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20화
왕윤수 실장은 당장의 슬픔은 억누르고 냉철하게 일 얘기만 했다.
“오너의 의중이 서원웅 부회장께 있다는 게 처절하고 분명하게 알려졌습니다. 승부의 추는 거의 기울었습니다.”
“…저는 회장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최소한 카메라 앞에서 하신 말씀 중에 거짓은 없습니다. 필래는 회장님의 인생 그 자체입니다. 가장 미운 사람들의 손아귀에 필래가 사로잡히는 건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굴욕이셨을 겁니다.”
대찬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병실에 있던 양윤희가 나와 대찬을 바라봤다.
“조 대표님이 오셨다고 말씀드리니 잠깐 들어오라고 하시네요.”
“저만요?”
양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표님만.”
대찬은 필래의 아는 얼굴들과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서청수 회장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니 병실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쳤다.
안에는 양윤희와 서원웅이 있었다.
삑, 삑, 영 불안한 바이탈 사인이 누워있는 서청수 회장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서원웅은 대찬을 보고 덤덤히 웃었다.
“왔어?”
“…어.”
상태는 좀 어떠셔.
대찬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관뒀다.
서청수 회장은 겉보기에도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실례로 느껴질 정도로 좋지 않았다.
서원웅은 쓸쓸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내려다봤다.
서청수 회장은 힘겹게 눈동자를 대찬 쪽으로 옮겼다.
대찬은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회장님, 조대찬 왔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눈을 깜빡여 그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대찬은 침을 꿀꺽 삼키고 가까이 다가갔다.
서청수 회장은 눈꺼풀조차 위로 들어 올릴 힘이 없는 듯 게슴츠레한 눈이었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발음했다.
“봤…나?”
서원웅이 풀어서 설명했다.
“아까 공항에서 기자회견, 봤냐는 말씀이야.”
“아… 네, 봤습니다, 회장님.”
“잘했지……?”
대찬은 안쓰럽게 웃었다.
“아뇨, 못하셨어요. 뭐 하러 그렇게 무리하셨어요. 이번 일은 저희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회장님은 몸조리에만 신경 쓰세요.”
“지랄…….”
서청수 회장은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대찬이 미소를 지으며 서청수 회장의 손을 꼭 붙들었다.
“잘하셨습니다. 회장님 아니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필래는 나 없으면 안 돼…….”
서청수 회장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자기 없으면 안 되는 필래인데.
이제는 자기 없이 험난한 길을 가야만 했다.
자기 목숨이 촌각에 달렸는데, 서청수 회장은 되레 자기 없이 남을 회사를 걱정했다.
그 정도는 돼야 내 회사도 아닌 회사를 내 회사라고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힘겹게 눈을 떠서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아.”
“네, 회장님.”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대찬이 느끼는 힘은 미미했지만, 대찬은 그 미미한 힘을 내기 위해 서청수 회장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알았다.
“잘 도와줘. 부탁이야…….”
“알겠습니다.”
“부탁이야, 부탁…….”
서청수 회장은 눈물을 흘리며 대찬에게 부탁, 부탁 여러 번 반복했다.
생의 끝자락에서 회사를, 그리고 그 회사를 맡은 아들을 부탁할 사람.
서청수 회장에게는 그런 사람이 대찬 하나뿐이었다.
부탁, 부탁, 부탁.
대찬은 서청수 회장의 말을 끝까지 듣고 병실을 나섰다.
그로부터 닷새 후, 서청수 회장은 세상을 떴다.
그는 양윤희와 서원웅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서청수 회장의 유언장은 분량이 엄청났다.
그가 남긴 엄청난 유산.
그것을 최대한 서원웅에게 유리하게 상속시키기 위해 필래그룹의 두뇌들이 고안해낸 방식을 따르느라 그랬다.
그러나 엄청난 분량의 유언장과는 달리 그가 남긴 유언은 짧았다.
‘다 살았다.’
네 글자가 전부였다고 서원웅은 전했다.
서청수 회장의 장례는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외부의 조문은 사양하고, 가까운 이들만 빈소를 지키게 했다.
가족으로는 서청운 사장과 그의 아들 서인태, 서인태의 부인이자 대찬의 손윗누이인 조수진, 양윤희와 서원웅 정도만 허락을 받았다.
서청수 회장은 서청규 사장이나 백양옥, 서승학 등이 조문을 오면 물리치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 당부가 무색하게 백양옥과 서승학은 조문하지 않았다.
서청규 사장은 잠깐 빈소에 머무르고 돌아갔다.
어쨌든 그로서는 막돼먹은 혈육이란 비난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백양옥, 서승학에게도 괜한 욕을 먹지 않으려면 조문하라고 권했지만 그들은 따르지 않았다.
그들과 같은 편에 선 서청규 사장도 근본부터 글러 먹은 모자라고 생각했다.
대찬은 유일한 상주인 서원웅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하루의 절반 이상을 빈소에 머물렀다.
왕윤수 실장과 김태준 사장도 빈소를 지켰다.
왕윤수 실장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눈물을 훔쳤다.
김태준 사장은 아예 서청수 회장의 영정 앞에 머리를 박고 통곡했다.
김왕장 중에 장백주 실장은 물론 자리에 없었다.
조문하러 온 필래그룹의 원로들은 장백주가 상갓집 개만도 못한 놈이라며 한목소리로 비난했다.
서청수 회장의 유언에 따라 서청수 회장의 유산은 부인인 양윤희, 그리고 자식인 서원웅과 서승학에게 상속되었다.
서승학에게는 최대한 주식이 아니라 현물자산을 남겼다.
평창동 자택과 세계 곳곳에 있는 별장과 대지, 차고에서 썩어가는 고급외제차들과 현금 등이 모두 서승학에게 돌아갔다.
그에게 돌아가는 주식도 필래그룹의 경영권과는 크게 관계없는 일부 계열사의 주식들로 꽉꽉 채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필래지주의 지분이 서승학에게 돌아갔다.
서청수 회장의 시신이 서씨 선산의 깊은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지 한 달 후.
필래그룹의 정기 주주총회가 열렸다.
대찬은 로튼 프룻츠와 조윤재단의 지분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직접 주주총회장을 찾았다.
긴장이 되긴 했지만 죽을 정돈 아니었다.
이미 전세는 서청수 회장의 일갈로 어느 정도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걸 방증하듯 서원웅의 표정에서도 그다지 긴장이 엿보이지 않았다.
아마 관련된 내부 분석 자료를 접했을 것이다.
세간의 주목을 많이 받는 사건이라 그런지, 개인 소액주주들도 다수 참석해 있었다.
준비한 자리가 모자라서, 일부는 장내의 구석에 까치발을 들고 서 있어야만 했다.
서청규 사장과 백양옥, 서승학은 대리인을 내보내고 자신들은 주주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왕윤수 실장이 주주총회의 의장을 맡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주주총회는 처음으로 전자투표제를 도입하여 실시합니다. 일정의 편의를 위하여 현장투표보다 전자투표가 먼저 실시되었고, 의안에 대한 투표결과는 전자투표와 현장투표를 합산하여 발표하겠습니다.”
왕윤수 실장은 서원웅을 지지하는 전자투표 지분이 얼마나 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주주총회에 참석한 빌리언보이스의 대표는 왕윤수 실장의 여유로운 목소리에서 이미 실패를 감지했다.
정관 변경과 감사 선임 등 사소한 안건은 물 흐르듯 처리되었다.
그리고 양측의 승패를 가를 안건에 도착했다.
서원웅은 이미 필래지주의 사내이사였다.
이번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의 임기가 다해 재선임을 받아야 하는 입장.
만일 반세습연합이 과반으로 서원웅의 재선임을 저지하면.
서원웅은 부회장으로서의 자리는 일시적으로 유지하겠지만 시한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권위 역시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곧 필래지주의 이사회는 과반의 반세습연합 측이 장악할 테고 그럼 서원웅은 그들의 손에 쫓겨날 테니까.
반대로 서원웅이 사내이사에 재선임 되면 오너로서의 자격이 공식적으로 부여되는 것.
이에 서원웅의 입장에서는 이번 주주총회가 자신의 대관식이 되기를 바랐고 서청규 사장의 입장에서는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즉위한 수양대군이 되기를 바랐다.
-“다음은 사내이사 서원웅의 재선임에 대한 의안을 결의하겠습니다. 반대의견이 있는 주주께서는 발언권을 얻어 의견을 밝혀주십시오.”
예상대로 빌리언보이스를 필두로, 반세습연합 측의 대리인들이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당연히 반대의사를 밝힌 그들은 국민연금의 대리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만약 국민연금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전자투표 결과를 깔 것도 없이 반세습연합의 패배로 돌아가고 만다.
그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눈빛이 국민연금 대리인 쪽으로 쏠렸다.
그러나 국민연금 대리인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빌리언보이스의 대표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국민연금은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의 생전 일갈로 여론이 상당히 반전된 상황이었다.
만일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출했다면 손익을 따졌을 때 손해가 더 컸을 것이다.
반세습연합이 내세웠던 투명경영이나 주주가치 제고 등의 제안이 서청규, 백양옥, 서승학, 그 추악한 면면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저쪽의 손을 들어준다면.
도매금으로 엮여 욕을 한 사발 얻어먹을 게 뻔했다.
저쪽으로 주인이 바뀐 필래가 연일 삽질을 하면.
죽은 서청수 회장의 일갈이 그때마다 되살아나 국민연금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또 그러면 그때마다 국민연금은 욕을 먹을 것이다.
어쨌거나 표를 행사하는 이들은 준공무원이었다.
공무원들은 일을 벌여서 칭찬을 받는 것보다 일을 안 벌여서 욕을 안 먹는 쪽을 선호하기 마련이었다.
국민연금의 대리인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왕윤수 실장은 가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더 반대의사를 표할 주주는 안 계십니까?”
“…….”
장내는 고요했다.
왕윤수 실장은 빙긋 웃었다.
-“그럼 사전에 확보된 위임장 및 전자투표 결과에 따라, 서원웅 사내이사 재선임에 관한 건은 총 의결총수의 88.5%가 참석하여 이 중 60.28%가 찬성을 표하였으므로 의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장내는 술렁였다.
생각보다도 싸움은 세습연합의 압도적인 우세로 끝났다.
저 수치대로라면 소액주주들의 대부분이 서원웅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뜻이었다.
그것으로 필래지주의 경영권 분쟁은 종료되었다.
서청수 회장의 뒤를 이어, 서원웅이 필래그룹의 3대째 회장이 되었다.
대찬은 씩 웃으며 박수를 쳐주고 주주총회장을 빠져나왔다.
이날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서원웅이었지만, 대찬에게도 적지 않은 관심이 쏠렸다.
화제성으로만 보자면 서원웅보다는 대찬이 나은 인터뷰 상대이기도 했다.
일군의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대찬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 결과에 대한 소감은 어떠십니까?”
-“소액주주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주주 여러분의 올바른 판단은 반드시 큰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대찬은 서청수 회장의 유지가 지켜졌다느니, 악마 같은 이들에게서 필래를 지켰다느니 같은 닭살 돋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돈 대 돈의 싸움이었다.
주주들이 이쪽에 표를 던진 것도 무슨 서청수 회장과의 대단한 의리를 생각한 결과가 아니었다.
돈놀이의 승자가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주워섬기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이른바 반세습연합에 대해 남길 말씀은 따로 있으십니까?”
앞선 질문보다는 이 질문이 기삿거리가 되었다.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이야 뻔했으니까.
대찬은 웃으며 그들에게 기삿거리를 던져주었다.
-“그분들은 늦게나마 부끄러운 줄 아시길 바랍니다. 인륜을 저버려가면서 싸움을 걸었고, 그 싸움에서 이기지도 못했습니다. 부디 다시는 필래의 주총장에서 뵙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찬은 이어지는 질문에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서청수 회장의 죽음이 이제는 슬슬 대중의 뇌리에서 잊히는 중이었다.
아마 그가 다시 널리 회자되는 일은 서원웅이 최악의 경영을 하지 않는 이상 잘 없을 것이었다.
서원웅이 잘 못하면 죽은 아비까지 묶여서 돈 잃은 주주들이 쏟아내는 노골적인 욕설의 대상이 될 터였다.
그런 까닭으로 대찬은 이제 서청수 회장의 이름 석 자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대찬은 바로 차를 몰고 서청수 회장이 잠든 묘소를 찾았다.
그는 근방의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한 병을 사 들고 서청수 회장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