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23화
우렁찬 목소리의 마이크 햇치의 모습이 토론회 영상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여러 고부가가치 산업을 러스트 벨트에 이식하겠습니다. 자율자동차, 배터리, 인공지능, 배양육 등 새로운 먹거리가 될 수 있는 산업을 러스트 벨트에 안착할 수 있는 환경, 햇치 모델로 갖추겠습니다.”
마이크 햇치는 새로운 산업의 예시로 배양육을 언급했다.
단순히 대찬을 챙겨주기 위한 포석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다음 이어진 2차, 3차 토론회에서도 자연스레 새로운 산업의 대열에 배양육을 포함시켰다.
국민들의 의식 속에 배양육이 혁신적인 신산업이라는 걸 은연중에 각인시켰다.
‘좋아, 일단 이 정도로 됐어.’
대찬은 마이크 햇치의 사인이 만족스러웠다.
마이크 햇치도 내내 뒤통수가 따가울 것이다.
서울에서 시작해 태평양을 건너와 자신의 뒤통수를 쪼이는 대찬의 눈빛이 느껴질 터였다.
그저 꽤 유능한 상원의원 정도로만 여겨졌던 그였다.
상원의원만으로도 대단하긴 했지만, 부통령 자리는 그 정도의 스펙으로는 얻기 쉽지 않았다.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만 해도 49명이나 있으니까.
그런데 대찬 덕분에 일약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까지 올랐다.
단순히 꿈도 꾸지 않았던 출세를 했다고 대찬을 의식하는 게 아니었다.
대찬은 그를 띄워놓았지만 동시에 단번에 추락시킬 무기를 갖고 있었다.
그가 입만 벙긋하면 마이크 햇치는 사익을 위해 국익을 팔아넘긴 사기꾼으로 몰락하고 만다.
물론 그걸 폭로하면 대찬의 평판도 깎이기야 하지만.
그건 자신이 입을 피해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즉, 마이크 햇치는 대찬에게 했던 약속을 들어주기 전까지 내내 상투가 잡힌 형국이었다.
그러니 대찬을 의식해서 자꾸 배양육을 언급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2020년 11월 3일.
미국 대선 당일.
대찬은 그날 휴가를 내고 윤이영과 함께 자택에 머물렀다.
로튼프룻츠 흥읍 캠퍼스 내부에 완공된 자택이라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3분 안에 사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맥주 여러 캔을 소파 앞 탁자에 올려놓고 하루 종일 CNN을 틀어놓았다.
영어에 약한 윤이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나 대통령의 유혹 봐야 되는데.”
미국과의 시차는 13시간이라 한창 개표가 진행될 시간에 한국은 아침드라마를 방영했다.
“여보, 드라마에 나오는 가짜 미국 대통령보다 진짜 미국 대통령 보는 게 낫지 않아?”
대찬이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묻자 윤이영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진짜 미국 대통령은 간이고 쓸개고 안 빼주잖아.”
“대통령은 아니지만, 부통령이 간하고 쓸개는 아니어도 맹장 정도는 빼줄 거야.”
“뭐?”
“일단 오늘은 꼭 민주당이 이기게 정화수 떠놓고 빌어야 돼.”
윤이영은 대찬의 옆에 풀썩 주저앉으며 아무 흥미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몰라. 으이구, 아침부터 맥주는.”
“원래 개표방송에는 맥주야.”
“속 버려. 샌드위치라도 만들어줄게. 같이 먹어.”
“역시 결혼하길 잘했다니까.”
윤이영은 장난스럽게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대찬에게 쏘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미국은 땅덩이도 큰 만큼 개표도 오래 걸렸다.
워싱턴과 6시간이나 시차가 나는 하와이는 아직 투표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
대찬이 샌드위치 세 개와 맥주 다섯 캔을 비울 때까지도 개표는 한창이었다.
속된 말로 낮술은 어미, 아비도 못 알아본다고 했다.
그래도 대찬은 아주 망할 놈은 아니라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파에 널브러진 채로 잠이 들었다.
긴장의 연속으로 몇 날 며칠 밤잠을 설친 피로가 술기운의 등 뒤에 숨어 몰려온 까닭이기도 했다.
윤이영은 피식 웃으며 대찬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깔끔하게 다 먹어서 치울 것도 없네.”
그녀는 샌드위치가 있었던 빈 접시와 맥주 캔을 치우고 대찬의 옆에 누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날 대선의 결과는 둘이 잠든 사이에 나왔다.
CNN의 앵커는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위스콘신에 배정된 10명의 선거인단을 조 바이든이 가져갑니다. 이것으로 자유세계의 새로운 지도자는 조 바이든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넓은 거실에 들어주는 이 하나 없는데도 CNN 앵커는 씩씩하게 말했다.
그때 대찬의 휴대폰이 잠깐 진동했다.
-위대한 승리! 초, 기대해도 좋아.
유진 깁슨이 보낸 메시지였다.
대찬은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그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 바이든과 마이크 햇치가 이겼다.
위스콘신과 펜실베이니아.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던 러스트 벨트의 경합주가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섰다.
이번 결과에는 햇치 모델을 내세워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한 마이크 햇치의 지분이 적지 않다고 언론이 분석했다.
그리고 2021년 1월.
로튼 프룻츠의 자산총계가 20조를 기록해 재계서열 18위를 기록했다는 뉴스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 바이든이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백악관 앞에서 조 바이든은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선서했다.
그러나 대찬이 기대하는 장면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대통령의 취임선서에 앞서 진행되는 장면.
대통령에 딸린 별책부록쯤으로 여겨지는 부통령 마이크 햇치의 취임선서였다.
“나 마이크 앨런 햇치는 미국의 헌법을 지지하고 국내외의 모든 적으로부터 지키며, 진실한 신념과 충성으로 대하며 마음속에 아무런 감춤이나 회피 의사를 갖지 않고 이 의무를 자유롭게 수락하며 지금 떠맡으려 하는 직책의 의무를 능숙하고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한다.”
대찬은 그 장면을 TV로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약속 지키쇼, 아저씨.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미국이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켜 시끄러운 그즈음.
로튼 프룻츠 역시 새로운 무언가 때문에 잔뜩 들뜬 기색이었다.
은오영 연구소장은 자신 일생일대의 역작이라며 대찬의 기대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은오영 소장과 다르샨 싱 전무는 대찬을 비롯해 로튼 프룻츠의 요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브리핑했다.
은오영 소장은 일생일대의 역작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닌 듯,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대찬은 짓궂은 표정으로 그에게 농담을 던졌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콧물 흐르는지 모르고 좋아하세요?”
“아, 콧물 흐릅니까? 죄송합니다.”
은오영 소장은 코를 훌쩍거리며 실없이 웃었다.
다르샨 싱 전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와 은 소장은 이 작품의 이름을 비도축육 2.0으로 지었습니다.”
“1형, 2형, 3형 하던 것과는 다른 라벨링이라는 말씀인가요?”
경영지원본부장 추승호 이사의 물음에 다르샨 싱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까지 생산했던 방식의 비도축육을 1.0이라고 한다면, 비도축육 2.0은 3D 프린터 기술을 접목해 1.0에 비해 두 배 빠른 생산속도와 재래육에 가까운 풍미를 재현했습니다.”
“말씀대로라면 상당히 획기적이네요.”
“네, 그래서 2.0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은오영 소장에게 말했다.
“재래육에 가까운 풍미라면 가격을 재래육과 똑같이 책정해도 소비자들이 우리 제품을 선택할 정도라야 됩니다.”
“제가요, 저 포함해서 우리 연구원들 전부 눈 가리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다는 거 아닙니까?”
“오, 그랬더니 구분이 안 되시던가요?”
은오영 소장은 실없이 샐쭉 웃었다.
“사실 구분은 됐는데요.”
“뭐야.”
“근데 가격이 한 10%만 저렴해도 우리 제품을 고를 정도로 많이 쫓아왔습니다. 사실 재래육과의 차이는 지방에서 오는 맛의 차이라서요.”
“그럼 지방이 거의 없는 안심 같은 분위는 구분이 안 돼야 맞지 않나요?”
대찬의 물음에 은오영 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 안심으로 했으면 감쪽같이 속았을 겁니다. 우리가 욕심을 좀 과하게 부려서 부위를 차돌박이로 선택했었거든요.”
“이 정도라면 아직 걸음마 단계를 못 벗은 다른 업체를 압도할 수 있겠는데요.”
“쨉도 안 되죠, 당연히!”
회장을 앞에 놓고 발표하는 자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오가는 말에는 격의가 없었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생산속도가 두 배나 빨라졌다면 우리 수익도 두 배 늘어난다는 말과 다름없군요. 확실히 아주 좋은 소식이네요.”
다르샨 싱 전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예, 설비에 관한…….”
설비 얘기가 나오자 로튼 프룻츠의 설비를 담당하는 RF 시스템의 대표, 민승기의 표정도 살짝 어두워졌다.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설비요?”
“생산방식이 판이하게 달라진 만큼, 생산설비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상당히요.”
“그 말뜻은….”
“기존의 설비로는 이 2.0 제품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그럼 기존의 설비를 모두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말씀이시네요.”
다르샨 싱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게 문제입니다.”
표정이 어두워진 건 RF 시스템의 민승기 대표뿐만이 아니었다.
대찬의 얼굴에도 먹구름이 꼈다.
설비는 이미 국내와 해외 가릴 것 없이 엄청난 투자를 거쳐 완비된 상황이었다.
브리핑을 받는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 로튼 프룻츠의 생산설비가 들어서고 있는 상황.
얼마 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설비 준공식에 대찬이 직접 참석했다.
아흐마드 왕세자와 나란히 테이프 커팅까지 한 참이었다.
테이프 커팅을 하고 막 가동을 시작한 설비는 당연히 비도축육 1.0을 생산해냈다.
그런데 은오영 소장과 다르샨 싱 전무가 말한 비도축육 2.0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아예 새로운 설비가 필요하다니…….
대찬으로서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술발전이 너무 빠른 것도 흠이라면 흠이 되는군요.”
“이걸 죄송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대찬에게 쓴웃음이 옮은 다르샨 싱 전무는 말끝을 흐렸다.
“죄송할 일은 전혀 아닙니다. 딸내미 새 옷을 사 왔는데 너무 빨리 자라서 몇 달 만에 버리는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옷값이 아까워서 자식이 덜 크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내 입을 닫고 있던 민승기가 대찬의 말에 덧붙였다.
“하지만 당장 2.0 체제로 넘어가긴 현실적으로 힘들 것 같습니다.”
대찬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걸 당장 세간에 공개하면 여러 곳에서 항의받기 딱 좋아요. 게다가 아흐마드 왕세자가 가만 안 있을걸요.”
“저희 시스템에서는 차근차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2.0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경쟁자가 없는 상황이니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비바체까지 낀 상황에서 무리한 출자는 자칫 우리 회사에 유동성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경영지원본부장 추승호 이사도 거세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오랜만에 회장님께서 경영지원본부에 단비 같은 말씀을 해주시네요.”
“하하, 그 말씀은 칭찬으로 들어야 될까요.”
“당연히 칭찬입니다.”
“추 이사님이 좋아한다는 건 제 스타일이 보수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건데.”
추승호 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어느 회사 오너가 보수적으로 경영하면서 회사 자산을 1년에 몇 조씩 성장시킬 수 있답니까?”
“저요.”
“여전히 회장님은 급진적인 걸로 치자면 레닌 뺨을 후려치고도 남습니다.”
대찬은 추승호 이사에게 눈웃음을 보내고 은오영 소장과 다르샨 싱 전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두 분은 정말 우리 회사의 알파고 오메가십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요.”
은오영 소장은 웬일로 대찬의 공치사를 사양까지 했지만, 표정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잔뜩 의기양양한 기운이 그의 이목구비에서 진동했다.
두 연구자들의 말대로 2.0 체제가 안착한다면.
로튼 프룻츠는 다른 경쟁업체들을 더 멀리 따돌리게 될 것이다.
이제는 자금력에 있어서도 결코 경쟁업체들에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앞섰다.
로튼 프룻츠가 주식투자자들 사이에서 수익을 창출해낼 필승카드로 통한 지도 벌써 몇 년째였다.
자금 수혈에 있어 여전히 벤처캐피탈이 건네주는 목돈으로 연명하는 경쟁업체들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린블러드를 위시한 경쟁업체들이 이제 막 고인돌을 쌓아올리는 상황인데.
로튼 프룻츠는 달나라로 우주왕복선을 쏘아 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