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21화
“회장님, 평소 이런 싸구려 술은 안 즐기신 줄은 알지만 무덤에 양주 붓는 건 그것대로 우스워서 막걸리 받아왔습니다.”
대찬은 준비한 꽃을 올리고, 막걸리 한 통을 온전히 서청수 회장의 무덤 주위에 붓고는 다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회장님, 위에서 보셨죠? 원웅이가 이겼습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웅이가 잘할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 저도 잘 돕겠습니다.”
그는 꾸벅 인사를 하고 터벅터벅 서청수 회장의 앞을 물러났다.
대찬이 돌아가고 한참 뒤, 서원웅도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다.
서원웅은 상석 위에 놓인 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암튼 부지런하네. 벌써 다녀갔구나.”
* * *
서원웅은 정식으로 필래그룹 제3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왕윤수 경영개선실장과 필래케미칼 김태준 사장을 좌우에 거느리고 임직원들이 모인 자리에 섰다.
필래에서 잔뼈가 굵은 사장들은 서원웅이 등장하자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원웅이 연단에 서서 그들에게 착석을 권하자 그제야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서원웅은 한껏 숨을 들이마시고 입술을 뗐다.
-“여러분보다 여러모로 부족한 제가 필래그룹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필래의 사장들은 군기 잡힌 표정으로 일말의 흐트러짐 없이 오너의 말을 경청했다.
-“오너가 군림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항상 필래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일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서원웅의 뒤편에 나란히 앉은 왕윤수 실장과 김태준 사장은, 사장단을 호령하는 서원웅을 보고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회장 취임식을 마친 서원웅은 회장실까지 자신을 따라오는 왕윤수 실장을 바라봤다.
“왕 실장님.”
“예, 회장님.”
“전쟁에서 이겼다고 적과 내통한 반역자를 살려두는 법은 없죠?”
적과 내통한 반역자, 장백주 실장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왕윤수 실장은 서원웅의 말뜻을 바로 알아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개선식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더욱 잔혹하게 대우하는 법입니다.”
“네, 왕 실장님이 그렇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왕윤수 실장이 가진 무기는 많았다.
모든 걸 잃은 장백주를 잔혹하게 끝장내는 건 왕윤수 실장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유용한 사실.
직접적인 업무관계도 없는 하청업체의 사장에게 돈을 갈취한 사실.
인사부에 으름장을 놔서 함량미달인 자기 조카를 알짜 부서에 꽂은 사실.
한때 정분 좀 났던 마담이 운영하는 룸살롱에서 접대를 하도록 은근히 압력을 넣은 사실.
목을 잘라 죽일지, 졸라 죽일지, 등을 떠밀어 떨어뜨려 죽일지.
왕윤수 실장은 취향대로 패를 고를 수 있었다.
그가 고른 패는 가장 고약했다.
장백주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모욕이란 모욕은 다 당하게 하는 것.
반세습연합이 압도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장백주는 집에도 못 들어가고 고향집에 내려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의 늙은 홀어머니가 밥을 차려주고 술을 대령했다.
“야야, 백주야, 니 술 좀 고만 무면 안 되겠나. 몸 상한다.”
“엄마, 난 이미 무너진 사람이야. 엉? 술이라도 안 마시면 죽을 거 같다고.”
“무너져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이가. 요즘은 인생 육십부터라 카데. 고마 마음 단디 먹고 설로 올라가 다시 시작하면 안 되겠나.”
장백주는 픽 웃었다.
“엄마가 사회를 알아? 사회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사회는 몰라도 내 자슥 다시 잘할 수 있다는 건 알제.”
장백주의 모친은 겸연쩍게 웃으며 격려했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물정 모르는 인간의 헛소리로만 들렸다.
“다 집어치우고 술상이나 좀 봐달라고요. 내가 엄마한테 여태 해준 게 얼만데 엄마까지 날 못살게 굴어. 술상이라도 봐줘야 할 거 아니야.”
“그래… 니 좋아하는 홍게 된장찌개 끓였다. 술 좀만 무래이. 알았제.”
“…….”
몸이 노쇠한 어머니는 술상을 한 번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밥 따로, 수저 따로, 찌개 따로, 술병 따로 여러 번 부엌과 거실을 오갔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아들의 술잔을 꺼내 거실로 가는데, 브라운관이 뚱뚱한 오래된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고 서청수 필래그룹 회장의 곁을 지키며 실세로 불리던 장 모 씨의 낯 뜨거운 행각이 폭로되었습니다. 장 씨가 과거 소위 원조교제, 청소년 성매매를 저질렀다는 겁니다. 자세한 소식 정아름 기자입니다.”
뉴스 화면에 나온 장 모 씨는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쉽게 알아보았다.
“야야, 저거 백주 니 아이가……?”
화면은 바로 제보 동영상으로 넘어갔다.
“어두컴컴한 모텔 객실 안.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바로 필래그룹의 실세로 불리던 장 모 실장의 목소리입니다.”
-이리 와......
뉴스를 보는 어머니의 눈동자가 떨렸다.
손에 힘이 풀려 술잔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 아이네……. 내가 잘못 봤네. 우리 백주 아이네, 아이네…….”
장백주 실장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점점 커지는 동공은 뉴스 화면에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어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
“하, 하하… 내 잘못 봤네. 잘못 봐쓰……. 리모컨 어데 갔노. 꼭 찾으면 음따.”
어머니는 황급히 리모컨을 찾아 뉴스를 꺼버렸다.
그러나 TV는 끄면 꺼지지만, 이미 폭로된 사실은 꺼지지 않았다.
뉴스에 제보된 영상은 왕윤수 실장이 가진 여러 패 중의 하나였다.
만일 반세습연합이 승리했다면 이런 패들은 장백주에게 비웃음만 샀을 것이다.
패도 누가 봐줘야 팬데, 만약 서원웅이 낙마했으면 저 패들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이미 장백주에게 패자의 낙인이 찍히자 왕윤수 실장이 가진 패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고문 도구였다.
장백주의 원조교제는 신호탄에 불과하고 줄줄이 굵직한 건수가 연일 터졌다.
마지막은 그 더러운 놈이 서청수 회장의 오래된 비서였고 그의 뒤통수를 때린 장본인이었다는 것으로 마감되었다.
언론에 드러난 범죄사실, 그것도 공소시효가 여전한 것으로만 추려도 한 트럭이었다.
장백주는 일본으로 도주하려다가 경찰에 덜미가 잡혔다.
경찰의 억센 손아귀에 이끌려 차디찬 유치장 바닥에 내쳐졌을 때, 장백주의 뇌리에 스치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엄마 보고 싶다…….’
필래지주 주주총회에서 혁혁한 백기사 역할을 해낸 로튼프룻츠는 이제 그 대가를 취하려고 했다.
대가는 물론 필래 비바체였다.
이 정도의 회사를 매각한다면 주주들은 당연히 경쟁입찰을 요구하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경쟁을 붙여야 비싼 값에 팔 수 있으니까.
그러나 로튼프룻츠와 필래 비바체의 특수한 관계가 이런 불만을 야기하지 않았다.
필래 비바체의 실질적인 설계자는 대찬이었다.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대찬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비바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비바체를 사들이려고 하니, 그까짓 프리미엄 얼마 더 얹지 않아도 성장에 대한 기대감만으로 충분했다.
물론 아예 프리미엄을 얹지 않는다면야 천하의 조대찬이라도 어림없는 일이긴 하지만.
대찬은 로튼프룻츠와 손을 잡고 이런저런 일을 함께했던 한일증권과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협상은 무난했다.
대찬은 필래 비바체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었고, 돌아가는 사정에도 빠삭했다.
그래서 구태여 필래 측에서도 숨기는 것 없이 모두 다 드러낸 채로 협상을 시작했다.
필래 비바체의 대주주는 서원웅 회장이었다.
거기에 필래지주의 소유지분, 우리사주조합의 지분을 합치면 그것만으로도 과반이었다.
서원웅 회장은 당연히 로튼프룻츠에 선선히 지분을 매각하려고 했고, 필래지주는 그의 지휘하에 있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지분 8.5%를 쥐고 있는 비바체의 우리사주조합 역시 로튼프룻츠의 품에 안기는 걸 기쁜 일로 여겼다.
우리사주조합을 만든 것도 대찬이요, 그들의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것도 대찬이었으니.
우리사주조합의 아버지가 대찬이라는 건 과언이 아니었다.
대찬은 경영지원본부장 추승호 이사를 전면에 내세워 협상을 진행했다.
갓 시가총액 3조를 돌파한 로튼프룻츠가 4조가 넘는 필래 비바체를 사들인다.
생전 서청수 회장이 말했듯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키는 일이었다.
협상 자체는 쉬웠지만 코끼리를 소화시키는 건 또 별개의 문제.
그렇기에 협상책임자인 추승호 이사도 양사의 특별한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최대한 대금을 싸게 매겼다.
결국 로튼프룻츠는 비바체의 지분 32%를 2조 2천억 원에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로튼프룻츠의 파트너인 한일증권은 같은 단가에 14%를 사들였다.
이 둘은 합치면 46%. 대찬에게 협조적인 우리사주조합의 지분 8.5%를 합치면 과반을 훌쩍 넘었다.
로튼프룻츠는 보아뱀을 소화시킬 소화액을 만들어내는 데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보유한 현금을 몽땅 때려 박고, 유상증자를 실시하고, 회사채를 발행하고 온갖 돈이 나올 구멍이란 구멍은 다 들쑤셨다.
때문에 불확실성이 커져 일단 로튼프룻츠 주식을 시장에 내놓고 관망하려는 주주들 덕분에 로튼프룻츠의 주가는 일시적으로 폭락했다.
그러나 대찬은 자신이 있었다.
로튼프룻츠와 비바체를 동시에 운용할 자신.
필래 비바체는 그렇게 로튼프룻츠의 품에 안겼다.
필래 비바체는 RF비바체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옥문영 대표는 여전히 RF비바체의 대표이사로 남게 되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옛 동료들을 맞이했다.
옥문영 대표 역시 웃음으로 그와 악수를 나눴다.
“이런 날이 다 오는군요.”
“예, 이런 날이 다 왔습니다.”
옥문영 대표는 감개무량했다.
앙심을 품어 작정하고 괴롭히던 녀석이 이제는 회사 전체를 품었다.
그건 기름밥 먹던 자신이 이제는 대기업의 꼭대기에 서서 진두지휘하는 신세가 된 것만큼 커다란 변화였다.
비바체 인수에 가장 뛸 듯이 기뻐한 건 허운이었다.
그는 체면도 잊고 팔짝팔짝 뛰며 다시 대찬과 한솥밥을 먹게 된 걸 진심으로 기뻐했다.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십니까?”
“그래도 이렇게 돌고 돌아서 잘됐잖아.”
허운은 울먹이기까지 하며 대찬에게 투정을 부렸다.
“나 협상 진행되던 사이에 유급휴가 받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하긴, 그만큼 나랑 가까운 사이니까. 혹시 내부정보 흘릴까봐 그룹 차원에서 조치한 거지.”
“서원웅도 냉혈한이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내가 똥오줌 못 가리고 그러겠냐고.”
대찬은 흐흐 웃으며 말했다.
“내가 슬쩍 옆구리 찌르면서 비밀 좀 빼 오라고 했으면 그렇게 했을 거잖아?”
“뭐… 아니라곤 못하겠네.”
“서원웅이 되레 배려해준 거지. 자칫하면 형 쇠고랑 찰 뻔했어.”
“우리 조 대표님한테 형 소리 듣는 것도 오랜만이네.”
“원한다면 회사에서도 그렇게 불러줄게.”
“옥 대표님이 내 모가지 비틀어버릴 걸?”
허운은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필래 비바체의 시가총액은 4조 가량이었지만 자본과 부채를 합한 자산총계는 9조 원에 달했다.
로튼프룻츠 역시 시가총액은 3조 가량이었지만 자산총계는 6조가 넘었다.
둘의 자산총계를 합하면 15조.
대기업의 기준은 자산 10조였으니 로튼프룻츠는 이로써 가뿐하게 대기업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피터팬 증후군.
심리학에서는 어른이 되고 나서도 아이로 남고 싶은 심리를 의미했다.
경제학에서는 중견기업이 되지 않고 중소기업으로 남고 싶어 하는 기업의 생리를 의미했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바뀌면.
그만큼 정부의 지원은 줄어들고 짊어져야 할 규제는 무수히 늘어나는 까닭이었다.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바뀔 때도 이 피터팬 증후군이 발동하기 마련이었다.
일감 몰아주기 금지, 경영정보 공시 등 여러 가지 규제에 노출되어 아무래도 제약이 많아진다.
로튼프룻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추승호 이사 역시 이에 우려를 표했지만 대찬의 결정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비 온 뒤에 대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로튼프룻츠는 아이로 남고 싶은 투정을 부릴 사이도 없이 삽시간에 자라났다.
대찬과 민승기의 2인 기업으로 출범한 로튼프룻츠는 대한민국의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세간에서도 로튼프룻츠와 필래비바체가 한 몸이 된 걸 ‘메가톤급 빅딜’이라며 관심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로써 로튼프룻츠는 자산총계를 기준으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발표하는 재계서열 20위에 당당히 올랐다.
더불어 대찬은 이 로튼프룻츠의 총수, 동일인으로 지정되었다.
로튼프룻츠는 비도축육과 전자상거래, 미래먹거리의 총아로 불리는 두 산업을 거머쥐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