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31화
그린블러드가 무너지면서 시마 회장은 주변으로부터 사퇴 압박에 시달렸다.
그와 자리를 놓고 다투는 상대 계파는 이사회가 열릴 때마다 시마 회장을 때리기에 바빴다.
‘우리 회사를 제발 그만 좀 괴롭히십시오.’
‘일본 경제의 붕괴가 당신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과장 같습니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회장님께 남은 선택은 둘 중 하나입니다. 사퇴하든가, 할복하든가.’
‘제발 더 추해지지 마십시오!’
노골적인 반발에 시마 회장은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말이 좀 심하긴 했어도 그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
코테츠 그룹은 일본 경제를 떠받치는 세 기둥 중 하나라고 평가되었다.
그런데 그 천하의 코테츠가 시마 회장의 임기 동안 간신히 10위 안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몰락했다.
그린블러드의 붕괴로 코테츠 키친의 붕괴 역시 예정된 상황.
코테츠 키친이 무너지면 사정없이 자신을 물어뜯으려고 경쟁자들이 이빨을 벼리고 있다.
시마 회장은 그 공세를 견디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대찬이 시마 회장과 함께 코테츠 키친이라는 한 지붕 아래에 있겠다고 한다면.
물론 시마 회장이 대찬에게 과반의 지분을 허용한다면, 자가는 아니고 셋방살이쯤 될 것이다.
그러나 로튼 프룻츠의 손을 잡고 일본 시장 내 비도축육 유통에 혁혁한 역할을 한다면.
시마 회장의 리더십이 재평가 받을 여지가 생긴다.
분명 로튼 프룻츠의 앞잡이 노릇을 하느냐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시마 회장의 기량에 따라 로튼 프룻츠를 잘 길들여 부를 축적한 명민한 판단으로 평가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허망하게 물러날 바에야 반반싸움에 운명을 거는 것이 모로 보나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시마 회장은 오랜 침묵을 깨고 대찬을 바라봤다.
“코테츠 키친을 함께 이끌어나가는 문제, 그리고 비바체와 파트너십을 체결하는 문제 모두 총론만 다투기에는 사안이 너무 복잡합니다. 실무자 협의를 통해 자세한 각론을 완성해야만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총론이 결정되어야 각론도 있는 법입니다. 각론을 말씀하신다는 건, 회장님은 이 논의에 긍정적이신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각론이 모아야 총론도 있지요.”
“그러면, 시마 회장님의 판단이 아랫사람들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까?”
“유식한 말로는 바텀 업(Bottom-up) 방식이라고 하지 않나?”
대찬은 시마 회장의 말에 조소를 머금었다.
저 말은 허언이다.
이 일은 시마 회장의 리더십을 되살리기 위해 필요하다.
시마 회장은 이 일을 계기로 명민한 리더의 면모를 보여야 한다.
리더십을 시험받는 입장인데 부하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결정을 내린다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결국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한 공갈에 불과하다.
대찬은 그의 뜻대로 이끌려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무책임하고 비겁한 선택이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말 놀음일 뿐. 저는 그런 파트너와는 일 안 합니다.”
“조 회장이 배짱을 튕기는군.”
“코테츠 키친이든, 파트너십 체결이든 저한테는 없어도 그만인 사업입니다. 하지만 시마 회장님껜 없으면 안 되는 사업이고요. 배짱은 누가 튕기고 있습니까?”
“아무튼 각론을 모아 총론을 만드는 걸로 해요.”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리십시오.”
“…….”
“그렇지 않으면 저는 코테츠 키친이 그대로 뙤약볕에 말라 죽도록 방치할 겁니다. 저는 볕을 피할 그늘이 있는데, 회장님은 그늘이 있으신지.”
시마 회장은 말없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오래 못 기다려드립니다. 즉답을 내놓으세요.”
결국 그는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것밖에 답이 없으니까.
“……잘 부탁해요, 조 회장.”
“잘 부탁합니다, 시마 회장님.”
대찬은 웃으면서 그와의 영상통화를 종료했다.
옆에서 묵묵히 영상통화를 지켜보던 정덕춘 이사가 대찬에게 말했다.
“저 망할 놈의 자식, 뭐 하러 살려주시는 겁니까?”
“저 인간한테 쌓인 감정이야 제가 제일 심합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뙤약볕에 말라 뒤지도록 놔두질 않으시고요.”
대찬은 정덕춘 이사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렇게 해봤자 잠깐 속이 시원해지는 것 말고 우리한테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
“물론 그렇지만요.”
“어느덧 비바체도 고인 물이 됐습니다. 흐르지 않으면 썩는 운명이 됐어요. 이번 일로 일본 시장의 지분을 잠식할 수 있다면 큰 보탬이 될 겁니다.”
정덕춘 이사는 이내 씩 웃었다.
“코테츠 키친의 3형 비도축육에 대한 지적재산권도 우리에게는 도움이 될 겁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코테츠 키친은 끝까지 비상장회사로 남길 겁니다. 그럼 외부 변수에 의해 경영권이 위협받을 일도 없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죠.”
“뭔가요?”
“시마 같은 쭉정이가 코테츠 그룹을 계속 이끌어줘야 일본 경제를 떠받치는 전통 있는 대기업 하나를 기울게 하지 않겠어요?”
“예, 회장님의 판단을 지지합니다.”
“저는 정 이사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실 때가 제일 기분이 좋아요.”
둘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로튼 프룻츠는 코테츠 키친 역시 발아래 두었다.
이로써 미국 시장을 공략할 그린블러드, 일본 시장을 공략할 코테츠 키친으로 진용이 완성되었다.
코테츠 키친은 코테츠의 이름을 가진 회사로서는 코테츠 그룹의 산하에 들지 않은 유일한 회사가 되었다.
아울러 필래 비바체 시절부터 성장판이 닫혔다고 평가되었던 RF 비바체는 안정적인 해외진출의 기반을 확보했다.
RF 비바체는 코테츠 그룹의 코테츠샵과 합작법인을 차리고 비바체의 경영모델을 무기로 일본 시장 공략에 나섰다.
시마 회장은 이 일로 당장은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반대세력은 코테츠 키친이 문을 닫으면 일제히 공세를 퍼부어 그를 끌어내리려던 차였다.
그런데 모양새가 영 어정쩡하게 되고 말았다.
그 탓으로 기세가 뜨겁게 불타오르지 않았다.
“조대찬 그놈이 마른 장작에 찬물을 끼얹는 바람에 연기만 나고 불이 안 타오르잖아.”
내심 차기 회장이 될 것이라 기대했던 코테츠 그룹의 요인은 못마땅한 듯 연신 쯧쯧 혀를 찼다.
결과적으로 시마 회장은 대찬 덕분에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말하면.
대찬의 결정에 따라 언제든 자리를 잃을 수 있다.
시마 회장은 대찬이 마련해준 말미를 활용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애를 써야만 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시마 회장에 대해 생각했다.
‘시마가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두 가지. 최선을 다해 회사를 키워내느냐, 아니면 최선을 다해 회사를 장악하느냐. 전자 같은 훌륭한 선택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지경까지 안 왔겠지.’
코테츠 그룹 내부의 드러나지 않는 파벌싸움은 장기간 지속될 것이다.
고로 코테츠 그룹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으리라, 대찬은 예상했다.
아이티에서 로튼 프룻츠가 철수하고 그 자리에 그린블러드가 대신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로튼 프룻츠가 그린블러드의 주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로튼 프룻츠가 아이티에 복귀한 것과 다름없게 된 것.
로튼 프룻츠가 철수하게 된 것은 순전히 대찬과 아이티 정부 사이의 밀약 때문이었다.
고로, 아이티 정부는 상황이 종료된 즉시 비도축육 공급을 차질 없이 재개할 것을 요구했다.
대찬도 그 요구에 이의는 없었다.
그는 정덕춘 이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이티의 비도축육 공급은 따로 현지법인을 다시 진출시키지 않고, 그린블러드에서 그대로 담당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그린블러드의 자금으로 아이티를 먹여 살리는 셈이 되겠네요.”
“네, 장기적으로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아이티 시장을 본사에서 굳이 떠맡을 이유가 없습니다.”
정덕춘 이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찬은 로튼 프룻츠가 아이티 시장을 직접 챙길 때보다 더 너그러운 조건으로 아이티에 비도축육을 공급했다.
당장 그린블러드를 인수한 건 로튼 프룻츠의 자금이었지만, 출자전환을 통해 확보된 구 채권단의 지분이 이미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미국 투자자들의 돈이 흘러들어올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에서 돈을 받아서 아이티에 혜택을 베푸는 모양새였다.
남의 돈으로 생색내기란 쉬운 건 물론이고 즐겁기까지 한 일이었다.
그린블러드와 코테츠 키친의 일이 마무리될 즈음, 대찬은 기진맥진했다.
상황은 그가 주도했지만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대찬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윤이영은 그의 변화를 당사자보다도 더 잘 알았다.
“오빠, 이번 명절에는 좀 푹 쉬어. 휴가도 좀 내고.”
그 말을 들은 대찬은 절로 몸이 나른해져 윤이영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드러누웠다.
“그럴까? 그러고 보니 요 몇 년간은 명절도 잘 못 챙긴 것 같아.”
“그래, 돈 많이 벌면 뭐 해. 가족들한테 얼굴도 비치고 그래야지.”
윤이영은 대찬보다도 그의 부모님을 살뜰하게 챙겼다.
일이 없는 날이면 직접 남해까지 내려가 텃밭의 잡초를 뽑고 시부모님을 읍내로 모시고 가서 그럴듯한 외식을 함께 해주었다.
대찬은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윤이영은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싫어하는 거 억지로 하는 스타일 아니거든? 나랑 몇 년째 살면서 그걸 몰라.”
윤이영은 자신의 부모와 나누지 못한 정을 시부모와 나누는 듯했다.
본인이 좋다는데 대찬이 구태여 뜯어말릴 이유는 없었다.
바쁜 자신을 위해 자식 도리를 다해주는 윤이영에게 고마운 마음을 마음껏 표현해주면 되었다.
윤이영은 드러누운 대찬의 머리를 살살 쓸면서 말했다.
“그럼 이번 추석에는 시간 다 비워놓는 거다? 갑자기 주식이 폭락했어요, 아이티 대통령이 불러요, 위스콘신에서 시위가 났대요, 그런 핑계는 다 안 받아줄 거야. 알았어?”
대찬은 피식 웃었다.
“알았어. 무슨 일이 있어도 중간에 절대 안 뜰게. 나도 염치란 게 있지.”
“좋아. 오랜만에 명절다운 명절 보내겠네.”
윤이영은 싱긋 웃었다.
그때 대찬의 집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집전화가 울리는 일은 잘 없었다.
업무적인 연락은 보통은 진위생이나 마강국을 통해, 정말 급하고 중요한 일은 대찬의 개인 휴대폰을 통해 전달되었다.
집전화가 울리는 일은 대개 가족들이 연락을 해오는 경우였다.
윤이영도 그걸 잘 아는지, 전화벨이 울리자 웃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어머니 전환가 보다. 내가 받을게. 머리 좀 들어봐.”
대찬이 머리를 들자 윤이영은 잽싸게 전화기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 어머니!”
윤이영은 대찬에게 거봐라, 제대로 맞혔다는 눈짓을 보내곤 계속 전화를 받았다.
“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고 했어요. 이번에는 다 같이 큰집으로 가려고요. 네? 이번에는 남해에서 모이기로 했다고요? 안산 큰고모님이 웬일이실까… 네, 알겠어요. 추석 전날 내려갈게요. 그때 봬요, 어머니. 이이 바꿔드릴까요? 아, 됐다고요……. 네, 들어가세요.”
“뭐야, 나 안 바꿔?”
“돈에 눈 뒤집혀서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보는 자식새끼는 안 바꿔줘도 된다고 하셨어.”
“…….”
대찬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윤이영은 웃으면서 다시 대찬에게 와서 그의 베개가 되어주었다.
“이번 추석은 남해에서 쇠기로 하셨다는데?”
“그래? 큰고모님 거동도 불편하신데 웬일로 남해까지.”
“그러게. 우리야 좋지, 뭐. 난 남해 집이 제일 편하더라.”
대찬은 빙긋 웃으며 윤이영을 올려다봤다.
“고마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난 당신 짐 덜어주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 진짜 아버님, 어머님이 좋아서 이러는 거라고. 도대체 왜 고마워하는 거야?”
윤이영은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추석 전날, 대찬과 윤이영은 일찌감치 남해로 향했다.
서울보다 북쪽에 있는 흥읍에서 땅 끝이라고 봐도 좋은 남해까지는 먼 여정이었다.
-지금 시각은 7시 57분입니다. 미래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비도축육이 만드는 새로운 현실, RF 미트 협찬 57분 교통정보입니다.
민족의 대명절 추석을 맞아 벌써부터 주요 고속도로의 정체가 시작되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향, 신갈분기점부터 정체가 시작되었습니다.
대찬은 꽉 막힌 고속도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예 20인승 미니버스 한 대 뽑을 걸 그랬어. 그럼 버스전용차로로 안 막히고 쭉 갈 텐데.”
“버스라도 6명 이상 타고 있어야 갈 수 있는 거 아니었어?”
“12인승 초과하는 차는 탑승인원은 상관없거든.”
윤이영은 대찬에게 눈총을 쏘았다.
“이제 슬슬 재벌 티를 내는구나? 그런 뉴스 나올 때마다 눈꼴시어 죽겠었는데, 그 꼴불견이 내 옆에 있었네.”
“하도 답답하니 해본 소리야.”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 말이 마음을 움직이는 거야.”
“예예,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돈 좀 있다고 유세 떨면서 꼼수 쓰면 가만 안 둬. 그렇게 돈 자랑 하고 싶으면 차라리 헬기를 타.”
“오, 그거 좋은 생각인데? 이참에 헬기조종사 면허나 따볼까.”
대찬의 말에 윤이영은 말없이 대찬에게 눈빛만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