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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32화 (532/556)

난 할 수 있어 532화

지레 겁을 먹은 대찬은 알아서 꼬리를 내렸다.

“알았다구요.”

대찬은 입이 부은 채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앞차를 바라봤다.

그들에게는 휴게소를 들러 우동 한 그릇을 하는 일탈도 허용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추석 연휴라 더욱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휴게소다.

어쩌다 보니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부부가 모습을 드러내면 어떻게 되겠는가.

6.25 전쟁에 버금가는 난리통이 될 것이다.

남해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오전 중에 도착하기는 그른 상황.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선 대찬은 집에서 챙겨온 샌드위치로 겨우 끼니를 때우며 정차 없이 남해까지 달렸다.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먹은 대찬은 잔뜩 목이 막힌 얼굴로 툭툭 가슴을 두드렸다.

그걸 본 윤이영이 물을 내밀었다.

“물 놔두고 왜 그러고 있어?”

“안 마셔. 마시면 화장실 가야 돼.”

윤이영은 실소를 머금었다.

“여자 화장실은 줄이 길지만 남자는 괜찮잖아?”

“그래도 안 가.”

“웬 고집이래.”

“줄은 안 서도 변기가 꽉 찬다고 다닥다닥 옆에 붙어서.”

“허, 이제는 사람들 옆에 서서 일보는 것도 싫다, 이거야?”

“어, 싫어. 근데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야.”

“그럼 뭔데.”

대찬은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흘끔흘끔 본단 말이야.”

“자신이 없어?”

윤이영의 도발에 대찬은 즉각 발끈했다.

“자신이 없는 게 아니고!”

“그럼?”

“가끔 에계, 하는 표정으로 보는 인간들이 있다고…….”

“음, 역시.”

“음, 역시? 왜 수긍하는 건데?”

“진지하게 화내면 인정하는 거야, 알지?”

“…….”

대찬은 그 이후로 말없이 남해까지 차를 몰았다.

멍! 멍멍!

남해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건 개였다.

대찬의 동생으로 불리는 조수찬.

재벌을 형님으로 두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팔자가 편 개였다.

대찬은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수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뒤이어 나온 부모님과 마주했다.

그의 어머니는 입술을 삐죽이며 못 미더운 시선을 보냈다.

“얼굴 보기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이렇게 힘들어도 되는 거니?”

“어떡해요? 세계를 누비면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돼버려서.”

“지랄한다. 빨리 들어와. 휴게소에도 못 들르고 왔지? 배고플 거 아냐.”

“역시 잘 아시네.”

대찬은 마당 한 가득 퍼진 냄새를 흡 들이마셨다.

“또 나 온다고 좋아하는 갈비찜 하셨구나.”

“안산 큰고모가 갈비찜 환장하는 거 모르냐? 명절에 갈비찜 안 올라오면 그 성질을 어떻게 버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이 오지 않았으면 갈비찜이 못 먹을 정도로 질기게 만들어졌을 것이란 걸 대찬은 알았다.

대찬이 도착한 이후, 다른 친척들도 속속 남해에 도착했다.

술 좋아하는 대찬의 삼촌은 헤벌쭉 웃으며 그를 보자마자 술타령을 했다.

술 때문에 가산을 탕진한 그는, 대찬의 도움을 받아 재기했다.

대찬은 술값으로 돈을 다 날려버릴 삼촌 대신, 살림이 야무진 작은어머니를 통해서 적지 않은 생활비와 사촌동생의 학비를 보조해주는 상황이었다.

“이야, 우리 잘난 회장 조카님, 삼촌한테 좋은 술 한 병 안 주나?”

“삼촌, 술 좀 줄이세요. 차마 끊으라고는 못하지만.”

“술 없으면 이 풍진세상 무슨 재미로 사나?”

“술만 드시니까 세상에 뭔 재미가 있는지 모르시는 거예요.”

“짜식이 많이 컸다고 삼촌을 가르치려 들어? 너나 일만 하니까 술 마시는 재미를 모르는 거지.”

대찬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트렁크에 좋은 놈으로 한 병 받아왔으니까 이번 연휴에는 그거 한 병으로 때우세요.”

“역시, 내 조카!”

“삼촌, 술 안 줄이시면 다음부터는 그나마도 없을 줄 아세요.”

주정뱅이 삼촌을 필두로 속속 친척들이 도착했다.

안산 큰고모는 그래도 체면이 있어서 그랬는지 가장 마지막에 도착했다.

둘째 고모의 첩보에 의하면 큰고모가 탄 차량이 남해 시내를 족히 서너 바퀴는 돌았을 거라고 했다.

친척들은 모두 마당으로 나와 큰고모를 맞이했다.

“큰고모 오셨어요.”

“오냐, 잘해놓고 사는구나. 재벌 아들 둔 보람이 있네.”

큰고모가 서청수 회장의 별장으로 쓰였던 남해 집을 건성으로 둘러보며 말하자, 아버지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이건 대찬이가 잘 되기 전에 서청수 회장이 준 거예요. 일 잘했다고.”

“너는 꼭 별거 아닌 걸로 교정하려고 드는구나. 아들 잘돼서 기가 좀 폈나 보구나.”

“그런 건 아니고요.”

큰고모는 못마땅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고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이는 나 좀 보자.”

“네, 고모.”

벌써 여든을 헤아리는 나이임에도 안산 큰고모의 기백은 여전했다.

대찬을 따로 불러낸 큰고모는 대찬에게 말했다.

“네가 잘돼서 나도 기분이 좋다.”

“하하,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랑 동렬인 은찬이는 여태 자리를 못 잡고 있더구나.”

“아, 예, 소식은 들었습니다.”

대찬은 로튼 프룻츠가 막 떡잎을 틔울 무렵, 큰고모로부터 사촌인 조은찬을 취직시키라는 청탁을 거절했다.

그 이후에도 조은찬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빌빌대고 있었다.

어느덧 30대 후반.

경력의 공백이 길어질수록 그를 채용하려는 기업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갔다.

이제 안산 큰고모도 더 이상 조은찬을 ‘우리 은찬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만큼 못 미더운 녀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애정이 남았기에 그녀는 대찬을 불러 다시 한 번 아쉬운 소리를 했다.

“네가 도움을 좀 줬으면 하는데. 너 돈도 많잖니.”

“제가 돈이 많긴 하죠.”

“옛날에는 너도 겨를이 없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번에도 외면하면 냉혈한이다.”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사업자금은 아니고 제가 운영하는 재단의 사무직으로 취직시키겠습니다.”

“그래, 헛꿈 못 꾸게 하려면 월급쟁이가 좋지.”

“대신 제 친척이라고 나태하게 일하는 건 용납 못합니다. 그건 재단의 다른 직원들한테 못할 짓이니까요.”

“융통성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안산 큰고모는 대찬에게 퉁을 놨지만, 전처럼 냉담하지 못했다.

고마운 것도 있고, 그리고 대찬이 그렇게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커버린 것도 있었다.

대찬이 큰고모의 청탁을 선선히 승낙한 것도 대찬의 입지가 많이 달라진 까닭이었다.

조은찬은 이제 대찬이 사소한 복수심이나 원한, 미움을 품을 생각도 안 들 정도로 미미한 존재였다.

큰고모와 막 말을 마치는데, 마지막 일행이 도착했다.

대찬은 웃으며 마당으로 나가 그들을 맞이했다.

누나인 조수진과 서인태, 그리고 그 둘의 아들이자 대찬의 조카인 서화진이었다.

“역시 주인공은 늦게 오네.”

대찬의 너스레에 조수진은 멋쩍게 웃었다.

“미안, 미안. 화진이가 오는 길에 멀미가 심하게 나는 바람에.”

“엄마! 그거 삼촌한테 얘기 안 하기로 했잖아요! 부끄럽다니까.”

“오줌 지린 것도 아니고 멀미 갖고 뭐가 부끄러워.”

“오줌 그런 말도 하지 말라니까요! 부끄러우니까!”

조카인 서화진은 부쩍 부끄럼이 많아졌다.

‘하긴 그럴 나이지.’

대찬은 한없이 귀여워하는 눈빛으로 서화진을 바라봤다.

한 짐 선물을 들고 내린 서인태는 대찬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처남, 오랜만이야.”

“매형, 너무 자주 못 찾아뵈었죠.”

“나는 뉴스로 자주 처남 얼굴 봤으니까 그걸로 퉁 치자고.”

서청수 회장의 동생, 서청운 필래컬처인더스트리 사장의 차남인 서인태는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다.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그들의 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같이 살 적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던 남매지간이었지만, 그만큼 서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조수진은 대찬을 믿고 전 재산을 로튼 프룻츠 주식에 속된 말로 ‘몰빵’했다.

보통 이런 시나리오는 비극으로 끝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남매의 경우는 달랐다.

조수진은 돈방석에 앉았다.

그래서 구태여 야망도 없는 남편을 회사에서 썩힐 필요가 없었다.

회사 일에 딱히 욕심이 없는 서인태는 회사를 그만두고 유일하게 재미를 붙인 가죽공예를 업으로 삼아 작은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조수진 역시 하던 사서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이 밖으로 자신의 부를 잘 과시하지 않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죽공예 공방 주인과 사서 부부가 실은 어마어마한 주식 부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게 다 대찬 덕분이었으니 서인태가 대찬을 바라보는 눈에서는 아카시아 꿀이 뚝뚝 떨어졌다.

대찬은 웃으며 서인태에게 말했다.

“저번에 보내주신 수공예 지갑은 정말 잘 쓰고 있어요. 그거 받은 이후로 회사가 잘 나가요. 매형 신기 있는 거 아녜요?”

“아휴, 수십 조를 굴리는 회장님이 내 지갑 써주는 것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까 비행기 태우는 건 그쯤 해둬.”

대찬은 웃으면서 서화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화진아, 아빠 공방에 자주 가니?”

“응, 자주 가요. 저번에는 가방도 같이 만들었어요.”

“그래, 잘하고 있네.”

서화진은 대찬이 이름을 직접 지어줄 정도로 각별한 존재였다.

하지만 대찬은 이름을 지어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그만큼의 책임을 져주지 못했다.

2013년생인 서화진의 나이는 벌써 9살.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대찬은 유치원 졸업식도, 초등학교 입학식에도 함께해주지 못했다.

삼촌이 낄 자리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찬은 항상 이름을 지어준 만큼의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찬은 조수진에게 서화진에 대한 시시콜콜한 것들도 일일이 물었다.

“강남으로 이사 갔다며. 뭐 하러 그런 복잡한 동네로 들어가?”

“나도 별수 없는 학부모야. 화진이 교육 잘 시키려면 어쩔 수 없잖아. 영어 유치원 못 보낸 것도 내내 속상한데 학교라도 좋은 데 보내야지.”

“엄마가 되면 다 똑같나 봐?”

“네가 애를 안 낳아봐서 그래. 남들보다 한 걸음이라도 뒤처질까 그게 걱정이지.”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너무 애 들들 볶지는 마.”

“얘는, 내가 언제 또 들들 볶았다고 그래?”

“노파심에 하는 말이야. 공부 좀 못하면 어때. 누나 주식만 물려줘도 잘 먹고 잘살 텐데.”

“그런 말 마. 너는 자식새끼가 물려준 유산이나 갉아먹으면서 살면 좋겠니?”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다 이 소리지.”

“안전장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게을러지고 안주하게 돼.”

“너무 공부, 공부할 것도 없어. 공부 못한다고 죄다 백수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 재능은 다 각각인 거야.”

“저 꼭대기에 앉아서 유유자적하니까 넌 이쪽 사정을 몰라. 아등바등 전투적으로 살아야 남들보다 한 발이라도 앞서는 거야.”

“다 좋은데 애 숨통은 좀 터주고 살자고요.”

남매의 교육철학은 판이하게 달랐다.

대찬은 조수진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한 발 물러났다.

서화진에게 계속 마음이 머무는 대찬은 연휴 내내, 그에게 가장 많이 신경을 썼다.

서화진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비단 대찬 뿐만이 아니었다.

볼살이 귀엽게 토실토실한 9살 아이를 친척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저 귀여워해 주기만 하면 되는데.

꼭 말 좀 붙여보겠다고 건네는 몇 마디가 화근이었다.

“화진아, 너 공부 열심히 잘하고 있냐? 반에서 몇 등 하니?”

“게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눈 나빠진다. 너도 다른 애들처럼 새벽에 몰래 컴퓨터 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그 나이 때는 책을 많이 읽어야 돼, 책을. 하루에 책 몇 시간이나 읽니, 응?”

말하는 사람은 한마디여도 한 마디씩 모여서 듣는 사람에게는 열 마디, 스무 마디였다.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서화진이 기댈 사람은 딱 하나뿐이었다.

대찬이었다.

서화진은 수찬이와 공놀이를 하던 대찬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친절한 삼촌이었지만 많이 보지는 못해 조심스러웠다.

대찬은 옆에서 꾸물거리는 서화진을 보고 웃었다.

“수찬이랑 공놀이할래?”

“네.”

대찬은 웃으며 공을 천천히 던졌다.

서화진은 머뭇거리며 공을 받았다.

그러자 수찬이는 헥헥 혓바닥을 내밀고 서화진에게 달려와 꼬리를 흔들었다.

그제야 서화진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대찬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서화진과 수찬이가 노는 모습을 한가롭게 바라봤다.

추석 즈음의 하늘은 높고 맑았고, 바람은 간지럽고 볕은 쓰다듬는 듯 따뜻했다.

개와 아이만큼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오랜만의 여유.

긴장에 조여 있던 마음도 스르르 풀렸다.

추석 연휴 간 회사의 컨트롤 타워는 대찬을 제외한 수뇌부가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다.

한태윤 대표, 옥문영 대표, 민승기 대표, 정덕춘 이사, 추승호 이사 순.

그들은 대찬이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등을 떠밀어 회사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놨다.

듣기로는 옥문영 대표와 한태윤 대표가 의기투합하여 결정한 일이라고 했다.

여기에 추승호 이사는 자기도 가족이 있다며 어떻게든 연휴를 온전히 만끽하고 싶다며 소심한 반항을 했다.

그러나 옥문영 대표가 죽일 듯이 쳐다보는 바람에 속절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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