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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18화 (518/556)

난 할 수 있어 518화

“제 책임이 큽니다.”

그런 그를 보는 서원웅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에요. 제가 좀 더 미더운 인간이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서로 모자라니 고해성사는 이쯤 해두시죠.”

“예, 일단 저쪽에 대한 네거티브에 집중하겠습니다.”

“네거티브요.”

왕윤수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마 전에 조대찬 대표가 기자간담회에서 얘기했듯, 저쪽에서 주장하는 말들이 그럴듯해도 면면이 다 하자가 심한 인간들이거든요.”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진행하세요.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니까.”

물불 가릴 때가 아니라는 건 반세습연합도 잘 알고 있었다.

서청규 사장과 백양옥 역시 머리를 맞대고 대응책을 고민했다.

백양옥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조대찬 그놈은 내가 뼈째 갈아 마셔도 성에 차질 않아요.”

“번번이 형수님 앞길을 가로막는군요.”

대찬이 없었다면 서청수 회장은 진즉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또 소액주주연합이 와해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찬을 향한 백양옥의 증오는 깊고 깊었다.

백양옥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꼭 남 일처럼 말씀하시네요? 그쪽도 조대찬한테 여러 번 물어뜯긴 걸로 아는데.”

“자꾸 과거를 들먹여서 뭐 하겠습니까. 그만하시죠.”

“먼저 들먹인 게 누군데 지금 나한테 뒤집어씌워요? 참 나.”

오월동주로 같은 배를 타긴 했지만 둘 사이에도 앙금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오가는 말이 결코 곱지 않았다.

서청규 사장은 백양옥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애써 웃어넘기고 말했다.

“소액주주연합을 끌어들여 싸움을 쉽게 가져가려던 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남은 건 역시 여론전이에요.”

“재벌 체면이 말이 아니네요. 그런 비렁뱅이들한테 손바닥 비비면서 알랑방귀까지 뀌는 신세라니.”

“허허, 형수님은 아직 덜 굶으셨군요.”

백양옥은 비아냥거리는 서청규 사장을 향해 눈을 흘겼다.

“뭐라고요?”

“급하면 똥이라도 주워먹을 각오가 되어있으셨어야죠.”

“격 떨어지게… 더러운 얘기는 관둬요.”

“그러죠.”

“아, 그리고 왜 자꾸 형수님이라고 불러요? 나 그쪽 형수 아니에요.”

“그럼 원대로 백양옥 씨라고 불러드리죠.”

“나, 벽호문화재단 이사장이에요. 어디서 함부로 씨씨거려.”

쯧, 서청규 사장은 불쾌한 듯 혀를 차고 말했다.

“예, 백 이사장님. 어쨌든 방구석에서 편안히 클릭 몇 번으로 권리를 행사할 소액주주들이 이 판을 결정할 겁니다. 환심을 살 방법이 필요해요.”

“어쩔 수 없죠. 차등배당 카드를 받는 수밖에.”

“별로 마음에 드는 카드는 아니지만 별수 없죠, 뭐.”

“배당 자체를 짜게 하면 되잖아요? 별 문제 될 거 없어요.”

반세습연합의 구성원들이 벌여왔던 추태를 물어뜯는 이쪽이나.

차등배당이나 투명 경영을 외치는 저쪽이나.

양쪽 다 핵심을 찌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핵심은 돌고 돌아 결국 얼마나 주주들이 가진 주식의 가치를 높일 것이냐는 점이었다.

서청규, 백양옥, 서승학이 얼마나 더러운 인간들인가 떠들어대는 건 가십거리는 된다.

그러나 그게 주가를 올려줄 경영능력과 직결되는 건 아니었다.

차등배당 역시 그랬다.

소액주주를 챙기는 제도이기는 하지만, 필래그룹은 그다지 배당에 너그러운 기업이 아니었다.

배당을 해봐야 푼돈이었다.

결국 주주들이 원하는 건 주가상승에 따른 차익 실현이었다.

둘 다 수박껍질만 열심히 핥는 와중에 결전의 날을 향해 달력은 열심히 넘어갔다.

소액주주들의 민심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당장 지금 민심이 어떤가 용케 알아도 주주총회 전날 돌발 변수로 인해 삽시에 변할 수 있었다.

통계가 있나 여론조사가 있나.

언론들도 부정확한 소스로 제멋대로의 분석을 내놓을 뿐이었다.

이런 분석 하라고 고액연봉을 받는 증권사 애널리스트도 열심히 보고서를 쓰기는 했지만, 예측은 반반으로 갈렸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이미 할 일을 다한 대찬은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대표실에 혼자 앉아 불안에 떠는 대찬에게 한태윤 전무가 다가왔다.

“대표님답지 않게 많이 긴장하신 듯합니다.”

“저답지 않은 게 아니에요. 저 원래 겁 엄청 많습니다. 남들 눈에 잘 안 띄어서 그렇지.”

한태윤 전무는 빙긋 웃으며 직접 타온 커피를 대찬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대찬은 눈짓으로 감사를 표했다.

한태윤 전무는 소파 팔걸이에 살짝 걸터앉으며 대찬을 바라봤다.

“대표님은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모르겠네요.”

“서원웅 부회장이 경영권을 지켜낼까요?”

“그걸 알면 제 손톱이 이러겠어요?”

대찬은 너덜너덜해진 검지 손톱을 보여주었다.

생전 없던 버릇이 갑자기 생길 만큼 대찬은 긴장하고 있었다.

단순히 돈을 날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이전에 은인인 서청수 회장과 절친한 친구인 서원웅의 운명이 달린 일이다.

대찬의 불안은 자본보다는 인간적인 이유가 더 컸다.

한태윤 전무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답을 모르시겠다면, 그냥 아무 생각 마시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나도 잊고 내 업무에 전념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네요.”

“그럼 업무 말고 잠깐 땡땡이도 치면서 머리 좀 식히세요.”

“…땡땡이요?”

“네.”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한태윤 전무는 대표실에 비치된 TV를 틀었다.

저 TV는 세상에서 재미없기로는 교도소 TV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대찬이 TV를 틀 때는 중요한 뉴스나 경제리포트 등 업무에 도움이 되는 경우로 한정되었다.

그러니 그의 TV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하나같이 정제되고 졸음을 유발했다.

대찬은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는 한태윤 전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 전무님, 뭐 하세요?”

“TV라도 좀 보면서 잡념을 떨치시라고요.”

대찬은 엉뚱한 그의 처방에 피식 웃었다.

“그게 뭐예요.”

“대표님, 뉴스속보 아니면 이 시간에 TV 틀어보신 적 없으시죠?”

“…예, 그렇죠. 평일에는 업무시간이라 켤 일이 없고. 주말에는 자느라.”

“이 시간이 의외로 재밌는 시간대거든요. 백수와 가정주부만 이 재미를 알죠.”

“아, 그래요?”

대찬의 물음에 한태윤 전무는 저도 모르게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전무님은 백수도 아니고 가정주부도 아닌데 이 재미를 어떻게 아실까요?”

대찬은 그를 향해 찌릿 눈총을 쐈다.

업무시간에 일 안 하고 이런 재미를 종종 느끼시냐는 눈빛이었다.

한태윤 전무는 험험 헛기침을 하며 대찬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변명했다.

“제,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와이프가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아는 거죠.”

“믿어드리겠습니다.”

“진짭니다.”

한태윤 전무는 당황한 손가락으로 채널을 얼른 바꿨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이 시간대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아침드라마죠. …라고 와이프가 그러더라고요.”

“아, 예.”

대찬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무슨 대단한 걸 보여주나 싶었는데 결국은 아침드라마.

대찬은 아침드라마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한태윤 전무의 성의를 봐서 일단 TV로 눈을 옮겼다.

“어, 마침 시작하네요.”

강렬한 오프닝 음악과 함께 자극적인 필치의 제목이 등장했다.

대찬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의 유혹?”

“이게 요즘 아침 시간대를 확 사로잡은 명작 드라마입니다.”

“제목이 뭐 저래요?”

“미국 대통령이 한국 여자 대통령한테 반해서 나라를 갖다 바친다는 내용이거든요?”

“뭐라고요……?”

대찬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미국 대통령 역을 맡은 말쑥한 백인 신사가 등장했다.

그 백인 신사는 아마도 한국 대통령 역할일 것 같은 여자 배우의 손을 와락 잡았다.

배경으로 보아 장소는 G20 정상회담인 듯했다.

-경애, 나도 나를 모르겠어요. 당신만 보면 가슴이 뛰고 정신을 못 차리겠어. 나 한국어 과외도 받고 있어요.

-이러지 말아요, 피터. 우리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대통령이에요.

-만약 경애가 이번 방미 일정에서 내 소유의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해준다면 주한 미군 주둔비를 반으로 깎아주겠어요.

-뭐라고요?

-경애, 당신이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러겠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 피터…….

대찬은 경악했다.

“…이거 미국한테 소송 안 걸렸어요? 외교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예, 아직까지는 다행히…….”

-경애, 나는 경애를 위해서라면 탄핵까지 당할 수 있어요. 수정헌법 2조만큼, F22만큼 당신을 사랑해…….

-피터…….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대찬의 입이 저도 모르게 천천히 벌어졌다.

대찬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어느새 아침드라마 ‘대통령의 유혹’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금세 드라마에 집중하는 대찬을 보고 한태윤 전무는 흐뭇하게 웃었다.

“다 좋은데 경애 역할 맡은 배우 연기가 좀 아쉬워요. 윤이영 씨라면 아주 완벽했을 텐데.”

“…윤이영이 저기 나오면 이혼 사유가 된다고 생각해요.”

한태윤 전무는 흐흐 웃으며 진위생에게 손짓을 해 간단한 간식을 부탁했다.

그가 가져온 간식을 대찬의 손에 들려주자, 대찬은 무언가에 홀린 듯 시선은 화면에 고정한 채 감정 없는 기계처럼 과자를 씹었다.

미국 대통령에게 방위비 삭감을 약속받고 돌아오는 경애.

그녀에게 중국 국가주석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대통령 각하.

-아, 주석님.

-피터와 단둘이 무슨 얘기를 했죠?

-그냥, 별 얘기 안 했어요.

-별 얘기 안 했다면서 왜 내 눈을 피해요.

-그냥…….

-경애, 날 좀 봐요.

-주석님, 정신 차리세요.

-피터의 관심은 단순한 오리엔탈리즘적 호기심에 불과해요. 서양인의 흔한 언변에 놀아나지 말아요.

“뭐야, 주석도 꽂힌 거야?”

전 지구적 삼각관계에 대찬의 관심이 송두리째 빼앗긴 그때.

드라마가 갑자기 중단되었다.

대찬의 어깨가 움찔했다.

“뭐야, 갑자기 왜 끊어?”

한창 몰입하던 대찬은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익숙한 뉴스 오프닝 사운드가 들리더니 바로 아나운서의 모습이 나타났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특보를 알려드립니다.”

“…뉴스특보?”

아나운서는 정제된 목소리로 충격적인, 특히 잠깐 긴장이 풀려있던 대찬에게는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호주에서 요양 중인 것으로 알려졌던 필래그룹 서청수 회장이 현재 인천국제공항에 급거 귀국하였습니다.”

“뭐라고?”

대찬의 안면근육이 그대로 얼어버렸다.

서청수 회장이 귀국한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아니, 아예 그의 존재 자체를 잠시 잊고 있었다.

대찬을 비롯해 필래지주 주주총회에서 판돈을 건 사람들은 모두 서청수 회장의 죽음 이후만을 생각했다.

그들의 뇌리에 서청수 회장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서청수 회장이 갑자기 인천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니.

대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팔자 좋게 막장 드라마나 보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대찬의 복잡한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나운서의 발음은 안정되어 있었다.

-“현장에 나가있는 기자 연결해보겠습니다.”

“네, 저는 지금 인천국제공항에 나와 있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지금까지 호주에 머물며 치료에 전념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갑자기 귀국을 결정한 이유는 뭘까요?”

“서청수 회장은 인천공항에 도착하기 두 시간 전, 기자들에게 귀국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외에 별도의 내용은 밝힌 바 없어 현재로서는 귀국한 이유를 알긴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는 필래지주 경영권 분쟁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함이라는 관측이 우세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서원웅 부회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라는 뜻인가요?”

“아마도 그럴… 어, 지금 서청수 회장이 나옵니다! 서청수 회장의 말을 듣고 이어서 전해드리겠습니다.”

화면은 황급히 서청수 회장을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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