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28화
링 위에 로튼 프룻츠의 대찬과 그린블러드의 잭 머피를 동시에 올려놓기로 했다.
구실은 다가오는 배양육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가.
딱히 싸움 붙이는 구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데 어떻게 싸움이 안 붙겠냐고.’
먼저 행사장에 도착한 대찬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잭 머피는 시작 시간으로부터 5분이 지나서야 죄송한 척을 하며 등장했다.
무대 위에 오른 사람은 사회자, 대찬, 그리고 잭 머피 3인.
사회자는 말이 좋아 사회자지 실은 프로레슬링의 심판이나 다름없다.
‘나는 저 백돼지랑 엎어치기 한 판을 해야 하는 거고.’
잭 머피는 이 시간을 반겼다.
모든 건 자신에게 유리했다.
그는 대찬이 자신을 향해 흥분해서 막말을 쏟아내기를 기대했다.
평소라면 좀체 기대하기 어려웠겠지만, 요즘의 상황이라면 웬만한 돌부처도 얼굴 안 붉히고는 못 배길 테니까.
늦게 등장한 잭 머피는 웃으며 대찬에게 악수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네요. 이제는 제법 거물급 인사가 되셨는데 이런 일선 박람회까지 직접 오시고 참 부지런하십니다.”
말은 상냥했지만 속뜻은 상냥하지 않았다.
오죽 급하면 네가 두 발 벗고 여기까지 왔냐는 뉘앙스.
대찬은 뻔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잭 머피의 손을 맞잡았다.
“실컷 즐겨두셨습니까?”
“아뇨, 왜요? 아직 즐길 날이 훨씬 많은데. 그 말은 제가 하는 게 적절하지 않나 싶네요.”
마이크 바깥의 얘기는 몰려든 청중에게 들리지 않았다.
생긋생긋 짓는 눈웃음만 보이는 청중들에게는 둘의 사이가 의외로 좋게 보일 뿐이었다.
좌우로 대찬과 잭 머피를 거느린 사회자는 마이크를 들었다.
“자, 지금부터 쇠고기를 넘어서, 다가오는 대체육류 시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대체육 시장을 대표하는 기업의 두 분을 모시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공정성을 기해야 하는 사회자는 로튼 프룻츠가 사용하는 비도축육, 그린블러드가 사용하는 배양육 대신 대체육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사회자는 잭 머피에게 먼저 발언권을 주었다.
잭 머피는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배양육 시장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인간의 삶이 수렵으로 고기를 얻는 것에서 목축으로 바뀌었듯, 목축에서 배양으로 다시 한 번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겁니다.”
“로튼 프룻츠의 조대찬 회장님 역시 그린블러드의 머피 씨와 같은 생각이십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도축육은 효율적이고 윤리적인 산업입니다. 단기간에 목축을 대체하긴 힘들겠지만 로튼 프룻츠는 제 몫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찬은 잭 머피와 달리 보수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물론 대찬의 생각이 잭 머피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잭 머피를 따라 비도축육 산업을 찬양해봤자 실익이 없었다.
비도축육이 목축을 대체할 것이다.
그런 말이 언론을 타면 축산농가들의 반발을 부를 것이다.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까닭이 없었다.
다만 대찬의 조심스러운 말이 잭 머피에게는 자신감을 상실한 것으로밖에는 비치지 않았다.
잭 머피는 더욱 힘주어 말했다.
“로튼 프룻츠의 조 회장님은 조심스러우신데, 저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의욕적이고 공격적으로 투자에 나서 ‘배양 혁명’의 디데이를 앞당길 것입니다.”
사회자는 잭 머피가 말한 투자에 대해 질문했다.
“3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회사의 운명을 걸고 모든 것을 동원하여 배팅했습니다.”
사회자는 눈웃음을 지으며 반대편의 대찬을 흘끔 바라봤다.
“경쟁업체의 광폭행보에 로튼 프룻츠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로튼 프룻츠의 입장은 어떠신지요?”
“네, 같은 시장을 공유하는 경쟁업체의 공격적인 투자에 부담을 느끼는 건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그러시겠죠.”
대찬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다만, 그 공격적인 투자가 오히려 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대찬의 말에 잭 머피는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지랄하고 있네.’
사회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독이 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투자라는 건 물론 그 이상의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판단에 의해 실시합니다.”
“그렇죠.”
“하지만 항상 손실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사회자는 웃으면서 청중들을 향해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사업가들이십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투자했다가 돈 한 푼 안 날려본 분이 계실까요?”
“하하하.”
청중들은 사회자의 진행에 가벼운 웃음으로 호응했다.
대찬도 미소를 띠며 말했다.
“본전을 조금 깎아먹는 정도라면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만, 지금 그린블러드의 공격적인 투자는 회사의 기둥을 뽑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외람되지만 조 회장님, 무례하시군요.”
대찬의 도발적인 언행에 잭 머피는 눈살을 찌푸리며 응수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입장으로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우려를 전달했을 뿐입니다.”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입장이라면 우려보다는 견제하려는 심리가 강하겠지요. 지금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죠?”
잭 머피의 질문에 대찬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직 실체도 없는 경쟁자에게 견제심리를 느끼기는 어렵죠.”
“곧 로튼 프룻츠의 실체가 없게 될 게 분명하니 견제심리를 느끼는 게 당연하겠죠?”
둘의 혀끝이 날붙이처럼 날카롭게 벼려지자, 사회자는 난감하게 웃었다.
“자자, 다들 조금씩 진정하시고요.”
겉으로는 진정하라고 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멱살잡이까지 갔으면 하는 게 사회자, 정확히는 주최 측의 바람이었다.
그러면 업계 관계자들만 관심이 있던 이 박람회가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끌 테니까.
잭 머피는 콧잔등을 씰룩이며 말했다.
“기왕 터놓고 말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니 말하겠습니다. 로튼 프룻츠는 배양육 시대를 얘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프로레슬링에서, 선수의 운동실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마이크웍’도 중요하다.
우리말로 풀면 말발 또는 입심쯤이나 될까.
등장해서 마이크를 들고 상대편 선수와 재기 넘치는 말싸움을 벌여 기선을 제압하는 마이크웍 또한 인기 있는 프로레슬링 선수라면 필수로 갖춰야만 했다.
사회자는 점잖은 신사들인 대찬과 잭 머피가 서로를 향한 마이크웍에 충실하도록 유도했다.
“자격이 없다, 무슨 뜻일까요?”
“본격적인 배양육 시대가 열렸을 때, 로튼 프룻츠를 위한 자리는 없을 테니까요.”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은 사회자는 대찬을 바라봤다.
“머피 씨의 말씀에 조 회장님은 동의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아, 예. 물론입니다. 머피 씨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것 같네요.”
“착각이요.”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잭 머피는 이미 대찬의 레퍼토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대꾸할 말이야 뻔할 뻔 자.
대찬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부러 애먼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대찬은 그런 잭 머피를 보고 씩 웃었다.
그가 잭 머피에게 들려줄 얘기는 잭 머피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발표회를 열려고 했는데,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상과는 다른 말로 입을 떼자, 잭 머피는 흘끔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은 그쪽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청중만 바라보며 말했다.
“머피 씨가 우리 로튼 프룻츠는 비도축육 시대를 얘기할 자격이 없다는데, 저희가 이번에 비도축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습니다.”
사회자는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대찬에게 말했다.
“새로운 지평이요?”
“네, 이른바 비도축육 2.0입니다.”
“비도축육 2.0?”
“우리 로튼 프룻츠는 획기적으로 빠른 속도로 재래육과 흡사한 풍미를 가진 비도축육을 생산하는 기술을 최근 확보했습니다.”
“획기적으로 빠른 생산속도라면….”
“2배입니다.”
“2배?!”
사회자를 비롯하여 식품업계에 종사하는 청중들 역시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지금까지 비도축육을 생산했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체계로 진행될 겁니다. 그건 물론 영업비밀이니 공개하기 어렵습니다.”
“말씀대로라면 정말 2.0이라고 부를 만하군요.”
그 말을 듣는 잭 머피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이크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건 참지 못했다.
대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만 문제는 비도축육 1.0을 생산하는 설비와는 완전히 다른 설비가 구축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희 로튼 프룻츠는 6개월 전부터 설비 신축사업을 중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구축하는 설비는 모두 이 비도축육 2.0을 생산하게 됩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까지 설비 신축사업이 중단된 지역은 베트남, 스페인, 베네수엘라, 나이지리아 등 10개국 19곳입니다. 로튼 프룻츠는 이 지역들을 시작으로 앞으로 새롭게 설비를 구축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비도축육 2.0을 생산해낼 겁니다.”
“신축사업의 중단을 두고 로튼 프룻츠가 추진력을 잃었다는 분석이 있었는데요.”
“네, 틀린 분석이었습니다.”
사회자는 청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산속도가 2배 빠르다는 건 정말 획기적이군요. 그렇죠?”
청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이제 사회자의 시선은 잭 머피에게로 향했다.
“그린블러드에서는 로튼 프룻츠가 이런 비장의 무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
잭 머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머피 씨?”
“…대, 대충은 알고 있었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로튼 프룻츠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하셨는데요. 그럼 여기에 맞서는 그린블러드에도 비장의 무기가 있다는 뜻입니까?”
잭 머피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여기서 공개해버리면 그건 비장의 무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군요. 그린블러드가 어떤 수를 가지고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사회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잭 머피가 쥐고 있는 패가 실은 개패라는 건 눈치로 충분히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걸 알았다.
대찬은 잭 머피가 어물쩍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려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도망가는 놈의 목덜미를 붙들고 아예 오체분시를 할 작정이었다.
대찬은 사회자의 말이 없었는데도 잭 머피에게 직접 물었다.
“머피 씨, 그렇다면 지금 30억 달러를 쏟아부어 만들고 있는 설비는 기존의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겁니까?”
“물론입니다!”
“그래요? 흥미롭네요. 그럼 해당 설비의 생산기간은 어떻게 설정돼있습니까? 저희 로튼 프룻츠의 비도축육 1.0은 생산하는 데 3주가 소요되었습니다. 2.0부터는 열흘이고요. 그린블러드는 어떻죠?”
“영업비밀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생산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얘기하는 게 왜 영업비밀입니까? 생산속도를 빠르게 하는 기술이 영업비밀이지.”
“…….”
“우리 회사는 이렇게 빨리 생산해냅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영업비밀이 아니라 되레 세일즈 포인트 아닙니까? 명색이 최고투자책임자라는 분이 그 차이를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무튼, 여기에서 공개할 생각이 없습니다.”
“공개할 자신이 없는 건 아니고요?”
청중들은 잔잔한 웃음으로 대찬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잭 머피의 하얀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모욕적인 말씀은 삼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 면전에 대고 로튼 프룻츠는 배양육 시대를 얘기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 분이 모욕적인 말씀을 삼가라니. 너무 이기적이시네요.”
둘의 마이크웍이 절정에 달하자 사회자는 웃음을 지으며 슬쩍 뒤로 빠졌다.
잭 머피는 받아칠 말이 궁했다.
그는 헐떡거리는 호흡으로 대찬을 비난했다.
“그런 능글거리는 말로 나를 더 도발하지 마세요.”
대찬은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씀은 더 할 말이 없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멋대로 생각하세요!”
“그럼 마지막으로 한마디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이 끝까지……!”
잭 머피의 거친 항의에도 대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만일 지금 세계 각지에서 열심히 건축되고 있는 설비가 1.0을 위한 설비라면, 당장 공사를 중단해서 남은 대금이라도 건지실 것을 권유 드립니다. 오늘부로 그 설비들은 쓰레기가 될 테니까요.”
“남의 회사 일을 함부로…….”
“그린블러드 사측에서 제 조언을 거절한다면 그린블러드에 투자한 분들을 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린블러드에 전 재산을 부은 소시민들도 많이 계시잖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그린블러드 주식을 매각하시길 바랍니다.”
“으윽…….”
잭 머피의 얼굴이 이제는 빨간 토마토처럼 터질 듯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