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29화
식품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린블러드의 대두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린블러드에 적잖은 돈을 투입한 사람들도 상당수.
그들은 슬쩍 자리를 빠져나와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당장 그린블러드에 넣었던 돈 빼버려! 당장!”
주식시장이란 상당히 기민하다.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던 그린블러드의 주가가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대찬이 입술을 뗀 지 5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 * *
2021년의 국제식품박람회 아누가는 그린블러드에게는 최악의 저주가 되었다.
대찬은 일정을 마치고 개선장군처럼 귀국했다.
그가 사옥으로 돌아오자 임직원들은 일어나 박수로 그를 맞았다.
대찬은 난감하게 웃으면서 진위생을 바라봤다.
“당신이 시켰지.”
“그럴 리가요. 모두 자발적입니다.”
“퍽이나 그러겠네.”
진위생은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회장님, 정덕춘 이사님이 제가 기립박수 하란다고 하실 분이에요?”
“그건 아니지만.”
“초록피 백돼지 모가지 따고 돌아오는 보스께 직원들이 이 정도 예우는 갖춰야 맞지 않겠습니까.”
“말은 청산유수네.”
“다 회장님께 배운 거죠.”
대찬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의 박수에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회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대찬의 뒤를 정덕춘 이사가 따라왔다.
그녀는 웃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회장님,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저 마음의 상처 크게 받았다고요.”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까. 그저 회장님이 하도 잘나가다 보니 나사가 한두 개 빠진 걸로 착각했죠.”
“지금은 문제없는 거죠?”
“120% 문제없습니다.”
대찬은 씩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됐어요.”
“저한테는 미리 귀띔을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제가 설마하니 어디서 말을 흘리기라도 하려고요.”
“물론 정 이사님을 믿지만, 사람이 아예 모르는 것하고 아는 것하고는 차이가 많더라고요. 작정하고 누설할 리는 당연히 없겠지만 실수는 항상 은연중에 드러나니까.”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마누라 윤이영도 모르던 일이니까 섭섭하실 거 없어요.”
정덕춘 이사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회장님이 아이티 정부에 일부러 비도축육 1.0에 관한 기술을 흘리고, 아이티 정부가 이를 고의로 그린블러드에 넘겨준 겁니까?”
“네.”
“허, 아이티 정부가 잘도 회장님 뜻대로 움직여줬군요.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
정덕춘 이사는 여전히 삼각 트레이드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래 봬도 제가 주한 아이티 명예영사 아니겠습니까. 아이티 국민 식생활의 일익을 맡고 있고요. 저 아이티 가면 국빈대우 받는다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고마운 일은 그저 고마워하면 그만입니다. 뭘 더 의심하세요.”
“제가 의심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도 없지만, 드러난 상황만으로는 선뜻 이해되지 않아서요.”
“하하, 그럼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합니다.”
“역시.”
정덕춘 이사는 씩 웃었다.
“조만간 공식적으로 비도축육 2.0에 대한 발표회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제가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맡을게요. 바로 추진해주세요.”
“예, 그러겠습니다.”
한동안 불편한 관계였던 둘은 쌓인 앙금을 완전히 해소하고 진솔하게 서로를 향해 웃었다.
잭 머피와 대담한 자리에서 비도축육 2.0에 관한 정보를 흘린 대찬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그 정보가 거짓이 아님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는 직접 발표회를 진행하며 비도축육 2.0의 존재를 과시했다.
아누가를 통해 일말의 정보를 습득한 취재진이 잔뜩 몰렸다.
필래호텔에서 가장 넓은 홀을 대관했는데도 빈자리가 없었다.
대찬은 그 많은 청중의 환호를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자신 있게 세계를 향해 선언했다.
“세계는 이전보다 몰라보게 개선된 품질의 비도축육을, 이전보다 몰라보게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감히 비도축육 2.0의 탄생을 인류의 축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비도축육 2.0의 탄생은 인류에게는 축복, 그린블러드에는 저주였다.
그린블러드는 상도덕이 없다고 로튼 프룻츠를 욕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로튼 프룻츠가 그린블러드에 미끼를 던지듯 비도축육 1.0 기술을 전수해주고, 그린블러드가 설비를 구축할 투자를 마치자마자 2.0 기술을 선보이면 그건 비난의 소지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법적인 문제는 없더라도, 미국 시장 진출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자국 기업을 잔뜩 물 먹인 다음 비집고 들어오는 로튼 프룻츠가 미국 소비자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 로튼 프룻츠는 도덕적인 과오를 저지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사실로 보자면, 그린블러드는 아이티 정부와 짜고 로튼 프룻츠의 뒤통수를 후렸다.
그러니 도덕적 귀책사유는 로튼 프룻츠가 아니라 그린블러드에 있었다.
이에 그린블러드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로튼 프룻츠의 설계 안에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그들을 대놓고 지탄하지 못했다.
로튼 프룻츠는 정말로 완전히 새로운 설비를 베트남과 스페인을 필두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보란 듯이 그린블러드가 점찍어놓았던 지역인 멕시코, 미얀마, 폴란드에 설비를 구축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나라들이야 로튼 프룻츠의 진출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두 업체가 동시에 들어오면 경쟁을 통해 품질이 좋아지든 가격이 낮아지든 할 것이다.
일자리 창출은 덤.
그들이 구태여 그린블러드에게 알량한 의리를 지켜줄 이유가 없었다.
그린블러드는 주식시장에 상장하자마자 3조에 달하는 금액을 조달했다.
로튼 프룻츠가 무진 애를 써서 비바체를 인수하기 직전까지 달성한 금액이 3조였다.
역시 밭이 좋아서 그 금액을 그린블러드는 시작하자마자 확보했다.
그러던 그린블러드의 시가총액은 대찬이 2.0을 선언하자 5천억이 빠졌다.
그러다 정식 발표회를 통해 비도축육 2.0의 출시를 공식화하자 다시 5천억.
그러다 그린블러드가 아시아ㆍ유럽ㆍ북미 대륙을 공략할 거점으로 삼은 지역에 맞불을 놓자 다시 5천억이 빠졌다.
그러니까 불과 몇 개월 만에 반토막이 났다.
그즈음 로튼 프룻츠는 비도축육 2.0을 위한 TV 광고를 내보냈다.
조지 클루니가 로튼 프룻츠와 CF모델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이지 않은 고기, 항생제를 투여하지 않은 고기, 최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고기, 이제는 걱정하지 말고 즐기세요.”
그는 스테이크로 조리된 비도축육 2.0을 나이프로 큼직하게 썰어 입에 넣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씹으며 고기의 맛을 만끽했다.
“으음, 정말 맛있네요. 더 먹어도 되나요?”
익살스럽게 웃으며 묻는 장면으로 조지 클루니는 사라지고, 로튼 프룻츠의 로고와 함께 자막이 전시되었다.
‘미래는 이제 현실입니다.’
거금을 들여 찍은 광고를 로튼 프룻츠는 전 세계로 내보냈다.
그린블러드는 상장과 동시에 이미 3조 원의 돈을 수중에 넣었다.
주가 폭락에 따른 손실은 회사의 몫이 아니라 투자자들의 몫이었다.
“죽이지 않은 고기.”
노스다코타의 깡촌에서는 누군가가 권총으로 자살했다.
“항생제를 투여하지 않은 고기.”
뉴욕의 신실한 기독교 신자는 마약중독자가 됐다.
“최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고기.”
캘리포니아의 한 노인은 일시불로 받은 연금을 다 날리고 거식증에 걸렸다.
“이제는 걱정하지 말고, 즐기세요.”
텍사스의 한 잉꼬부부는 피가 터지도록 몸싸움을 한 다음 이혼했다.
그러나 주가 폭락에 따른 당장의 금전적 손실은 투자자의 몫이되, 장기간의 리스크는 회사의 몫이었다.
그린블러드의 신용등급이 떨어졌다.
가뜩이나 무리하게 당겨 쓴 대출이자는 치솟았다.
“으음, 정말 맛있네요.”
재무구조가 불안정해졌다.
그린블러드는 투자자들 사이에서 발을 한번 들이면 절대 빠져나오지 못할 늪지대로 취급되었다.
“더 먹어도 되나요?”
그린블러드는 유럽, 아시아, 북미 대륙에 신축 설비 계획을 전면 중단했다.
‘미래는 이제 현실입니다.’
그린블러드의 최고투자책임자인 잭 머피는 해고되었다.
그린블러드의 창업주들 중 하나인 그는, 그럴듯한 변명 한마디 던지지도 못하고 그대로 짐을 싸야만 했다.
그가 회사에서 쫓겨나면서 건진 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캐리어에 들어갈 정도의 개인물품뿐이었다.
그는 드르르르 캐리어를 끌면서 그린블러드 사옥을 떠나다가 뒤를 흘끗 돌아봤다.
누구도 배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찬과의 채무관계를 청산한 마이크 햇치 부통령은 본격적으로 러스트 벨트 전역에 ‘햇치 모델’을 적용할 생각이었다.
그린블러드를 그 1호 기업으로 염두에 둔 상황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로튼 프룻츠에게 치명타를 얻어맞고 한 방에 뻗어버렸다.
그러자 마이크 햇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부통령으로서의 첫 번째 햇치 모델이 탄생과 함께 소멸할 위기에 처하자, 그는 다급하게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했다.
“이대로 그린블러드가 무너지게 방관할 순 없습니다. 그린블러드를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향후 인류의 식탁을 책임질 배양육 시장에서 미국이 주도권을 쥘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호소에 호응하는 목소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실리콘밸리의 사람들은 마이크 햇치 부통령의 호소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하는 기업은 1%뿐, 나머지 99%는 다 죽어. 밥 한 끼 먹을 때마다 회사 하나가 무너지는 판에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린블러드의 몰락은 대단한 일이 아니며, 그들만 특별대우를 해줄 필요가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그린블러드의 몰락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린블러드가 빠져나간 1%의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을 거란 단꿈을 꾸면서.
국민들 역시 부통령의 제안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이미 30억 달러를 날린 회사한테 다시 기회를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 축산업계는 표정관리를 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결국 그린블러드는 자기 덩치보다도 더 크게 당겨 쓴 부채를 이기지 못했다.
몇 개월 후,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채권단은 그린블러드에 회생 불가 진단을 내렸다.
그린블러드가 차라리 다른 사업을 모색할 수 있다면 그들도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기는 단 하나, 비도축육.
그런데 이 비도축육으로 로튼 프룻츠를 따라잡을 계산이 전혀 서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몇 년씩 느긋하게 기다릴 입장이 된다면 만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채권단은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채권단은 그린블러드에 당장 매각협상을 진행해서 부채의 일말이라도 갚을 노력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구제불능인 회사를 사갈 마음 따뜻한 부자는 없었다.
결국 그린블러드를 품어줄 존재는 지구상에 딱 하나뿐이었다.
로튼 프룻츠.
대찬은 그린블러드 채권단으로부터 인수제안을 받았다.
* * *
채권단은 직접 협상팀을 꾸려 서울로 파견했다.
대찬은 그들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고생은요. 당치 않습니다.”
협상팀을 이끄는 인물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재미교포 2세도 아니고 중학교 교육까지 한국에서 받은 뒤,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이라 한국어 구사에 문제가 없었다.
이는 협상의 추가 로튼 프룻츠 쪽으로 쏠려있음을 의미했다.
채권단 역시 쓸데없는 기 싸움으로 체력을 소진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로튼 프룻츠에게 그린블러드는 필요했다.
순도 100% 빚으로만 이뤄진 알맹이는 필요 없었다.
대찬이 필요한 건 껍데기였다.
그린블러드라는 간판.
로튼 프룻츠에 도덕적 과실은 없지만, 미국 소비자들은 로튼 프룻츠를 썩 반기지는 않았다.
자국 기업을 무찌르고 점령군처럼 들어오는 로튼 프룻츠가 곱게 보이지 않는 것.
늑대가 양떼의 저항 없이 틈바구니에 파고들기 위해서는 양의 가죽이 필요했다.
양의 가죽을 쓰고 파고들면 양떼는 늑대가 비집고 들어와도 저항하지 않는다.
대찬은 그린블러드를 인수하여 미국 시장에 연착륙할 계획이었다.
대찬이 채권단에 요구하는 건 간단했다.
“그린블러드를 인수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린블러드의 부채를 몽땅 떠안을 의사는 없습니다.”
“예, 그러시겠죠.”
그들이 원하는 건 그린블러드의 정상화였다.
로튼 프룻츠가 그린블러드를 인수하면, 비도축육 2.0을 기반으로 하여 경쟁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린블러드가 다시 정상 궤도에 오르면 채권단으로서는 빈손으로 그린블러드를 떠나야 하는 운명을 바꿀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