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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19화 (519/556)

난 할 수 있어 519화

기자들에게 주어진 말미는 겨우 2시간이었지만 서울에서 인천공항까지 미친 듯이 밟은 덕에 대부분의 취재진은 제시간에 도착해있었다.

그들은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서청수 회장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고 음성 녹음을 켠 휴대폰을 들이댔다.

서청수 회장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입국장을 통과했다.

물론 그 휠체어는 양윤희가 뒤에서 밀고 있었다.

서청수 회장의 얼굴은 해골의 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골 위에 얇은 피아노 덮개 정도 올려놓은 듯 서청수 회장의 얼굴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했다.

그는 바깥바람을 쐬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 듯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몰려든 기자들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서청수 회장의 외양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생방송으로 그 모습을 보는 대찬을 포함한 시청자들 역시 마찬가지의 충격을 받았다.

대찬의 손바닥에 저도 모르게 땀이 배었다.

충격 때문에 잠깐 주춤했던 기자들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자리싸움을 벌였다.

카메라 기자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오갔다.

“야! 거기 가리지 마!”

“아, 일어서지 말고 좀 앉으라고!”

안 그래도 복잡한 인천공항은 그들로 인해 더 어지러웠다.

그런 상황을 통제할 경호원들도 없었다.

서청수 회장은 호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양윤희와 단둘이 입국한 상태였다.

몸을 부지하기도 힘들어 쌕쌕 숨을 내쉬던 그는 눈을 부릅떴다.

사방팔방에서 터지는 플래시에도 서청수 회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질서를 지키세요.”

음량 자체가 크진 않았지만 묵직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 말에 좌판을 깐 약장수처럼 굴던 기자들이 일순 질서를 찾았다.

그리고는 서청수 회장의 입술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잠깐 정적을 지키면서 서청수 회장은 그들의 주의를 한 번에 끌어왔다.

점차 플래시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쏟아지자 서청수 회장이 입을 열었다.

-“서청수입니다.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웬 해골이 나왔는가 하고 눈살 찌푸리실 분들도 계실 텐데. 못 볼 꼴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하하. 아시는 분들은 아시다시피 저는 죽을 목숨입니다. 산송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럼에도 작금의 사태를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이렇게 국민 여러분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가벼운 농담으로 입술을 뗐다.

당장 호흡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심한 피로를 느꼈지만, 모든 힘을 쥐어짜 형형하게 눈을 밝혔다.

그는 병자의 숨을 쌕쌕 뱉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오랫동안 필래그룹의 회장이었습니다. 회장으로 있는 동안 필래그룹은 내 회사였습니다. 내 회사가 아닌데 내 회사처럼 생각했습니다. 누리지 말아야 할 것까지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다 죽어가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 점, 사과드립니다.”

서청수 회장은 천천히 카메라 앞에 고개를 숙였다.

듬성듬성 빈 정수리를 한참 보여주던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손이 저릿저릿해져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러나 내 회사라는 생각은 누릴 때만 한 게 아닙니다. 일할 때도 정말 내 회사처럼 일했어요. 저는 이 모양 이 꼴이 되도록 일하고, 또 일만 했습니다. 필래가 내 집이고, 가족이고, 친구고, 애인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지금까지 저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쿨럭쿨럭.

서청수 회장은 괴로운 표정으로 기침을 했다.

감각이 무뎌져 닦지 않고 둔 입가의 침을 양윤희가 닦아주었다.

서청수 회장은 얕은 숨을 내쉬었다.

-“나는 필래를 사랑합니다. 아들보다 사랑합니다. 그래서 나는 장남을 내치고, 마누라와 갈라서면서까지 필래를 쥐고 놓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비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필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서청수 회장의 온몸에 퍼진 암세포가 그의 말을 저지했다.

기침이 자꾸 나오려고 했다.

1초, 1초가 중요한 그는 목구멍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도 기침을 참아냈다.

필사적으로 기침을 참는 서청수 회장의 울대가 미친 듯이 일렁였다.

-“서원웅이라는 사람이 이 회사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제가 이렇게 갖은 무리수를 두지 않았을 겁니다. 서원웅에게 필래를 주는 게 아니고, 필래에 서원웅을 주는 겁니다.”

서청수 회장은 휠체어의 팔걸이를 꼭 붙들고 바른 자세를 유지했다.

안색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저는 탐욕스럽습니다. 때론 비열하고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전 썩을 대로 썩고 빌어먹을 대로 빌어먹은 한국의 전형적인 재벌입니다. 맞습니다. 더러운 놈입니다. 이제 와서 제 순정을 떠들어봤자 믿어줄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니 오로지 자본주의로만 얘기하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필사적인 노력으로도 막지 못한 기침을 토했다.

그는 양윤희가 입가를 또 닦아주려는 걸 막고 손수건을 건네받아 직접 닦았다.

-“저는 앞으로 20년간 필래가 나아가야 할 길을 구상했습니다. 지금까지 제 경영능력은 괜찮았습니다. 앞으로의 20년도 괜찮으리라 확신합니다. 서원웅의 경영능력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으나, 제 계획은 넉넉히 담을 그릇이 됩니다. 서원웅이라는 인간이 못 미더우시거든, 여태 제가 만든 조직과 시스템과 계획을 믿어주십시오.”

인천공항에서 멀리 떨어진 흥읍에서, 화면을 통해 서청수 회장의 모습을 바라보는 대찬과 한태윤 전무는 숨죽인 채였다.

그건 그 화면을 보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회사를 완전히 누리고, 완전히 이끈 사람.

그 사람이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목숨을 다해 토해내는 목소리를 숨죽인 채 들었다.

-“서원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내 동생 서청규. 어떻게든 회사를 키울까 고민하는 나를 어떻게든 끌어내리려고만 했던 녀석입니다. 내 전처 백양옥. 나를 죽이려고 하면서까지 회사를 차지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내 장남 서승학. 서열과 혈통에서 우위에 있음에도 끝끝내 선택을 받지 못한 폐품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사모펀드. 그들의 계획은 20년, 30년, 100년 이 회사를 키우는 데 있지 않고 가장 살이 쪘을 때 팔아치울 궁리만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서원웅보다 더 낫습니까? 주주 여러분의 이익을 서원웅보다 더 훌륭하게 보장할 수 있습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래 참은 기침이 객혈이 되어 서청수 회장의 입으로 토해지려고 했다.

서청수 회장은 손수건으로 그 객혈을 틀어막으며 외쳤다.

-“필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의 조언을 들으십시오! 내 목숨을 다해서 커헉… 조언 드립니다. 필래가 곧 자신의 인생이었던 사람의 선택을 믿으십시오! 정이 아니라 여러분의 소중한 돈을 생각해서 판단하십시오! 크학…….”

입을 틀어막은 손수건에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서청수 회장은 혼절 직전까지 갔다.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 덜덜거리며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뼈와 가죽밖에 없는 몸뚱이를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힘겹게 지탱했다.

서청수 회장은 부족한 호흡을 겨우 모아 검붉게 물든 입술과 치아로 외쳤다.

-“나를 믿으세요!”

그렇게 외친 서청수 회장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털썩, 그대로 휠체어에 도로 무너졌다.

혼절한 서청수 회장의 입술로 붉고 진득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양윤희는 눈물을 머금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기, 기자회견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

만신창이가 된 서청수 회장을 향해 기자들은 그 어떤 추가 질문도 던지지 못했다.

그들은 조문객처럼 조용히 포위를 풀고 카메라를 물렸다.

양윤희는 이미 각오를 마친 듯, 감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잘 유지했다.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서청수 회장의 휠체어를 천천히 밀어 공항 밖으로 향했다.

미리 준비된 사설응급차가 서청수 회장을 병원으로 이끌었다.

뉴스특보의 화면은 다시 아나운서가 있는 스튜디오로 넘어왔다.

아나운서는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해 잠깐 머뭇거렸다.

-“…이어지는 소식은 정규뉴스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뉴스특보를 마칩니다.”

그렇게 둘러대고 허둥지둥 특보를 끝내는 게 고작이었다.

뉴스특보가 끝나고도 대찬과 한태윤 전무는 말없이 멍한 시선으로 시끄러운 광고가 이어지는 화면을 응시했다.

대찬은 가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마구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뉴스특보가 끝나고 정덕춘 이사가 급히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보셨습니까?”

“…네.”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굳이 더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

“느껴야 할 감정도 충분히 느끼고 있고, 향후 어떻게 될지 이성적으로 충분히 분석하고 있습니다.”

정덕춘 이사의 목소리는 착잡했지만 할 말은 분명히 했다.

“대표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대표님의 개인사보다는 우리 회사 직원들과 주주들의 이익을 우선 생각하셔야 합니다.”

대찬은 쓸쓸히 웃으며 정덕춘 이사를 흘끗 바라봤다.

그녀는 대찬의 묘한 웃음에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참 야박하다.’

마음을 달랠 시간을 줄 법도 한데 정덕춘 이사는 그런 잠깐의 말미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찬은 그런 정덕춘 이사를 원망하지 않았다.

상사의 마음을 헤아려 달콤한 말을 하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당장의 문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청수 회장의 일갈로 상황은 다시 급변할 것이다.

대찬은 이 사태에 깊숙이 개입할 것을 결정한 장본인이었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감정으로 주저할 여유마저 허락되지 않는 것이 마땅했다.

대찬은 정덕춘 이사를 바라보며 웃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상황이 급박합니다. 들어오는 소식이 있으면 바로바로 진위생 씨를 통해서 보고하겠습니다.”

“알았어요.”

“네, 대표님께서도 바로바로 팔로우 업 해주셔야 합니다.”

정덕춘 이사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대표실을 나섰다.

한태윤 전무는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여걸이시네요.”

“측천무후도 정 이사님 앞에서는 눈을 아래로 깔지도 몰라요.”

정덕춘 이사는 잠깐의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았지만, 대찬은 그럴 순 없었다.

대찬은 한태윤 전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잠깐 서 회장님 좀 뵙고 와야겠습니다.”

“예, 회사는 걱정 마시고.”

대찬은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무님이 계신데 걱정이 될 리가요.”

서청수 회장은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갑작스런 소식에 서원웅을 비롯한 필래의 요인들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서청수 회장의 병실로 향했다.

근성 있는 기자들은 공항에서 병원까지 서청수 회장의 꽁무니를 따라왔다.

왕윤수 실장은 그들을 병원 밖으로 내쫓았다.

그런데도 병원 앞에 장사진을 치고 기삿거리를 건지려고 버티고 있었다.

대찬은 병원 앞에 도착해 그들에게 사진 몇 장을 찍혀주고 바로 병실로 올라갔다.

이미 병실 앞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서청수 회장의 병실 앞을 지키던 왕윤수 실장이 대찬에게 다가왔다.

“현재 면회는 가족만 가능합니다.”

“예, 아무래도 그렇겠죠…….”

대찬은 이해했다.

시간에 관계하지 않고 가족들의 면회를 허락해준 것만 해도 병원 측에서 서씨 일가의 편의를 많이 봐준 것일 터였다.

대찬은 왕윤수 실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백 여사나 서승학 씨 측에서는 연락이 없었습니까?”

“없더군요.”

필래지주의 주주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 여론전의 성격이 강해졌다.

아무리 정리된 지 한참 지난 인연이라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 그들이 서청수 회장을 안 찾아오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서청수 회장이 정말 죽음의 문턱 앞까지 와있다는 걸 이제 전 국민이 다 알게 됐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끝끝내 서청수 회장을 찾아오지 않는다면.

국민 정서상 용납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쳐들어오는 것도 우습기는 매한가지였다.

서청수 회장이 생방송 카메라에 대고 그들을 향해 노골적인 욕설을 퍼부은 참이었다.

면전에다 대고 한 것보다도 더 심한 셈이다.

그런데 그걸 참아내고 병문안을 가도 면회가 거절당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건 서청수 회장이 그들에게 일말의 정도 없다는 일종의 확인 사살이나 진배없었다.

모양새가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이쯤 되면 죽은 서청수가 산 서청규를 무찌른 격이었다.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 죽을 서청수가.

대찬은 어수선한 병실 앞에서 왕윤수 실장과 계속 얘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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