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30화
대찬은 채권단 협상팀의 대표에게 말했다.
“그린블러드는 미국 시장만 맡게 될 겁니다. 간판은 그린블러드지만 결국 로튼 프룻츠의 미국 현지법인으로 기능할 겁니다.”
“로튼 프룻츠 입장에서는 이미 로튼 프룻츠가 진출한 다른 나라에 그린블러드를 내세울 이유가 없겠지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린블러드가 세계 각지에 벌여놓은 사업들은 채권단의 지휘하에 정리해야만 할 겁니다. 투입한 자금을 100% 회수할 순 없지만 유의미한 액수가 되겠죠.”
협상팀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위스콘신 일대에 추진 중인 설비는…….”
“토지와 건물만 남기고 설비는 다 치워버리세요.”
“…그러죠.”
“채권단이 가진 채권의 상당부분은 주식으로 출자전환(부채를 주식 지분으로 전환하여 부채를 덜어내는 것)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린블러드가 되살아나는 정도로는 채권단이 출자전환 요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빚을 주식으로 바꾸면 그만큼 주식 가치가 오르거나 최소한 유지되어야 한다는 보장이 있어야 했다.
그게 아니면 그린블러드의 주식은 다시 바닥을 치면서 결과적으로 돈을 날리는 셈이 되니까.
그러나 로튼 프룻츠에서 경영을 전담해준다면 그들도 충분히 출자전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협상팀의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최근 비바체만 인수하지 않았어도 출자전환한 지분을 바로 사들였을 겁니다.”
“하하.”
“비바체 때문에 여력이 마땅치 않네요. 유동성이 확보되면 채권단이 보유한 지분은 점진적으로 매수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린블러드를 맡은 이상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는 필수니까요.”
“저희도 로튼 프룻츠가 경영을 맡아주면 그린블러드의 주식 가치가 오를 것이라는 내부 분석을 마쳤습니다.”
대찬은 씩 웃음을 머금었다.
“미국 바깥의 인력은 모두 정리하되, 미국 내 고용된 인력은 모두 로튼 프룻츠가 승계하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국민들도 그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일 겁니다.”
“햇치 부통령도 한숨 돌리겠죠. 주인이 한국 사람으로 바뀌긴 했지만 고용은 그대로 유지되니까.”
“네,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될 겁니다.”
“귀하도 아시겠지만 우리는 지금 그린블러드의 간판만 사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말고는 그린블러드를 인수할 의향이 있는 회사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 그렇죠.”
“그린블러드가 가진 가치는 그린블러드라는 이름의 상표권, 실리콘밸리의 사옥과 위스콘신의 대지와 건물, 그리고 대책 없이 많이 뽑은 인력뿐입니다. 보유한 기술도 우리가 전혀 탐낼 것이 아닙니다. 원래 우리 거였으니까요.”
“조 회장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린블러드를 필요 이상의 가격으로 사들일 의사가 없습니다. 채권단 역시 상당부분의 부채를 출자전환 했으니 회사 자체에 비싼 값을 매길 유인이 좀 적을 것 아닙니까.”
“그래도 받을 수 있는 만큼은 받아야지요. 로튼 프룻츠 덕분에 죽다 살아났을 뿐이지, 우리도 입은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요.”
“액수를 다투는 일은 꽤 오래 진행될 겁니다. 부디 인내심을 갖고 서울에 오래 머물면서 양측에 모두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했으면 합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대찬은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협상팀의 대표도 웃음으로 화답하며 대찬의 손을 꽉 잡았다.
지루한 입씨름 끝에 협상은 타결되었다.
채권단은 그린블러드의 지분 35%를 로튼 프룻츠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비바체 인수 당시 로튼 프룻츠와 컨소시엄을 구성했던 한일증권이 이번에도 그들과 손을 잡고 그린블러드의 지분 7%를 인수하겠다고 밝혔다.
도합 42%.
로튼 프룻츠가 실질적으로 그린블러드를 쥐고 흔들게 되었다.
완벽하게 경영권을 장악했다고 보긴 힘들었지만, 경영권 행사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로튼 프룻츠가 아니면 그린블러드는 존재할 수 없는 회사니까.
대찬은 그린블러드라는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북미 대륙을 가득 메운 양떼 사이에 잠입했다.
대찬은 그린블러드의 인수를 직접 발표했다.
“이번 그린블러드 인수로, 미국 내 수많은 노동자들의 일터를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린블러드의 최고경영자로서 미국 시민들의 고용촉진과 러스트 벨트의 부흥에 힘을 보탤 것을 약속드립니다. 저는 ‘햇치 모델’로 대표되는 미국 정부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힙니다.”
대찬은 마이크 햇치 부통령을 대외적으로 띄워주었다.
약속이 지켜진 이후, 대찬과 마이크 햇치는 특별히 돈독한 관계라고 보긴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린블러드 합병으로 다시 밀접한 관계를 맺을 계기가 마련되었다.
-미스터 초! 고맙습니다. 미네소타가 낳은 미스터 초가 위스콘신의 일자리를 지켜주었습니다.
마이크 햇치 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로튼 프룻츠의 결정에 감사를 보내며 화답했다.
로튼 프룻츠의 그린블러드 인수 결정으로 뜻밖의 타격을 받은 곳이 한 군데 더 있었다.
바로 그린블러드와 일본 코테츠 그룹의 합작회사로 세운 코테츠 키친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린블러드가 휘청거리면서 존폐 위기에 몰렸던 코테츠 키친이었다.
그런데 대찬이 그린블러드를 인수하니, 자연스럽게 그린블러드가 보유하던 코테츠 키친의 지분 50%까지 갖게 되었다.
졸지에 대찬과 코테츠 그룹의 수장인 시마 회장이 한 배를 타게 된 것.
대찬은 흥읍의 사무실에 앉아 도쿄의 시마 회장과 화상으로 대화했다.
시마 회장은 떨떠름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사람일 알 수가 없네요. 그쪽이랑 같은 회사를 공유하게 될 줄이야.”
“별로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좋을 리가. 조 회장도 별로 안 좋잖아요.”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같으니 같은 배를 오래 타고 있을 이유가 없겠습니다.”
“그린블러드가 그쪽 손에 넘어간 이상 나는 이 사업을 유지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찬은 속으로 웃었다.
시마 회장의 처지가 완전히 난처해졌다.
코테츠 그룹은 전형적인 일본의 재벌기업과 지분구조가 같았다.
소액주주들과 기관 투자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니까, 한국 재벌처럼 실질적으로 회사를 소유하고 경영권을 좌지우지하는 세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경영자는 회사 내부에서 선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시마 회장도 평사원으로 입사해 여러 요직을 거쳐 코테츠 그룹의 회장이 된 것이었다.
시마 회장은 취임 이후 번번이 난관에 봉착해 입지가 심하게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손대는 사업마다 결과가 변변치 않았고, 그래서 그린블러드와 손을 잡고 비도축육 시장을 개척하고자 코테츠 키친을 설립했다.
그런데 그 코테츠 키친마저 완전한 실패작으로 낙인이 찍혔다.
보통의 한국 재벌기업 같았으면 야심차게 준비한 계열사 하나가 고꾸라진 정도로는 오너의 경영권이 위협받지 않는다.
그러나 경쟁자가 도사리고 있는 환경의 일본은 달랐다.
잇따른 실패로 곤경에 처한 시마 회장에게 코테츠 키친이 결정타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많았다.
그렇게 궁지에 몰려 있는 주제에.
자신의 앞에서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자신에게 은근히 하대를 하는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
대찬은 웃으며 시마 회장에게 말했다.
“코테츠 키친에 대한 저와 시마 회장님의 지분은 정확히 50 대 50입니다. 즉, 코테츠 키친의 향방을 정하기 위해선 우리 둘의 의견이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거죠.”
“나는 코테츠 키친이야 어떻게 되든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조 회장은 다르겠지.”
“저도 코테츠 키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요.”
대찬이 정말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 말하자, 시마 회장은 불쾌한 듯 콧잔등을 씰룩였다.
누구는 명운을 걸고 만든 회사인데 누구는 지나가는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하니 그럴 수밖에.
“코테츠 키친을 우습게 보지 마세요. 우리는 그쪽에서 3형 비도축육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배양육 연구에만 몇 년을 매달렸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3형 비도축육에 관한 정보나 기술에 있어서는 코테츠 키친이 그쪽에 확실한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말씀이야말로 로튼 프룻츠를 너무 우습게 보시는 거 아닙니까?”
“…뭐요?”
“1형이든 2형이든 3형이든, 우리는 코테츠 키친보다 몇 차원 앞서는 기술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체르니 치는 사람한테 바이엘 4권 뗐다고 자랑하는 겁니까?”
“오만 떠는 것도 정도껏 하세요. 듣기 불쾌합니다.”
“오만이 아니라 현실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회장님.”
시마 회장은 신경질적으로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저 풋내기가 언제 저렇게 자라서 자기를 손바닥 위에서 굴리는 건지.
시마 회장의 말은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코테츠 키친의 목표는 ‘값싼 특등급 와규’를 생산하겠다는 것이었다.
쇠고기 단면에 하얀 지방이 눈꽃처럼 촘촘히 박힌, BMS12 등급의 와규를 비도축육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단일한 목표만을 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그 성과는 시마 회장의 말마따나 확실한 가치가 있었다.
로튼 프룻츠가 그 기술을 얻어내면 정말 어떤 재래육과도 겨룰 만한 수준의 비도축육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찬으로서는 그런 사실을 순진하게 수긍할 이유가 없었다.
시마 회장은 덧붙여 열심히 로튼 프룻츠가 코테츠 키친을 인수했을 때의 장점을 설파했다.
“조 회장이 이번에 그린블러드를 인수한 건 미국 시장을 개척하기 위함이지요.”
“네, 맞습니다.”
“그럼 마찬가지로 코테츠 키친을 인수하면 일본 시장 개척에 상당한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일본은 아직 비도축육에 대한 법제화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가 비도축육에 대한 빗장을 풀고 있는데 일본은 그렇게 안 하고 있죠.”
“언젠가는 풀 겁니다.”
“그 언젠가는, 로튼 프룻츠에 필적할 만한 경쟁력을 갖춘 일본 기업이 탄생했을 때가 되겠죠. 그리고 그런 일은 제가 죽기 전에는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오만하시긴.”
대찬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시마 회장에게 말했다.
“뭐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죠. 저는 코테츠 키친 인수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설마 지금 나에 대한 개인적인 적개심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혈기에 못 이기는 나이는 저도 지났습니다, 회장님.”
“…….”
시마 회장은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이대로 코테츠 키친을 공중분해라도 시킨다면 시마 회장은 코테츠 그룹의 꼭대기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 낙마가 거의 확실시되었다.
그러니 그에게는 명예로운 퇴장이 필요했다.
대찬은 그의 속내를 모르지 않았다.
슬쩍 퇴로를 열어주었다.
“일본 시장 개척을 위해 코테츠 키친의 존재가 도움이 된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비도축육을 법제화 하려면 최소 몇 년은 걸릴 것 같으니, 그 가치를 높게 쳐주긴 어렵습니다.”
“우리도 생떼를 쓸 입장이 아니란 건 알고 있어요.”
“값어치만 적절하게 책정된다면, 어느 정도 우리가 부담을 감수하겠습니다.”
“그 적절한 값어치는 내가 생각하는 액수와 조 회장이 생각하는 액수가 다를 텐데.”
내 체면치레를 해줄 정도는 돼야지.
시마 회장은 차마 그 말은 밖으로 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예, 아마도요. 서로 패가 안 맞으면 한 장씩 더 까서 맞춰보는 것도 방법이겠죠.”
“한 장을 더 까다니.”
“넓게 보자고요. 코테츠 그룹은 코테츠 키친쯤은 우습게 보일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있습니다.”
“그런데요.”
“코테츠 그룹만큼은 아니지만, 저희도 이번에 비바체를 인수하면서 고기만 내다 파는 회사는 아니게 됐습니다.”
“다른 사업 분야를 협상테이블에 같이 올려놓자는 말입니까?”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테츠 그룹의 계열사인 코테츠샵과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우리 RF 비바체를 일본 시장에 진출시키고 싶습니다.”
일본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내수 시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RF 비바체의 입장에서는 군침이 흐르는 시장이었지만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시장이 큰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그렇기에 RF 비바체 단독으로 진출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강자와 제휴하여 진출하는 쪽이 더 합리적이었다.
제안을 들은 시마 회장은 피식 웃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제안을 하시네요. 명예롭게 퇴장하겠다고 귀하에게 그런 큰 선물을 할 의향은 없소만.”
“명예로운 퇴장이 아니라 재기의 불꽃을 안겨드리면 수지가 맞지 싶은데요.”
시마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재기의 불꽃이라니.”
“저는 코테츠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코테츠 키친의 지분 중에서 딱 한 주만 더 받기를 원합니다.”
“한 주면… 과반이니까.”
“네, 경영권은 우리가 가져와야죠.”
대찬이 그린블러드가 보유하던 코테츠 키친의 지분 50%를 갖게 되어, 코테츠 키친에 대한 대찬과 시마 회장의 지분은 정확히 50 대 50 이었다.
시마 회장은 입술을 씰룩였다.
“조 회장, 방금 전까지 같은 배를 타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에 우리 둘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나요?”
“카드를 하나 더 까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코테츠 키친의 경영권은 우리가 가져오겠지만, 코테츠 그룹은 49.9%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로서 코테츠 키친의 경영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은?”
“그린블러드처럼 처량한 운명을 피할 수 있죠.”
“…….”
“회장님은 일본 시장 내 로튼 프룻츠의 파트너로서 체면치레 정도가 아니라 재기의 불꽃을 지필 수 있습니다.”
시마 회장은 잠시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