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27화
마이크 햇치 부통령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법안을 만들고 통과시켰다.
네브래스카 이하 축산업이 득세하는 지역 출신의 의원들을 제외한, 아무 정치적 이득 없이 시대에 뒤떨어진 멍청이로 취급받기 싫은 절대다수의 의원들은 이 법안을 지지했다.
마이크 햇치 부통령은 그린블러드의 배양육 생산공장을 위스콘신 주에 배치해 러스트 벨트(Rust belt)를 살리겠다며, 자신이 선거공약을 지키는 성실한 정치인임을 슬쩍 알리기도 했다.
신중하겠답시고 미적거리면 고꾸라지고 말 것이다.
그 사실을 중앙정치 경험이 풍부한 마이크 햇치 부통령은 잘 알고 있었다.
부통령이 작정하고 밀어붙이는 법안은 전례 없이 빠르게 처리되었다.
미국 내에서 비도축육이 재래육과 동등한 지위를 얻어냈다.
비도축육을 별도의 품목으로 분리하지 않을 것.
재래육과 한 가지 품목으로 묶을 것.
그건 대찬과 마이크 햇치 사이에 맺어진 밀약에 포함된 조건이었다.
마이크 햇치 부통령의 강경한 태도에 미국의 축산업 협회는 비도축육을 재래육과 구분하여 취급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마이크 햇치는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완강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공청회를 TV로 방영하게 하는 강수를 두면서 축산업자들을 압박했다.
마이크 햇치는 단독으로 축산업의 대표자들과 마주 앉았다.
“만일 배양육과 기존의 식육을 다르게 취급하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들에 비싼 관세를 지불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FTA를 체결할 당시 배양육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자연히 로튼 프룻츠를 상대로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지겠죠. 그럼 산업발전에 걸림돌이 되거니와, 해외로 나가지 못한 배양육은 미국 국내시장을 더욱 잠식할 텐데, 그게 당신들한테 유리하겠습니까?”
마이크 햇치는 그런 논리로 축산업자들의 반발을 찍어 누르고 자신이 작성한 원안을 가결시켰다.
대찬은 법안이 통과되던 그 순간, 유진 깁슨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모든 약속은 지켜졌어.
홀가분한 선언이었다.
마이크 햇치나 유진 깁슨이나, 대찬과 아무리 사적으로 가깝다고 해도 대찬을 돕는 건 국익을 등지는 일이었다.
그들은 기존의 약속이 지켜지자마자 손을 털고 이 불편한 밀실을 떠났다.
모든 약속이 지켜졌다는 말은, 더 이상 마이크 햇치나 유진 깁슨이 대찬의 편의를 봐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제 그들은 그린블러드가 로튼 프룻츠를 압도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었다.
비도축육을 재래육과 한 품목으로 묶는 건 로튼 프룻츠 입장에서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별개 품목으로 분류된다면 미국 시장에서 비도축육이 합법화된다고 하더라도 로튼 프룻츠가 큰 이득을 챙길 수 없었다.
그린블러드의 비도축육이 관세 때문에 해외로 진출하기 어렵듯, 마찬가지로 무거운 관세를 짊어지고는 미국 시장을 마음껏 개척하기 어려우니까.
대찬은 법안이 가결되자마자 바로 해외영업본부를 비상 가동 했다.
“즉각 미국 법인을 설립하고 미국 시장을 개척할 준비를 서둘러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정덕춘 이사는 대찬의 지시를 즉시 이행했다.
최근 벌어진 사태 때문에 대찬과 정덕춘 이사의 사이에는 앙금이 쌓여 있었다.
앙금 좀 풀자고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대찬-마이크 햇치-아이티 사이의 삼각트레이드를 누설할 수는 없으니 대찬으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예전처럼 허물없는 대화가 오고가지 않았다.
그러나 정덕춘 이사는 오너와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업무마저 엉망으로 처리하는 얼빠진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찬의 지시를 착실하게 이행했다.
즉각 해외영업본부의 전 직원을 소집한 자리에서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쇠고기의 50%가 미국산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미국에서 소비되는 쇠고기의 100%를 로튼 프룻츠의 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법적인 보호를 받게 된 그린블러드는 즉각 주식시장 상장 절차에 돌입했다.
비상장회사로 계속 남으면서 벤처캐피탈의 투자에 의존하는 건 창립자 입장에서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투자를 받을수록 창립자의 지분은 점점 희석되니까.
로튼 프룻츠의 기술력을 확보한 그린블러드는 최소한 세계시장의 30%를 점유할 자신이 있었다.
장기적으로는 로튼 프룻츠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예측.
그렇기에 굵직한 큰손보다는 주식 시장에 올려 경영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 소액주주들의 투자를 받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상장을 통해 대량의 자금을 확보, 공격적으로 설비를 구축하고자 했다.
대찬은 해외영업본부를 통해 입수된 그린블러드의 동향을 빠짐없이 챙겼다.
정덕춘 이사는 하루에 두 번씩 그 동향을 대찬에게 보고했다.
“그린블러드의 최고투자책임자인 잭 머피가 ‘트리플 빌리언 마스터플랜’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계획을 발표했더군요.”
“트리플 빌리언 마스터플랜이라. 빌리언이면 10억이니까 트리플이면 30억. 우리 돈으로 한 3조쯤 붓겠다는 심산이네요.”
정덕춘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법안을 마련해준 정부의 기조에 발맞추기 위해, 위스콘신과 미시건을 비롯한 러스트 벨트 지역에 대규모 생산설비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거기에만 3조를 붓진 않을 텐데. 그렇죠?”
정덕춘 이사는 대찬의 말에 동의했다.
“네, 동시다발적으로 멕시코와 미얀마, 폴란드 등지에도 설비를 구축하겠다네요.”
대찬은 빙긋 웃었다.
“중국은 빠진 걸 보니, 중국 시장은 접근성 측면에서 로튼 프룻츠를 아직은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모양이네요.”
“중동 시장 역시 로튼 프룻츠가 일찍이 개척한 만큼 후순위로 미룬 모양입니다. 거기에 쇠고기가 풍부한 남미와 호주도 제외됐고요.”
“그쪽을 빼면 북미에 멕시코, 아시아에 미얀마, 유럽에 폴란드로 모든 대륙에 생산기지를 구축하시겠다.”
“단기간에 점유율을 높이겠다는 전략 같습니다. 기술이 확보된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대찬은 미소를 띠었다.
“그린블러드가 상장에 성공한다 해도 3조나 되는 거금을 빚 없이 지출할 여력은 없을 텐데.”
“아마 무리를 해서라도 자금을 동원하려고 할 겁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부채는 당연한 선택이에요.”
“잘됐네요.”
“잘됐다고요?”
정덕춘 이사는 말싸움하기조차 싫어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 회장실을 나섰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 복도를 통해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는 동선이 대찬의 눈에 훤히 보였다.
회장실의 벽면이 온통 통유리로 되어있는 까닭이었다.
대찬은 그녀가 자리로 돌아가면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로튼 프룻츠는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그린블러드는 공격적인 투자를 퍼부었다.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로튼 프룻츠가 한국 내 비도축육 유통이 합법화된 이후 폭발적인 성장을 했던 것과 꼭 닮아있었다.
로튼 프룻츠의 주가는 그린블러드의 주가와 반비례하여 폭락했다.
고점 대비 70% 선까지 쪼그라들었다.
팔랑귀 개미들은 로튼 프룻츠가 어디까지 추락할지 알 수 없으니 빨리 주식을 던지고 관망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 상황에서 격년으로 열리는 쾰른 국제식품박람회, 즉 아누가(ANUGA)가 개최되었다.
2017년의 아누가에서 로튼 프룻츠는 눈부시게 빛났다.
그린블러드 잭 머피의 콧잔등을 납작하게 눌러주고, 거대한 비도축육 케밥으로 시선을 끌었다.
그때부터 로튼 프룻츠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올랐다.
한창 로튼 프룻츠가 공격적으로 확장하던 2019년에는 2017년의 실적을 생각해 가장 좋은 부스를 배정받았다.
그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업체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2021년의 아누가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중앙에서 많이 비껴간, 처음 아누가에 참가했던 2017년보다는 낫지만 2019년보다는 한참 뒤떨어지는 위치의 부스를 배정받았다.
“…오너가 직접 왔는데 이런 푸대접을 하다니, 실망이네요.”
대찬은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주최 측에 항의했다.
주최 측은 대찬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봤다.
“조 회장님, 오너의 참석 유무는 부스의 배정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가 없다고요? 이쪽에서 성의를 보이면 주최 측에서도 당연히 성의를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로튼 프룻츠 측의 성의는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성의에 반드시 같은 성의로 보답하라는 건 냉혹한 비즈니스 관계에서 너무 무른 생각 아닙니까.”
“뭐라고요?”
“로튼 프룻츠는 여전히 우리 아누가의 중요한 파트너입니다. 저희로서도 조 회장님과 이렇게 날 선 언쟁을 피하고 싶습니다.”
“…….”
여전히라는 단어가 굴욕적으로 들렸다.
“회장님, 우리는 2019년에 로튼 프룻츠를 최상의 대우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2019년에는 회장님이 직접 참석하지 않으셨죠.”
“제가 참석하진 않았지만 사내 최고위급 인사를 파견했습니다.”
“최고위인사는 회장님 한 명일 뿐, 최고위급이란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고위급이었죠.”
“…….”
“회장님은 왜 그때 최선의 성의를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왜 지금은 최선의 성의를 보이십니까?”
“…….”
“조 회장님 역시 아누가를 비즈니스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우선하는 비즈니스가 있으면 당연히 아누가 참석은 얼마든지 후순위로 밀려도 좋습니다.”
옳은 말이다.
대찬은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찾지 못했다.
주최 측 인사는 다시 대찬에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이번에 로튼 프룻츠가 후순위로 밀린 것도 우리에게 우선하는 비즈니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우선하는 비즈니스가 그린블러드다, 이 말입니까?”
주최 측 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누가 뭐래도 올해의 주인공은 그린블러드니까요.”
“너무 섣부른 판단이신 것 같네요.”
“그렇습니까? 그럼 정정하지요. 올해 지금까지의 주인공은 그린블러드. 빌런은 로튼 프룻츠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반론의 여지도 없습니다.”
“하.”
“그러니 조 회장님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가업체의 항의에 저 같은 고위급인사가 친절하게 설명해드리는 것도 로튼 프룻츠에 엄청난 성의를 보이는 것이니까요.”
주최 측 인사는 끝까지 대찬에게 물을 먹이고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대찬에게서 멀어져갔다.
대찬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주인공이 그린블러드라고 하셨습니까. 아마 그 판단은 이번 행사가 끝나면 바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예, 최선을 다하세요.”
아누가 주최 측 인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늦추지도 않으며 대꾸했다.
대찬의 뒤에 서 있던 직원들은 힘 빠진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
오다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이 자리도 충분히 좋은 자리예요. 4년 전에 비하면.”
“하하, 나 완전 물 먹긴 했나 봐요. 다혜 씨가 그렇게 친절한 목소리로 위로를 다 하고.”
“아니, 그게 아니라…….”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공이 바뀔 거라는 건 단순히 분에 못 이겨서 한 말이 아니니까.”
오다혜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회장님이 허세를 다 부리시고. 힘들긴 힘드신가 봐…….’
그린블러드의 잭 머피는 국제식품박람회 아누가의 중심부를 차지했다.
4년 전에 대찬에게 일침을 당했던 그는, 이번에야말로 설욕할 기회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린블러드의 부스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전례 없이 당당한 목소리로 세일즈를 했다.
“배양육 시장의 주인은 이제 그린블러드의 몫입니다. 우리는 거대한 미국 시장을 안방으로 두고 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로튼 프룻츠가 앞서 있지 않습니까?”
“몇 걸음 차이죠. 아시겠지만 서양인은 동양인보다 평균적으로 다리가 더 길답니다. 저는 아니지만. 그 정도 차이야 금방 따라잡아요.”
잭 머피는 가감 없이 로튼 프룻츠를 향한 네거티브 공세를 퍼부었다.
저쪽에서 받아칠 말이 변변찮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말은 더 날카롭게 나갔다.
그가 예상하는 로튼 프룻츠의 반박이야 뻔했다.
아이티 정부와 짜고 훔친 기술이 아니냐.
그린블러드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기업이다.
그런 공격은 오히려 자충수다.
그린블러드의 추격에 초조함을 드러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잭 머피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30억 달러의 자금을 동원하여 전 세계에 그린블러드의 상표가 붙은 배양육을 생산할 겁니다. 전 세계의 식탁을 우리 그린블러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렇게 영업에 한창 열중이던 때.
잭 머피의 비서가 다가와 귀띔했다.
“머피 씨, 시간이 됐습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알았어.”
“정시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실 걸 권유 드립니다.”
“아, 물론이야. 그 얄미운 한국 놈이 날 기다려야지. 내가 그놈을 기다릴 순 없잖아?”
잭 머피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부스에 모인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자자, 20분 뒤에 이번 박람회의 가장 큰 행사가 열리는 거, 다들 알고 계십니까?”
“아, 거기 머피 씨도 연사로 나온다고 들었는데. 대담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어요. 이름이 뭐더라?”
“Beyond the beef. 쇠고기를 넘어서.”
아누가의 주최 측은 이 프로그램을 행사의 하이라이트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