련회 기간 야외 일정에서의 끼니는 우리 도시락으로 해결하게 할 생각이야.”
“근데?”
“그럼 네가 도시락 나눠준다는 명분으로 화진이가 친구들하고 잘 지내나 먼발치에서 지켜봐 줘.”
조은찬은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런 허드렛일은 아랫사람 시켜도 되잖아.”
“너는 내 아랫사람 아니냐?”
“…….”
조은찬은 받아칠 말이 없어 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가족끼리 일이니까 네가 적임이야. 그러니까 군말 말고 내 말대로 해.”
“사적인 일에 직원 동원해도 되는 거냐?”
“조윤재단은 내 돈 100%로 세웠어. 싫으면 때려치워. 안 말려.”
조은찬은 불량하게 의자에 널브러지며 허공에 한숨을 뿜었다.
“하, 돈 없는 게 죄지.”
“네가 삼라 다닐 때 비리만 안 저질렀어도 이런 꼴 안 당해도 되잖아? 자업자득이야.”
“너는 말을 꼭 그렇게 아프게 해야겠냐?”
“그래야 네가 알아 처먹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알아들었어야지.”
대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은찬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후볐다.
결국 조은찬은 대찬에게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꿍해서 자리를 뜨는 조은찬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내가 너한테 부탁한 건 도시락 나눠주고 화진이 어떻게 지내나 확인만 해달라는 것뿐이야.”
“알아.”
“그 밖의 건 네가 멋대로 판단해서 저지르지 마. 무조건 나한테 선 통보, 후 조치. 오케이?”
“…오케이.”
조은찬은 대찬이 지긋지긋했다.
RF 미트에서 출시한 비도축육 도시락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대찬은 개중 가장 고가의 도시락을 제공했다.
도시락 하나에 3만 5천 원 하는 고급이었다.
주로 기업이나 정부의 대규모 회의나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는 도시락이었다.
비도축육으로 만든 너비아니와 민물장어구이, 깐쇼새우, 샐러드와 10가지 넘는 반찬 등으로 구성이 알찼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학교 측에서도 기쁘게 조윤재단의 협찬을 받을 것이라고 대찬은 생각했다.
학교 측은 조윤재단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연고도 없는 조윤재단이 뜻밖의 호의를 베풀면 학생 중에 조윤재단 관계자의 혈육이 있는 건 아닌지 따져볼 만했다.
그런데 그들은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이는 대찬이 비즈니스를 위해 투자한 것이라고 여겼다.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명문 소리를 듣는 사립초등학교다.
유수의 재벌집 자제들, 유명 연예인들의 자제들이 재학 중.
조대찬은 신흥 재벌이라 저 혼자는 잘났지만 인적 네트워크는 빈약하다.
그래서 이 일을 사회지도층들과 널리 교류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건 아닐까.
그게 학교 측의 해석이었다.
조은찬은 교직원과 학생들이 먹을 도시락을 싣고, 조윤재단 직원 몇몇과 함께 수련회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조은찬은 수련회가 열리는 속초까지 가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쫑알거렸다.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되나? 어휴, 내 팔자야.”
동행하는 직원들이 호응하지 않자, 그는 곁눈질을 하며 대답을 종용했다.
“이봐요, 안 그래요? 애들 뒤치다꺼리나 하라고 우릴 속초까지 도시락 배달을 시키는데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
“아, 뭐라고 대답을 좀 해봐!”
“우리 보고 남들이 신의 직장에 다닌대요.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죠. 야근 없이 나인 투 식스에 신입 초봉 4천이 넘고 철밥통이에요. 이 정도 갖고 투덜대면 다른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욕해요. 적당히 하세요, 차장님.”
“…….”
조은찬은 속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문 티를 그렇게 내고 싶은지, 초등학생들인데도 교복을 갖춰 입었다.
감청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조윤재단 직원들 앞에 의젓하게 줄을 섰다.
조은찬은 건성건성 도시락을 나눠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직원이 그에게 퉁을 놨다.
“차장님, 좀 성의 있게 나눠주세요. 애들 비싼 밥 받으면서도 기분 망치겠네.”
“그쪽 직급 대리 아닌가? 차장한테 너무 쏘네.”
“우리 조윤재단은 수평적인 문화를 지향하거든요. 불만 있으시면 회장님께 민원 넣으세요.”
“참 나. 로튼이건 조윤이건 일하는 사람들은 죄다 조대찬 복제인간 같아.”
“그런 칭찬을 다 해주시고.”
조은찬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덧 서화진의 차례가 되자 조은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가 도시락을 건네며 속닥거리는 목소리로 친근하게 알은체를 했다.
“야, 서화진.”
서화진은 덤덤하게 도시락을 받으며 마찬가지로 속닥거렸다.
“대찬 삼촌이 나 감시하라고 보낸 거죠?”
“어? 어… 감시랄 것까진 없지만.”
“저 알아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러실 거 없어요. 티는 안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서화진은 그렇게 말하고 휙 몸을 돌려 가버렸다.
조은찬의 속에서 짜증이 치솟았다.
‘이놈 저놈 다 왜 나한테만 난리야.’
대찬이 한 말도 있고, 서화진 본인도 티를 내지 말라고 하니 조은찬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화진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친구들과 잘 지내는지 확인했다.
낮 시간에는 딱히 특이한 동향을 파악하진 못했다.
그저 그맘때의 애들처럼 서화진은 또래들과 어울렸다.
‘이거 조대찬이 나 길들이려고 똥개훈련 시키는 거 아니야?’
조은찬은 못내 못마땅한 듯 팔짱을 꼈다.
하지만 문제는 낮이 아니라 밤에 터졌다.
항상 밤에는 집에 묶여 있어야 하는 초등학생들에게 수련회의 밤은 가뭄 끝의 단비였다.
엄격하게 옥죄던 통제가 사라지자 그들은 짐승처럼 광분했다.
짐승의 첫 번째 덕목은 약육강식.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것은 짐승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
보통 또래의 녀석들에게 약자로 낙점되는 건 신체적으로 약한 녀석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가 속세에서 한가락 하는 부모의 자식들이었다.
그들이 약자로 삼는 녀석들은 신체적으로 약자라기보다는 사회적 약자였다.
서화진이 다니는 학교의 학비는 연간 천만 원이 넘었다.
그리고 강남의 금싸라기 땅 한복판에 위치.
소득이 높은 집안이 아니고서는 보내기 어려운 학교다.
그럼에도 생계가 위태로울 지경까지 무리를 해서 이 학교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이 있었다.
당장은 힘에 부치지만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의 면학 분위기에 편승해 자식의 성적을 올리고.
그곳에서 맺어진 인맥이 나중에 자식의 인생에 큰 이익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 판단은 반드시 그들이 의도한 결과만을 불러오지 않았다.
학부모들은 자식과 같은 반에 다니는 학생들의 부모에 대한 ‘스캔’을 대개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같이 어울려도 되는 친구와 어울릴 가치가 없는 떨거지를 구분해 일러주었다.
부모 말 잘 듣고 자란 아이들은 그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체화시켰다.
수련회의 밤.
교사들은 학생들이 제발 얌전히 잠이나 자기를 바랐다.
짐짓 엄한 목소리로 그렇게 명령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들을 학생들이 아니었다.
순찰을 도는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팟, 휴대폰 플래시가 켜졌다.
은은한 빛이 어두운 방을 밝혔다.
학생들은 이름의 가나다 순서대로 정해진 번호로 방을 배정받았다.
이 방에 있는 아이들은 그래서 이름이 비읍과 시옷으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