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26화
“회장님, 말장난으로 넘길 일이 아닙니다. 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닙니다.”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완전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제 뜻에 따라주세요.”
“지금 속속 나오고 있는 결과는 불완전한 결과입니까?”
“네.”
“언제까지 회장님의 심술에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합니까?”
대찬은 정덕춘 이사를 바라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꽤 오래 다물고 계셔주셨으면 합니다.”
“허!”
정덕춘 이사는 말을 잃었다.
상황이 로튼 프룻츠에게 아주 나쁘게 돌아가자 대찬을 싫어하는 이들은 깨소금 맛이었다.
지금껏 로튼 프룻츠의 미칠 듯한 성장에는 아무런 코멘트도 남기지 않았던 그린블러드 미트는 극히 이례적으로 언론에 자신들의 입장을 내보냈다.
그린블러드 미트의 최고투자책임자인 잭 머피는 헤벌쭉 웃으며 로튼 프룻츠를 비꼬았다.
“너무 늦게 이름값을 했네요. 이제 로튼 프룻츠가 이름 그대로 부패한(rotten)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군요.”
여기에 그린블러드와의 합작회사인 코테츠 키친을 계열사로 거느린 일본의 시마 회장도 말을 얹었다.
“만리장성은 개미구멍으로 무너지는 법. 이제 로튼 프룻츠에게 남은 건 붕괴뿐입니다.”
반응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들은 대찬에게 달려갔지만, 대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조대찬, 대차지 못한 RUN!’
지금껏 대찬에게 변변한 유효타를 내지 못했던 언론은 그렇게 그를 조롱했다.
대찬은 모진 수모를 당하면서도 아이티에 취했던 조치를 철회하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이를 일컬어 사춘기의 반항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렸다.
로튼 프룻츠 아이티 법인이 아이티 정부의 항의를 무시하자, 아이티 정부도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정부는 즉각 로튼 프룻츠에게 제공했던 각종 세제혜택을 철회했다.
게다가 아이티 국민을 고용했을 때 정부에서 급여를 보조해주던 특례 역시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흠씬 두들겨 맞고 나서야 로튼 프룻츠 아이티 법인 대표는 다시 아이티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3형 비도축육의 유통단가를 50% 인상하겠다는 지난 조치는 한시적으로 유예하겠습니다.”
싹싹 빌면서 취소하겠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한시적 유예 타령.
아이티 국내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티로 실리콘밸리의 손님이 찾아왔다.
아이티 상공부장관인 스탠리는 그 손님과 극비리에 회동했다.
손님은 그린블러드 미트의 최고투자책임자인 잭 머피였다.
스탠리는 자신의 자택에서 잭 머피와 독대를 나눴다.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요즘이 그린블러드가 우리 아이티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는 시기가 아니었나 합니다.”
“하하, 예. 이유야 설명 안 해도 되겠고요.”
스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로튼 프룻츠의 조치에 크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로튼 프룻츠의 미스터 초는 벼락부자입니다. 나이도 어리죠. 그의 기질이 회사를 단기간에 성장시키는 데는 적합했을지 모르지만, 이미 성장한 회사를 견실하게 유지하는 데는 아주 부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동감합니다. 나와 대통령 각하는 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잭 머피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인용하신 원숭이 꽃신 얘기처럼 배양육 없는 아이티는 앞으로 상상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뭐,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슨 용건이 있어서 저를 아이티까지 부른 겁니까?”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되는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스탠리의 말에 잭 머피의 노란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두에게 득이 되는 제안?”
“우리 아이티 경찰은 로튼 프룻츠 사옥에 대해 압수수색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그런데요?”
잭 머피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튼 프룻츠가 이번 일로 생채기를 입기는 했지만 애초에 아이티는 그다지 큰 시장이 아니었다.
압수수색을 하면 대찬에게 제법 큰 스트레스를 안길 수 있겠지만, 잭 머피가 열광할 정도로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잭 머피를 비롯한 그린블러드의 구성원들이 흥미를 가지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로튼 프룻츠의 모든 생산설비에 대한 압수수색도 진행할 겁니다.”
“…설비에 대한? 명분이 있습니까?”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지요.”
“그래서요?”
잭 머피는 확실히 이전보다 관심이 동한 눈치였다.
“로튼 프룻츠의 생산설비 내에 보관되어 있는 모든 연구자료 역시 압수의 대상이 될 겁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로튼 프룻츠의 실무자로 일하는 우리 국민의 진술에 의하면, 사옥과 설비 내에는 로튼 프룻츠의 비도축육 생산 노하우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흐음…, 가능하면 비도축육이라는 단어 대신 배양육이라는 단어를 써주시죠.”
잭 머피는 그 와중에 대찬이 만들어 일반화시킨 비도축육이란 단어를 내켜하지 않았다.
“얼마든지요. 나도 그 말이 입에 붙어서 그렇지 이제부터는 배양육이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좋습니다. 그 노하우를 압수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죠?”
“네, 압수한 자료를 모두 그린블러드에게 넘기겠습니다.”
“우리에게 말입니까?”
잭 머피는 초등학생이 덕지덕지 붙인 찰흙처럼 비대한 목살 덕분에 스탠리 모르게 군침을 삼킬 수 있었다.
“네, 그린블러드에게는 다시없을 기회라고 생각하는데요.”
물론이다.
아직까지 비도축육의 상용화 단계에도 미치지 못한 그린블러드였다.
그런데 아이티 정부가 슬쩍 뒤로 로튼 프룻츠의 영업비밀을 넘긴다면.
그야말로 복권 당첨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일 성공한다면 그린블러드는 일약 로튼 프룻츠의 경쟁사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럼 한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실리콘밸리의 물주들이 그린블러드를 주목할 것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뒷배로 두었다는 것도 로튼 프룻츠에게 확실한 우위를 점할 장점이었다.
기술만 습득한다면 로튼 프룻츠를 비도축육의 왕좌에서 끌어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
잭 머피는 저도 모르게 스탠리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이티에서 그저 로튼 프룻츠에게 보복이나 하겠다고 이런 계획을 꾸미진 않으셨을 테고.”
“우리는 그 기밀을 확보해도 활용할 인적 자원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충분히 활용하고도 남죠.”
스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기 때문에 그린블러드가 배양육의 상용화에 성공하면, 우리 아이티에 설비를 지원해줬으면 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원가 책정과 유통단가 책정은 우리 아이티 정부의 몫으로 남겨주셔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아예 공짜로 비도축육을 찍어내달라고 해도 잭 머피는 얼마든지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아이티 국민이 배부르게 먹고도 남을 비도축육을 공짜로 내줘도 괜찮다.
그 정도 비용이야 세계 시장에서 벌어들일 이익을 생각하면 손실의 축도 못 들 정도니까.
“로튼 프룻츠에게 한 번 당했으니 이와 같은 사항을 영구적으로 적용해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물론이에요.”
“단, 걱정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니요.”
“우리가 로튼 프룻츠의 지적재산을 아무렇지 않게 빼앗아 그린블러드에 건넨다면, 비판받을 소지가 다분합니다.”
“어차피 잠깐 시끄럽고 말 겁니다.”
“만일 국제단체나 미국 정부 차원에서 압력이 들어온다면 곤란해요. 우리나라 GDP의 상당 부분을 국제원조에 의지하고 있으니.”
잭 머피는 씩 웃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미국 정부가 아이티 정부를 보호할 겁니다. 나바사 섬을 아무런 대가 없이 할양한 아이티 대통령님의 결단이 빛을 발할 겁니다.”
“하지만 확실한 보장이 필요합니다.”
“그건 우리가 개입할 필요도 없겠는데요. 대통령 각하와 각별한 사이인 마이크 햇치 씨가 부통령이 됐습니다. 정부 간에 밀약을 맺으면 해결될 겁니다.”
“예, 그것만 해결된다면 우리의 거래는 문제없이 성사될 겁니다.”
잭 머피는 흐흐 웃으며 두툼한 손을 스탠리에게 내밀었다.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래는 성사됐습니다.”
“좋아요.”
둘은 굳게 악수했다.
모든 것은 스탠리의 말대로 이루어졌다.
아이티 경찰은 로튼 프룻츠 아이티 법인 사무실과 생산설비를 대상으로 한 전대미문의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아이티 법인 임직원들의 비자를 중단시키고 한국으로 쫓아냈다.
아이티 법인 대표는 악을 쓰며 쫓겨나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우악스런 아이티 경찰이 기어코 그를 한국행 비행기에 태워버렸다.
그리고 역시 스탠리의 말대로, 로튼 프룻츠의 기밀이 아이티 경찰의 손에 넘어갔다.
핵심기술을 분간해낼 능력이 없는 아이티 경찰은, 그린블러드의 은밀한 조언에 따라 자료를 간추렸다.
그리고 그 자료는 곧바로 그린블러드의 손에 넘어갔다.
생산설비의 핵심 기계장치들 역시 미국으로 밀항하는 불법 이민자가 탄 선박에 실려 그린블러드의 품에 안겼다.
로튼 프룻츠는 아이티 시장에서 전면 철수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아이티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그 항의는 로튼 프룻츠가 아이티 정부의 항의를 무시했던 것처럼 무시되었다.
그리고 그 사태가 세간의 관심에서 슬슬 멀어지던 4월.
잭 머피는 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으로 발표했다.
“우리 그린블러드는 오랜 연구 끝에 마침내 배양육의 상용화에 성공했음을 알립니다. 우리 미국 국민들은 아주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쇠고기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린블러드는 준비 기간 동안에 기술개발이 아니라, 로튼 프룻츠로부터 제기될 특허소송에서 교묘하게 도망갈 방법을 찾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완벽하진 않아도 법원에서 대충 눈감아줄 정도의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은 마침내 로튼 프룻츠와 비슷한 수준의 비도축육을 생산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회장님! 그린블러드가 이런 미친 짓을 잘도……!”
진위생은 화들짝 놀라 대찬에게 달려왔다.
대찬의 표정은 그와는 상반되게 여유로웠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이티 정부에게서 기밀을 빼돌린 게 분명합니다.”
“아마도요.”
“주가가 폭락하고 있는데…….”
“우리의 선택은, 전략적 인내입니다. 그린블러드가 비열한 짓을 했다며 언론플레이만 하세요.”
“언론플레이는 언론플레이일 뿐, 실효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네, 필요 없습니다.”
“회장님…….”
“아, 실효적인 방법 하나는 제가 제안하겠습니다.”
“무슨 방법입니까.”
대찬은 웃으며 대답했다.
“주식이 폭락했다고 했죠? 많이 사두세요. 좋은 투자가 될 겁니다.”
“허…….”
진위생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린블러드가 비도축육의 상용화에 성공했다는 발표가 나오자마자, 마이크 햇치 부통령이 움직였다.
그는 경제와 에너지 분야를 전담하는 부통령답게 이 사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한국의 배양육 업체인 로튼 프룻츠의 RF 미트는 연 매출이 수십억 달러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금액은 하루가 다르게 폭증하고 있습니다.”
마이크 햇치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그린블러드의 연구성과는 이런 거대한 시장을 양분할 정도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법이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도가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이 거대한 시장은 영영 한국 기업의 차지가 되고 맙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마이크 햇치는 배양육의 합법화를 위한 법안을 직접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명분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로튼 프룻츠의 엄청난 성장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고 있었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시장을 혼자서 유유자적 누비는 로튼 프룻츠를 세계는 아픈 배를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그린블러드가 여기에 대항할 힘을 얻었다.
여기에 반대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멍청이로 취급받을 뿐이었다.
예상대로 미국 축산업자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마이크 햇치 부통령이 자신의 정치력으로 충분히 무마할 수 있었다.
게다가 축산업자들이 득세하는 지역은 네브래스카, 텍사스, 아이오와, 애리조나 등지.
모두 마이크 햇치가 소속된 민주당이 아니라 공화당을 열렬히 지지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목소리를 마이크 햇치가 무시해도 정치적으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