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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33화 (533/556)

난 할 수 있어 533화

대찬은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막상 쉬고 보니 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부하가 걸렸던 대찬의 두뇌가 따뜻한 온탕에 담근 듯 노곤하게 풀어졌다.

대찬이 자기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다가 정신을 차렸다.

당장 눈앞에 서화진과 수찬이가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

설마 문밖으로 나간 건 아니겠지.

대찬이 허둥대며 이리저리 살피는데,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화진은 대찬과 나란히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수찬이는 얌전히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헥헥 서화진을 올려보며 꼬리를 치고 있었다.

대찬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서화진에게 말했다.

“다 놀았어?”

“네, 생각보다 노는 게 힘드네요.”

나이에 맞지 않게 원숙한 말투에 대찬은 피식 웃었다.

“한창 기운 팔팔한 나인데 벌써 지치면 어떡해.”

“잘 못 놀아서 쉽게 지쳐요.”

대찬은 안쓰럽게 웃었다.

“잘 못 놀아?”

“네.”

“왜, 공부하느라?”

서화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찬은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수찬이가 자기도 쓰다듬어달라고 대찬의 옆으로 오자 대찬은 웃으며 수찬이의 머리도 쓰다듬었다.

서화진은 대찬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공부가 그렇게 중요해요? 난 공부 재미없는데.”

“어른들이 공부, 공부하는 거 싫지?”

“좋진 않아요.”

“어른들이 그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공부, 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어른들도 괜히 네 기분 나쁘게 하려고 공부 타령하시는 게 아닐 거야.”

대찬이 두 번째 삶을 살면서 가장 먼저 바꿔 끼운 단추는 공부였다.

물론 모든 직업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개의 직업은 충실히 학업에 깊은 뿌리를 내려야 사회에 나가서 꽃을 피우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서화진에게 공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서화진은 대찬의 말에 시무룩해졌다.

대찬은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공부도 중요하고, 밥 먹는 것도 중요하고, 잠자는 것도 중요해. 공부는 모르겠지만 밥하고 잠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네.”

“그렇다고 밥을 하루 종일 먹는 건 아니고, 잠도 하루 종일 자는 건 아니지. 오히려 그러면 나쁜 거겠지.”

“네.”

“공부도 마찬가지야. 중요하지만, 하루 종일 하는 건 하루 종일 밥 먹는 것, 종일 잠자는 것만큼 나빠.”

서화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적당히 해야 되는 거네요? 공부도.”

“적당히 해야지.”

“근데 적당한 공부 시간이 엄마가 생각하는 거랑 내가 생각하는 거랑 좀 다른 거 같아요.”

대찬은 안쓰럽게 웃었다.

“엄마들은 원래 욕심이 많지. 학교 끝나고 이리저리 학원에 끌려다니기 바쁘지?”

서화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요즘은 밤 10시까지밖에 학원을 못 가니까 집에 와서는 엄마가 직접 복습시켜주세요.”

“아이고, 누나도 참 유난이다, 유난.”

대찬은 조수진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자식이 공부 못했으면 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교육에 쏟아부을 충분한 돈도 생겼겠다.

애가 당장 고생하는 건 밝은 미래를 위한 값싼 대가라고 여기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래도 고작 9살짜리를 이렇게 가혹하게 굴리면 쓰나.

대찬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는 뭐라고 하시니.”

“아빠는 하기 싫으면 아예 때려치우래요.”

“그, 그래?”

대찬은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서인태는 낙천주의자다.

“그런데 그건 또 아니잖아요, 그렇죠?”

“응, 그건 좀. 공부가 싫어서 때려치우는 건 반대야. 공부 대신 노력을 쏟을 일을 찾으면 그때 관두는 건 나쁘지 않아. 그래도 학교 공부 정도는 잘해두면 좋겠지만.”

“알았어요. 공부 열심히 할게요. 그래야 엄마가 기뻐해요.”

“…화진아.”

“친구들이 엄마를 욕해요.”

서화진의 말에 대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뭐?”

“도서관에서 바코드 찍는 사람이래요. 월 200밖에 못 번대요.”

“그게 무슨…….”

“아빠도 욕해요. 가죽이나 주물럭거리고 있어서 가게 월세나 나오겠냐고 그래요. 옛날에는 갖바치라고 불렀다고, 세상에서 제일 천한 직업이었다고 그래요.”

대찬은 기가 막혔다.

월 200, 월세나 나오겠냐. 갖바치.

아홉 살 애들의 말이 아니었다.

분명 부모가 하는 말을 애들이 듣고 앵무새처럼 뜻도 모르고 지껄이는 말일 것이다.

화가 끓는 대찬과는 달리 서화진의 말은 덤덤했다.

“엄마가 그러는데 제 성적이 곧 신분이고 계급이래요. 그래서 이런 욕 안 듣게 하려면 제가 공부 잘하면 돼요.”

“잠깐. 삼촌이 조대찬이라고 해도 그따위로 무시를 할까?”

“그 말, 되게 자신감 넘쳐 보이네요.”

흥분한 대찬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내가 그 망할 놈의 새끼들 부모보다는 신세가 나을 텐데? 아니, 그 이전에 매형은 필래가 3세인데 지들이 갖바치네 어쩌네 알지도 못하면서……. 부모 직업은 알아내는 것들이 왜 그런 건 못 알아내는 건데?”

“삼촌, 지금 말 엄청 빨라요.”

서화진의 느긋한 목소리에 대찬도 정신을 붙잡았다.

“그래, 미안하다. 내 신세, 매형 신세가 어떻고를 떠나서 친구들이 벌써 남의 부모 운운하면서 괴롭힌단 말이야?”

“흔한 일이에요. 남의 가슴 가장 아프게 후벼 파는 법을 잘 아는 애들이 많거든요.”

애들은 솔직하다.

솔직하다는 건, 싫고 미운 게 있으면 사정이나 예의 따윌 따지지 않고 어른보다도 무자비해진다는 걸 의미했다.

대찬은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뿜었다.

눈치 없는 수찬이가 대찬의 품에 달려들어 핥았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수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화진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너무 개의치 마세요. 제가 공부로 찍어 누르면 돼요.”

“그래도 받아치기라도 해보지 그랬어. 우리 부모가 그렇게 물렁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우리 엄마, 아빠 돈 많다고 받아치면 너무 없어 보이지 않아요?”

“…….”

“제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 많거든요. 살림은 평범한데 부모님이 무리해서 강남에 전세 얻어 이사 온 친구들. 우리 부모님 돈 많다고 나만 쏙 빠져나오면 그 친구들은 뭐가 돼요?”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네가 나보다 낫다.”

“삼촌이 제 이름 지어주셨잖아요. 어울릴 화, 먼지 진. 먼지처럼 이리저리 날리는 사람들이랑 같이하라고. 그러려면 저도 흙먼지 범벅이 돼야지 어떡하겠어요. 처음에는 이름에 무슨 먼지냐고 싫었는데, 지금은 내 이름이 제일 멋있는 거 같아.”

대찬은 뭐라고 받아칠 말이 없어 웃기만 했다.

서화진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하도 애들이 난리를 치니까 우리 외삼촌이 조대찬이라고 말할까 생각도 해봤어요. 근데 그건 엄마가 절대 말하지 말랬어요.”

“뭐? 왜.”

“조금이라도 삼촌한테 피해 갈 일은 만들지 말라고 했거든요. 내 말실수 하나가 삼촌한테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다고.”

대찬은 띵한 머리를 짚었다.

“누나는 쓸데없는 데서 섬세하네.”

“그래서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뭐, 말로만 그러지 주먹으로 패거나 그러진 않으니까. 이젠 익숙해요.”

“그래도 마냥 당하고 살 수만은 없어.”

“딱히 당한다고 생각 안 해요. 그런 말이 입버릇이 되면 자기들 인생만 천박해지는 거지, 뭐. 당하는 건 걔들이에요.”

“허허…….”

대찬은 허탈하게 웃었다.

서화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삼촌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나도 답답해서 그냥 해본 소리니까. 어쨌든 엄마, 아빠 욕 안 먹게 공부 열심히 할게요.”

결론이 ‘공부 열심히 할게요’로 귀결되는 게 대찬은 씁쓸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서화진의 어깨를 다독였다.

“공부 적당히 할게요로 바꿔주면 안 될까?”

“엄마 식 적당히요, 아니면 화진이 식 적당히요?”

대찬은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화진이 식이지. 내가 엄마하고 얘기 좀 해볼게.”

“정말요?”

“그래, 이러다 애 잡겠다니까.”

“고마워요, 삼촌. 아, 그리고 애들이 엄마, 아빠 갖고 뭐라고 하는 거 비밀이에요?”

“알았다.”

대찬은 거짓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대찬은 기회를 살피다가, 조수진에게 슬쩍 말을 꺼냈다.

“누나, 잠깐 나랑 바깥 공기 좀 쐬고 오자.”

“엥? 징그럽게 그게 무슨 말이야?”

“바깥 공기 쐬자는 게 그렇게 징그러운 말이야?”

“너랑 나 사이에 무슨… 그래, 그러자.”

조수진은 거실 소파를 독차지하고 드라마를 챙겨보는 안산 큰고모를 흘끗 보며 속닥거렸다.

“나도 큰고모가 거실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거 불편하던 참이야.”

대찬과 조수진은 집 밖으로 나갔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는 길은 캄캄했다.

논두렁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시골길은 산책하기 좋았다.

저벅저벅 말없이 걷던 대찬은 계속 걸으며 조수진에게 말했다.

“누나, 화진이가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너한테 공부하기 싫다 그러던?”

“공부하기 싫다고는 안 해. 자기 입으로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하더라.”

“…….”

“애가 많이 어른스럽더라. 자기 힘든 거 잘 얘기 안 하고.”

“원래 그래, 애가.”

“원래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된 거지.”

“그렇게 됐다고?”

조수진은 대찬을 흘끗 바라봤다.

주위가 어두워서 대찬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거는 기대를 아니까.”

“…….”

“그런 상태가 더 위험한 거 알지?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하는 애다운 애는 차라리 나아. 도와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애어른은 도와줄 수가 없어. 말을 안 하니까.”

“…그래, 맞는 말이야.”

조수진은 한숨을 쉬고 길가에 놓인 넓은 바위를 바라봤다.

“저기 잠깐 앉았다 가자. 힘드네.”

둘은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았다.

한동안 개구리 소리만 듣던 조수진이 입술을 뗐다.

“사실 내가 이렇게 화진이 교육에 열 내는 건 너 때문이기도 해.”

“뭐? 나 때문이라고?”

대찬은 황당했다.

“너랑 나랑 같은 엄마, 아빠 밑에서 나왔는데.”

“응.”

“신세는 많이 다르잖아. 너는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컸고, 나는 일개 사서고.”

“이 누나 또 이상한 소리 하네. 사서 경쟁률 100대1 우습게 넘는 거 알면서 그래? 사서 준비생들이 들으면 돌 던질 소리야.”

“그래도 어떻게 너한테 비하겠어. 그래서 생각했지. 똑같은 피 받아서 똑같은 밥 먹고 자랐는데, 누군 몇십 조 굴리는 회장님, 누군 동네 도서관 사서. 역시 사람은 공부하기 나름이구나. 내 아들도 열심히 공부시키면 조대찬 발끝은 따라가겠다.”

대찬은 조수진과 자신은 같은 부모 아래에서 같은 밥을 먹고 자랐지만, 분명한 차이가 한 가지 있었다.

죽었다 다시 태어나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

대찬은 감히 그 차이의 존재를 말하지 못했다.

진지한 얘기 하는데 장난하냐고 뺨을 맞을 소리였다.

대신 짓궂게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참 나, 그렇게 한이 맺혔으면 누나가 공부할 생각을 하지. 왜 애먼 애를 볶아요, 볶기는.”

“나는 이미 글러 먹었고. 그래도 애만 고생하는 거 아니야. 엄마도 고달파. 챙길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래, 다들 고생 많다더라.”

“나도 내가 극성맞은 거 알아. 강남으로 이사 가고 나서 더 그래. 거기서는 내가 평균도 아니야. 극성맞기로 따지면 평균 한참 밑이라고.”

“전쟁터가 따로 없네.”

“화진이 유치원 동기 엄마들, 산후조리원 동기들 만나서 얘기해보면 마음이 조급해져. 그래서 애들 들들 볶게 되고, 학원 하나라도 더 다니게 하고. 요즘 정시 늘린다고 해서 선행학습이 다시 중요해졌어. 그리고 영어는 기본 중의 기본인데 지금…….”

한참 떠들던 조수진은 이마를 탁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휴, 이것 봐. 나 완전 정신병 수준이라니까. 애들 교육 얘기만 나오면 입에 모터가 달려서 떠들어대는 꼴 좀 봐.”

“그래도 강남 밥 허투루 먹진 않았나 보네.”

“응, 나도 내 나름대로 치열하거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교육인지 포켓몬 게임인지 모르겠어. 그래, 이건 교육이 아니야…….”

“포켓몬?”

“화진이가 피카츄도 아니고 말이야. 애들 내세우는데 실은 엄마들끼리 경쟁이나 다름없어. 포켓몬스터도 그러잖아? 피카츄가 이겨야 지우가 이기는 거잖아. 똑같아. 어느새 애들 잘 키우는 건 뒷전이고 엄마들 자존심 싸움에 애들을 더 가혹하게 내모는 거야.”

“그걸 알면서도 멈추질 못하고.”

조수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몰랐으면 가만히 있겠어. 근데 자꾸 들려. 국제학교에 가야 된다. 학원에서 톱반에 들어가야 된다. 소논문 준비도 빼놓을 수 없다. 리듬체조도 시키면 좋다더라.”

“그런 말이 들리면 안 시킬 수가 없겠네.”

“쟤는 안 하는데 나는 안 하면 지는 거 같으니까. 내가 애한테 좀 심했나, 싶다가도 애가 군말 없이 잘해주니까 이 정도는 버티는구나, 싶은 거지.”

“버티는 게, 누나를 위해서 버티는 거더라.”

“…나를 위해서?”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수진에게 서화진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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