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24화
대찬은 그렇게 자신감을 얻은 상태에서 마강국과 함께 미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유진 깁슨 하원의원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는 마이크 햇치가 부통령이 되면서 공석이 된 미네소타 주 상원의원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만일 그가 상원의원에 당선된다면 이제 명실공히 미국 정치의 핵심으로 자리 잡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감님이나 하는 줄 알았던 상원의원을 유진 깁슨이 노리고, 자기는 벌써 회장님 소리를 듣고.
저절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한창 지역 기반을 닦는 유진 깁슨은 의회가 있는 워싱턴보다 미네소타에 더 자주 머문다고 했다.
마강국이 끈질기게 동행하려는 것을 만류하고 대찬은 홀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 거래는 기밀 사항이었으니.
대찬은 오랜만에 옛 추억도 반추할 겸, 잠깐 몸담았던 미네소타 대학 근처의 피자 가게에서 유진 깁슨과 만났다.
큼지막한 조각으로 나온 페퍼로니 피자를 한 입 크게 베어 문 대찬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딱 한 입 먹으니까 옛날 그때가 생각나네.”
워싱턴의 케케묵은 정치에 이골이 나있던 유진 깁슨도 대찬과 먹는 피자 한 조각에 일탈한 기분이었다.
“아, 진짜 그립다.”
벌써 2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나 있었다.
“그때는 피자 한 조각, 콜라 한 잔, 바이킹스 경기 한 게임이면 즐거웠는데.”
“요새는 뭘 해도 즐겁기가 힘들지.”
대찬은 피자를 오물거리며 입가에 묻은 토마토소스를 휴지로 닦았다.
“그래, 배부른 투정이지만.”
잠깐 내려놓은 피자의 싸구려 치즈는 실내까지 스미는 미네소타의 겨울바람에 금세 딱딱하게 굳어갔다.
유진 깁슨은 큼지막한 피자 한 조각을 말없이 먹어 치웠다.
먹기만 한 게 아니라, 먹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대찬은 무언가 골몰히 생각할 때면 유진 깁슨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곤 한다는 걸 알았다.
피자를 다 먹은 유진 깁슨은 얕은 숨을 뱉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몸이 열 개라도 바쁜 네가 오랜만에 대학 구경이나 하자고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테고.”
대찬은 웃기만 할 뿐, 말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유진 깁슨은 아래로 고정했던 시선을 올려 대찬을 흘끔 봤다.
“정산을 받으러 왔겠지?”
“약속이 유효한 걸 확인하러 왔다는 게 정확하겠지.”
“유효해. 네가 토론회를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봤지. 의지가 있으신 건 분명히 확인을 했어.”
“정치는 타이밍이야. 특히 배양육은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야. 서투르게 접근했다가는 아무 소득도 없을 거야.”
대찬은 그 말에는 공감했다.
아마추어 같이 굴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거라는 건 대찬이 몸소 겪어 아는 사실이었다.
대찬에게도 운때 맞게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여태 로튼 프룻츠는 그린블러드와 마찬가지로 수익을 창출하지 못한 채 허덕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특히 미국의 축산업 규모는 한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물론 대부분의 산업에서 미국이 한국보다 앞서있겠지만 축산업은 그 차이가 더했다.
미국에서 키우는 소는 1억 마리인데 한국은 300만 마리다.
어림잡아도 규모가 30배 넘게 차이 나니, 배양육을 합법화한다면 저 1억 마리 소들의 주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 저런 사정 다 봐주면서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마이크 햇치의 임기는 4년.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또 막상 일을 진행하려고 하면 여유가 넘치는 정도는 아니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새로운 임기 4년이 추가되기는 한다.
그러나 대찬은 그때까지 기다려줄 용의가 전혀 없었다.
“정치인들은 당선되고 나서는 하고 싶은 일부터 하잖아? 막 당선됐을 때가 힘이 가장 세니까. 국민들 지지도 있고.”
“그렇지.”
“나는 배양육 합법화가 부통령님의 하고 싶은 일이었으면 하는데.”
“…뭐, 물론……. 이건 부통령님께도 일종의 부채야. 4년 내내 네 눈치 봐가면서 설설 기느니 얼른 해치워주는 쪽이 좋지.”
대찬은 빙긋 웃었다.
“그러시다면 더 드릴 말씀이 없겠네.”
“부통령께서는 의지가 충분히 있으셔. 대통령도 부통령의 중앙정치 경력을 높이 사는 편이야. 그래서 단순한 조언가형 부통령이 아니라, 상당한 권력을 공유할 거라고 하셨어.”
“그거 좋네.”
“외교·안보 분야와 경제ㆍ에너지 분야 중에서 부통령께서는 후자를 맡기로 했어. 다분히 널 의식한 결정이야.”
조 바이든은 상원의원 시절 외교위원장을 지낼 만큼 외교·안보 분야에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주 종목을 부통령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마이크 햇치 부통령은 이전에 ‘햇치 모델’이라는 도시재건사업을 실시해 낙후된 도시를 되살린 경력이 당선에 크게 작용했다.
부통령이 외교·안보보다는 경제ㆍ에너지 분야를 가져가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유진 깁슨은 무슨 대단한 호의를 베푼다는 듯 말했다.
정치인의 화법에야 이골이 날 대로 난 대찬은 굳이 지적하지 않고 씩 웃기만 했다.
“법을 통과시키는 게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 알고 있어. 지금부터 시작해야 제때 통과시킬 수 있을 거야.”
대찬이 말하는 ‘제때’란 대찬의 인내심이 유지되는 기간을 의미했다.
즉, 인내심이 바닥날 때까지도 법을 통과시키지 못하면 이쪽에서도 압박카드를 꺼내겠다는 뜻.
험한 말은 최대한 삼갔지만 대찬의 의미는 유진 깁슨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유진 깁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하지만 이건 정치권의 의지만으로는 어려워.”
“그게 무슨 말이지?”
“축산업자들의 반발, 그건 충분히 우리가 케어할 수 있어.”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 반발을 무마하라고 마이크 햇치의 등을 밀어준 것 아닌가.’
유진 깁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반발을 무마하려면 이득이 있어야 돼. 법을 통과시켜서 누군가는 이득을 봐야 한다고.”
“이득이라.”
“작은 이득이라도 있어야 그걸 부풀려서 나라의 이득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득은 실리콘밸리의 배양육 업체들이 보겠지. 그리고 우리 로튼 프룻츠하고.”
“초, 너희 회사를 가볍게 보면 안 돼. ‘배양육은 로튼 프룻츠’ 이 공식은 세계가 다 알아. 지금 이 법을 만들겠다고 하면 로튼 프룻츠와의 밀월관계가 금방 들통날 거야.”
“뭐?”
대찬은 황당해하며 피식 웃었지만 그에 비해 유진 깁슨은 진지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그래서, 우리 회사가 너무 유명하니까 법을 못 만들어주시겠다?”
“실리콘밸리의 배양육 업체들이 이 법에 즉각적인 이득을 볼 만큼 아직 성장하지 못했다는 뜻이야.”
별일이 다 있다.
경쟁업체가 충분히 못 따라오는 것도 독이 된다니.
“우리 로튼 프룻츠도 그린블러드를 포함한 배양육 업체들의 상황은 예의주시하고 있어.”
“그래, 그럼 잘 알겠네. 그린블러드는 지금 존폐위기야. 받아둔 투자금은 다 써버렸고, 너희 회사가 빠르게 치고 나가는 바람에 다른 배양육 업체들한테 투자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어.”
“그럼 어떡하라는 거야? 우리가 그린블러드를 도와주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거야.”
유진 깁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도 지금 열심히 방법을 찾아보고는 있지만, 실리콘밸리의 배양육 업체들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않는 이상 타이밍을 잡기가 상당히 어려워져. 핑계가 아니야. 현실이 그래.”
대찬은 유진 깁슨을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일단 알았어. 하지만 이걸 내내 구실 삼아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건 용납 못 해.”
“초가 입만 벙긋하면 부통령 라인은 싹 다 전멸이야. 반역죄로 처벌될지도 몰라.”
“알아.”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도 괜히 배짱 튕길 이유가 없다는 말이야. 방법을 찾는 중이야.”
“몰래 히트맨 보내서 암살하려고나 들지 마. 나 한국에서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람이거든? 나 죽으면 부통령이 죽인 거라고 유언장 써서 금고에 넣어놨어.”
유진 깁슨은 싱겁게 웃었다.
“초는 참 여러 군데 재능이 있네. 이번에는 소설가에 도전해보는 게 어때?”
대찬은 빙긋 웃었다.
이번 유진 깁슨과의 만남은 성공적이라고 자평할 수 없었다.
압박을 넣기는 했지만 즉각적인 효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말대로 그린블러드가 충분히 무르익지 않으면 아무리 갓 출범한 정부의 부통령이라도 일을 꾀하기 어려웠다.
‘그린블러드가 법안의 혜택을 받을 만큼의 배양육 업체로 자라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놈들을 돕는 건 어불성설…….’
대찬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강국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샌드위치와 음료를 사 왔다.
마강국은 묻지도 않았는데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하, 샌드위치 하나 사는 데 뭐가 이렇게 어렵냐. 빵은 어떻게 할 거냐, 소스는 어떻게 할 거냐 말이 많아. 빵이 빵이지 뭘 어떡해.”
그는 주저리주저리 혼자 떠들어대며 대찬에게 샌드위치와 음료를 내밀었다.
그러나 깊게 생각에 빠져있던 대찬은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마강국은 눈살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조대찬!”
“어? 어…….”
“사람 무안 주는 것도 가지가지다. 이젠 아예 씹어?”
“미안.”
대찬은 웃으면서 뒤늦게 마강국이 건네는 샌드위치와 음료를 받았다.
마강국은 몇 마디 더 꿍얼대다가 대찬의 옆에 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옆에서 사람이 말하는데도 못 알아들어?”
“아무래도 출장이 길어질 거 같아.”
“뭐? 유진인가 하는 사람하고 얘기가 잘 안 됐어? 백악관 가서 부통령하고 담판이라도 지으려고 그러는 거야?”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국에선 더 볼일 없어.”
“…그럼 어디에 볼일이 있는데.”
마강국은 그렇게 말하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대찬은 그를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티.”
“아, 아이티? 거긴 왜 또!”
마강국은 인프라가 잘 갖춰진 미국이라면 몇 날 며칠이라도 더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밤마다 총성이 울리는 아이티는 사양이었다.
그러니 대찬의 말이 좋게 들리지 않았다.
“볼 일이 있으니까 가지. 귀국편 취소하고 아이티행으로 다시 끊어줘.”
“어? 어…….”
마강국은 대답도 미적미적, 행동도 미적미적이었다.
대찬은 그가 아이티로 가기 싫어서 생떼를 피우는가 싶어 쏘아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미적거리는 이유는 단순히 가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너 영어 잘 못하지. 내가 끊을게.”
“…그걸 꼭 말로 들춰내야만 했냐.”
“쏘리, 이건 알아듣지.”
“야!”
산만 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마강국의 자존심이 콩알만큼 쪼그라들었다.
대찬은 오랜만에 고등학생의 짓궂은 쾌감을 느끼며 표를 끊으러 갔다.
마강국 덕분에 웃음이 났다.
그 오랜만의 쾌감이 과부하가 걸린 그의 머리가 잠깐 쉴 여유를 허락해주었다.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대찬은 오랜만에 이 땅을 밟았다.
아이티 현지 법인의 직원들이 공항까지 마중나와 대찬을 맞이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수고들 많으십니다. 불편한 건 없으세요?”
“회장님께서 각별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불편한 건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바빠서 여러분 한 분 한 분한테 각별하게 신경 못 쓰고 있어요. 정덕춘 이사님이 제 귀에 인이 박히도록 처우개선 요청을 한 덕분이니까 그분께 감사하셔야 돼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래도 불편한 게 더 있으면 본사의 해외영업본부에 클레임을 넣으세요. 아이티는 우리 회사에 중요한 지역입니다. 매출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으니 특별대우를 받고, 특별히 더 힘써주세요.”
“예, 회장님.”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공항을 통과했다.
공항을 나서자 스탠리가 아이티의 공무원을 이끌고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대찬은 그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아이티 정부에 알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 나라에 들어오는 한국인이 몇이나 된다고요. 그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했더니 낭패네요.”
스탠리는 씩 웃었다.
“조 회장님께서 아이티를 방문하실 때마다 국빈으로 대우하라는 대통령 각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국빈은요, 무슨…….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 정도 자격은 안 됩니다.”
“아뇨,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 회장님이 해내 주셨습니다. 로튼 프룻츠가 설비를 갖추고 원가에 가깝게 가격을 책정하여 유통해주신 덕분에, 아이티의 식량자급도가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그랬다면 다행이지만 저희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닙니다. 아이티 정부든 국민이든 떳떳하게 누리시면 됩니다.”
“그러다 조 회장님 심기라도 건드려 전면 철수를 결정하시면 큰일 납니다.”
“제 칭찬을 해주시는 줄 알았더니 욕을 하시는 거였네요. 제가 그런 인성파탄자인 줄 아십니까?”
스탠리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찬에게 길을 터주었다.
“주는 쪽은 그런지 몰라도 받는 쪽은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 차량을 준비시켜놨으니 타시죠.”
대찬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안내를 받아 차량에 탑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