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25화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스탠리는 쉬지 않고 대찬을 찬양했다.
듣는 장본인이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아이티에서 대찬을 국빈으로 대우하는 건 과한 조치가 아니었다.
아이티의 GDP는 100억 달러, 10조가 조금 넘는 수준.
그런데 로튼 프룻츠의 매출이 그 정도였다.
게다가 아이티의 식량자급률, 특히 동물성 단백질 보급에 로튼 프룻츠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로튼 프룻츠가 들어서기까지 아이티의 1인당 육류소비량은 연간 10kg 미만이었다.
미국은 90kg, 한국은 50kg 수준이니 그 차이가 확연했다.
미국은 고기를 하도 많이 먹어서 탈이었지만 아이티에서는 그 반대였다.
배만 부르다고 사람이 사는 게 아니었다.
고른 영양 섭취가 중요하다는 건 유치원생도 아는 사실.
로튼 프룻츠의 존재가 단백질과 지방의 섭취에 지대한 기여를 하고 있었다.
이는 여러 보건지표와 경제지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설비를 가동하고 비도축육을 유통하기 위해 5천 개의 일자리를 새로 창출한 건 덤이었다.
다시 이런 것은 국민의 정부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다.
아이티 정부에서 로튼 프룻츠를 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참 입에 침이 마르도록 대찬을 추켜세우던 스탠리는 뒤늦게 해야 할 질문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이티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대통령님을 좀 뵙고 싶어서요. 일정을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로튼 프룻츠 공장, 아 목장이라고 하나요? 목장을 시찰하기로 돼 있습니다. 다른 데 가실 것도 없이 로튼 프룻츠 사옥에서 뵈면 될 것 같습니다.”
아이티의 대통령은 로튼 프룻츠를 자신의 선전선동 수단으로 아주 철저히 이용했다.
시찰을 간다는 것도 실은 국민들에게 보여줄 사진을 찍으러 가기 위함이리라.
그건 그의 사정이니 대찬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잘됐네요. 대통령께 말씀을 전해주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날 오후, 사진 몇 장을 찍자마자 아이티의 대통령은 대찬과 독대 자리를 마련했다.
대통령은 웃으면서 대찬에게 인사를 건넸다.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나바사 섬은 진즉에 할양됐고, 마이크 햇치 씨는 미국의 부통령이 됐고, 우리나라는 로튼 프룻츠 설비를 얻었고.”
“네, 하지만 마지막 단추를 끼워야 그 계획이 완수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아이티의 대통령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로튼 프룻츠의 미국 시장 진출. 저도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그거야 아이티 대통령 입장에서는 대찬과 마이크 햇치 양자 간의 문제였다.
이미 자기 손을 떠난 문제에 대해서 그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자 간의 거래가 성립해야하는 삼각트레이드의 조건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아이티는 나바사 섬의 주권을 미국에 할양한다.
-로튼 프룻츠는 아이티에 비도축육 설비를 지원한다.
-마이크 햇치 상원의원은 정치력을 동원해 미국 내 비도축육의 유통을 가능하게 한다.
로튼 프룻츠의 조건인 ‘미국 내 비도축육의 유통’이 불가능한 상태.
이어지는 대찬의 말이 다시 아이티 대통령을 복잡한 문제에 끌어들였다.
“대통령께서 좀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내, 내가요? 내가 돕고 싶어도 도울 일이 있어야 말이지요.”
“네, 대통령께서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일입니다.”
아이티의 대통령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귀찮은 문제에 다시 연루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대찬은 그 연루되는 데 따른 대가나 보상을 제시하지 않았다.
대찬은 대통령에게 무료봉사를 요구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그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대찬이 열 뻗친다고 생산설비 플러그를 뽑으면 아이티 정부가 전복될 수도 있었다.
대통령과의 면담을 마친 대찬은 로튼 프룻츠 아이티 현지법인 임원들과 둘러앉았다.
아이티 현지법인 대표의 직급은 상무.
그 아래 두 명의 이사가 있었다.
로튼 프룻츠가 비교적 작은 규모였을 땐, 임원이라고 하면 하나같이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민승기를 비롯해 한태윤, 오윤 등.
그러나 규모가 연간 조 단위로 불어나다 보니, 로튼 프룻츠에 들어온 임원들의 숫자도 급격히 불어났다.
아이티 법인에 파견된 임원들도 대찬과는 몇 차례 면식이 있을 뿐.
대찬을 깊이 잘 알지는 못했다.
윗사람은 모르는 만큼 어렵다.
그들에게 대찬은 그저 어리지만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대찬과 둘러앉은 아이티 현지법인 임원들은 깡깡 얼어있었다.
대찬은 딱히 긴장을 풀어주지 않았다.
긴장한 상태로 듣는 것이 그들에게도 이롭다는 판단이었다.
“지금부터 제 말씀을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우리 로튼 프룻츠 아이티 법인은 다음주부터 3형 비도축육의 판매가를 50% 높은 가격으로 책정하겠습니다.”
대찬의 말에 아이티 법인 임원들은 술렁였다.
아이티 현지법인 대표인 상무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로서는 용감한 제언이었다.
대찬은 그의 솔직한 말에 미소를 띠었다.
“자료를 보니까 3형 비도축육은 아이티 내 유통량이 아주 적던데요.”
“맞습니다. 분쇄육 형태가 아니라 정형된 고기 형태인 데다가 풍미를 위해 지방세포까지 합성했기 때문에 상당히 값이 비쌉니다.”
“그렇죠. 상류층을 노린 제품인데, 아이티에는 그 정도의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가 타국에 비해 적을뿐더러 멀쩡한 고기가 있는데 굳이 3형 비도축육을 선택할 유인도 상대적으로 적죠.”
“네,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형 비도축육의 가격을 인상하는 건 회사 입장에서 그다지 도움도 안 되는 데다가…….”
“아마도 1, 2형 비도축육을 주로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불안감과 거부감을 높이겠죠.”
“3형 비도축육의 가격을 급격히 인상하는 건 1, 2형도 곧 그렇게 할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니까요.”
“맞습니다.”
아이티 법인 대표는 다 알면서 그러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적절한 처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 부적절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대찬의 말에 아이티 법인 대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이유는 이 자리에서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물정 모르고 오판을 내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 말이 길었습니다. 그대로 진행하세요.”
“괜찮겠습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은 게 아니라 꼭 필요한 조치입니다.”
확실히 아이티 시장은 돈만 따졌을 때 그다지 매력이 없었다.
‘아이티 시장에서 탈출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려고 이런 조치를 내리는 걸까…….’
아이티 법인 대표의 뇌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나 대찬이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 이상, 그의 추측은 추측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의 처분에 따르겠습니다.”
“아마 반발이 심할 겁니다. 반정부 폭력시위가 하루도 안 거르고 일어나는 나라인데. 우리는 더 만만하겠죠.”
임원들은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했지만 대찬의 말이 사실이기에 속으로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대찬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임원들을 바라봤다.
“여러분을 향한 폭력행위가 자행될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
“…예, 아무래도…….”
“조치를 발표한 이후, 업무보다는 여러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개인 주택이 아니라 보안이 유지되는 호텔에 머물러주십시오. 비용은 모두 회사에서 부담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경비 인력도 추가로 고용하겠습니다. 아울러 업무 역시 당분간 호텔에서 봐주셨으면 합니다. 절대 한 사람도 다치면 안 됩니다. 안전, 또 안전. 아시겠죠?”
“예, 회장님.”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처분을 내려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감수하는 모든 부담을 회사가 충분히 고려하고 합당하게 대우해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모쪼록 견뎌주십시오.”
대찬이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다.
임원들도 납득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대찬은 마음 같아서는 저들과 함께 아이티에 머물면서 고통을 분담하고 싶었지만, 아이티에만 매달릴 수 없는 처지였다.
대찬은 미안한 마음만 아이티에 남기고 귀국했다.
대찬이 고용한 경비 인력들이 로튼 프룻츠 임직원들이 머무는 호텔에 좍 깔렸다.
아이티 정부는 이 조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들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아이티 현지법인 대표는 선언했다.
일개 해외법인장의 발표가 아이티 언론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그만큼 로튼 프룻츠는 아이티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아이티 법인 대표는 긴장이 역력한 모습으로 발표했다.
“로튼 프룻츠 아이티 이사회는 내일부터 아이티 국내에 유통되는 3형 비도축육의 정가를 50% 인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는 1, 2형과 달리 아이티 국민의 필수적인 영양섭취와 관계가 크지 않은 3형 비도축육의 수익률 제고를 위한 것으로…….”
로튼 프룻츠의 조치는 그야말로 아이티 전국을 들썩이게 했다.
아이티 국민은 선한 구세주로 여겼던 로튼 프룻츠가 드디어 가면을 벗어던지고 사악한 외국계 기업의 면모를 드러냈다며 분노했다.
당장의 조치는 3형 비도축육에 한정되지만, 머지않아 1, 2형 비도축육의 유통가격을 인상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아이티 국민은 믿었던 만큼 심한 배신감을 느끼며 로튼 프룻츠의 로고가 그려진 깃발을 불태우고 허공에 AK 소총을 갈기며 불만을 터트렸다.
아이티 정부도 이에 호응하여 로튼 프룻츠의 발표에 강력히 항의했다.
로튼 프룻츠를 전담하면서 상공부 장관에 임명된 스탠리가 직접 항의의 뜻을 발표했다.
“로튼 프룻츠의 조치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가혹하고 악랄합니다. 아이티 정부는 그 조치를 당장 철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로튼 프룻츠의 시녀’라는 별명까지 들어가며 로튼 프룻츠에게 협력적이었던 스탠리였다.
그는 전례 없이 강력한 어조로 성토했다.
“‘원숭이 꽃신’이라는 한국의 동화가 있습니다. 오소리가 원숭이에게 꽃신을 대가 없이 선물했는데, 꽃신을 신은 원숭이는 곧 발바닥의 굳은살이 점점 사라져 꽃신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오소리는 아주 비싼 값에 꽃신을 팔아 이득을 챙겼다는 이야기입니다. 로튼 프룻츠는 오소리처럼 비열한 행위를 당장 중단하십시오!”
아이티 정부의 거센 항의에도 로튼 프룻츠는 조치를 철회하지 않았다.
‘이번 조치에 1, 2형 비도축육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답변으로만 일관했다.
사람들은 ‘이번 조치’에서 포함하지 않았다는 건, ‘다음 조치’에서는 포함할 수 있다는 것 아니냐며 분노를 토했다.
성난 민중은 시위대로 돌변했고, 로튼 프룻츠 임직원들이 머무르는 호텔로 달려가 전투적으로 항의했다.
그 과정에서 고용 경비인력 두 명이 경상을 입었다.
아이티 상황에 대한 소식은 한국에도 전해졌다.
대기업의 수장으로서는 보기 드문 ‘선한 의지’를 지닌 대찬을 칭찬하던 언론은 바로 돌변해서 대찬을 거칠게 공격했다.
심지어는 전길재가 편집국장으로 있고, 대찬의 자본이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극동일보마저 대찬을 비판하고 나섰다.
‘위선자는 악인보다 나쁘다.’
전길재 국장은 직접 펜을 들어 대찬을 비난하는 사설을 신문에 실었다.
대찬은 그걸 읽고 쓴웃음을 지었다.
“극동일보한테 공격받는 건 오랜만이네.”
대찬의 우군으로 분류되었던 사람 중에 그를 공격하는 건 비단 전길재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혈육을 제외하면 대찬과 가장 가까운 친구인 국회의원 최재한마저 대찬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로튼 프룻츠의 이번 조치는 로튼 프룻츠만의 일이 아닙니다. 해외에 진출한 한국 기업 전체의 신뢰도에 타격을 주는 사건입니다. 로튼 프룻츠의 이번 조치에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
이번 조치로 대찬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오직 로튼 프룻츠의 주식뿐이었다.
드디어 조대찬이 자본주의자로서의 본색을 드러냈다며.
앞으로 수익 사업에 노골적으로 전념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로튼 프룻츠의 주가는 상승했다.
대찬은 뛰어오르는 주가가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았다.
아이티 법인을 관할 하에 두고 있는 해외영업본부장 정덕춘 이사도 대찬에게 적지 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회장님, 어리석은 조치였습니다. 굳이 아이티 현지로 직접 날아가 이런 조치를 명령하신 건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정 이사님까지 이렇게 나오시니 이번 조치가 아주 진정성 있는 나쁜 짓이었다는 게 증명됐네요.”
“나쁜 짓이요? 이건 나쁜 짓이 아니에요. 이런 비난을 감수하면서 우리가 이득을 본다면, 그건 나쁜 짓이죠. 근데 이건 우리한테도 실익이 없어요. 이건 멍청한 짓입니다.”
“나쁘고 멍청한 짓이겠죠.”
느물거리는 대찬을 보고 정덕춘 이사의 미간에 뚜렷한 주름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