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17화
“응.”
“알고 보니까 제법 가까운 사이였더라고.”
“…가까운 사이라니?”
“나랑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이야. 그 건너야 할 한 다리가 석우룡이더라고.”
석우룡이라는 말에 서원웅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석우룡? 석우룡 전 의원 말이야?”
“그래, 보니까 소액주주연합 대표가 지방선거 때 도의원으로 출마했더라고. 아마 나랑 스치듯이 보기도 했을 거야. 본업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학원을 하고 있더라고. 원장님이야.”
“그럼 소액주주연합의 결성을 석우룡이 부추겼다는 말이야?”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그렇다고 봐야지. 그랬을 공산이 커. 그렇게 나를 물 먹이려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딱히 석우룡 그 양반한테 이득은 안 되겠지. 하지만 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니까.”
“만약 배후에 석우룡이 있다면 이쪽보다는 저쪽 편을 들어줄 공산이 크네.”
“지금 주장하는 차등배당만 해도 네 입장에서 썩 반가운 건 아니지.”
“석우룡은 정치인이야. 이쪽에 붙는 대가로 자기한테 뭘 찔러 달라고 할 수도 있어.”
대찬은 씩 웃었다.
“얼마든지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지.”
“뭐가 됐든 우리한테는 좋을 게 하나 없네.”
“응, 소액주주연합은 깨뜨려야 할 적이야. 그 의도가, 아니 존재 자체도 불순하고 정치적이니까.”
“하지만 대외적으로 소액주주연합은 지지를 받고 있어.”
“알아.”
심지어 대찬과 깊이 결부된 극동일보 역시 소액주주연합에 긍정하는 사설을 내놓았다.
편집국장으로 앉아있는 전길재는 정말 자신이 다짐한 대로 대찬의 편의를 봐주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신문을 내보냈다.
진보적인 의제에 찬성하는 신문들도 이 소액주주연합을 긍정했다.
재벌의 입김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주주들이 자주적으로 목소리를 내니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그걸 알기에 서원웅도 함부로 소액주주연합을 와해시키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되레 역풍을 맞을 테니까.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왕윤수 실장님도 어쩔 수 없이 안고 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왕 실장님이 직접 소액주주연합쪽과 교섭에 나섰어.”
“…그래? 2%가 결정적이긴 하지만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텐데.”
“그렇다고 경영권을 저쪽에 홀라당 뺏길 수는 없잖아.”
“그럴 수는 없지.”
“국민연금이 슬슬 저쪽에 붙을 자세를 취하는데 소액주주연합까지 저쪽에 뺏기면 정말 위험해져.”
걱정하는 서원웅에게 대찬은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을 내놓았다.
“내가 손볼게.”
“…손을 본다고? 소액주주연합을?”
“응.”
서원웅은 대찬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 불안했다.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다음 총선에서 석우룡 밀어주기라도 하려고?”
“미쳤어? 흥읍 지역구는 최재한이가 천년만년 벽에 똥칠할 때까지 해먹어야 돼. 김영삼, 김종필이 9선 했지? 우리 최재한은 10선 시킬 거야.”
“그럼 무슨 수로 저쪽을 손봐줘? 설마 마강국한테 정치깡패 롤이라도 맡기려고 그래?”
“야인시대 찍냐. 아니야.”
“…뒤탈 있는 방법은 아니지?”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절대 아니야.”
언론의 관심은 연일 반세습연합과 소액주주연합에 쏠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반세습연합은 연일 추가 지분을 끌어모으고 강한 어조로 세습연합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소액주주연합 역시 그들과 합이라도 맞춘 듯 세습연합을 공격했다.
그런데 마땅히 그들의 공세에 내세울 패가 없는 세습연합은 입을 꾹 다물고 농성에 들어간 참이었다.
필래 측과 친한 기자들이 그들의 기사를 써주려고 해도 거리가 없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들에게 오랜만에 건수가 생겼다.
그간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대찬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딱딱한 자리는 아니고, 로튼 프룻츠의 신기술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작은 차담회에 나선 것.
기자들 몇 명이 초대를 받아 로튼 프룻츠 목장을 견학하고 둥근 탁자에 모여 앉았다.
대찬은 소액주주연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기자들과 하하 호호 웃으며 과자를 까먹고 차를 마시며 열심히 로튼 프룻츠를 홍보했다.
“조만간 분쇄육 형태가 아닌 우리가 흔히 먹는 한우구이나 스테이크처럼 즐길 수 있는 3형 비도축육을 보급할 계획입니다. 비도축육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거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기자님들도 김영란법에 저촉되지 않는 고급 쇠고기를 식당에서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기자들은 한가롭게 비도축육 얘기나 나누자고 흥읍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대찬은 명실공히 세습연합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언론에서는 그를 일컬어 말하기를, 전처 홍승연은 가짜 반려자이고 실은 조대찬이 서원웅의 실질적인 반려자라고 했다.
짓궂은 기자들은 사담을 나누면서 홍승연이 완전히 나가떨어지니까 본처로서 속이 시원하시냐는 농담까지 던지는 판이었다.
게다가 서원웅에게 결정적인 지원이 되는 6%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었으니, 명실공히 세습연합의 수석 백기사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창 뜨거운 감자인 필래그룹 경영권 분쟁을 기자들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3형 비도축육을 자랑하는 대찬을 향해 용감한 기자 하나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 대표님.”
“네, 기자님 성함이… 아, 유소진 기자님. 오랜만이에요.”
로튼 프룻츠가 영세업체에 불과하던 시절.
조지아 와인 품평회를 열었을 때 시비를 걸던 구본진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주었던 기자였다.
최재한의 후배이기도 해서 사적으로도 몇 번 만나 교류한 사이였다.
대찬은 호의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유소진 기자를 바라봤다.
유소진 기자도 빙긋 웃었다.
“아, 하하, 네, 오랜만입니다. 질문 하나만 드리려고 하는데.”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라고 이 자리에 모신 거니까요.”
“로튼 프룻츠와 관련 없는 질문도 가능합니까?”
“혹시 그새 연예부로 소속 옮기신 건 아니죠? 윤이영 씨에 대한 질문은 사양입니다.”
대찬은 다 알면서도 부러 헛다리를 짚었다.
유소진 기자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아닙니다.”
“그럼 편하게 질문하세요.”
유소진 기자는 얼굴 좀 아는 사이라고 편의를 봐주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길재와는 또 다른 종류의 독종이었다.
“필래그룹 관련한 질문인데요.”
대찬은 난처한 듯 씩 웃었다.
“아, 그걸 짐작 못했네요.”
“일단 허락하셨으니 질문을 하겠습니다.”
대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셔야죠.”
“최근 세습연합이 참 여러모로 곤경에 처해있지 않습니까? 반세습연합도 그렇고, 소액주주연합도 그렇고…….”
“세습연합이란 표현 대신 차라리 친서원웅 주주연합이라고 하는 게 낫겠습니다. 부르는 말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예, 그럼 친서원웅 주주연합으로 하겠습니다.”
유소진 기자의 대답에 대찬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여러모로 난처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시겠죠.”
대찬은 전혀 난처하지 않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지난번 부인의 난에 동참했던 분들이 낯짝도 두껍게 투명한 경영을 운운하면서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거든요.”
“하하…….”
“저는 그분들이 주장하는 가치를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욕하는 갖가지 비난에 부합되는 분들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대찬은 작심하고 서청규 사장과 백양옥을 공격했다.
“백양옥 여사님. 그분은 서청수 회장님 살인을 교사한 혐의로 몇 년 감옥 생활을 하셨죠? 서청규 사장님은 갑질 논란으로 몸살 좀 앓으셨고요.”
“예. 당시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승학 씨, 하하… 그분은 더 할 말도 없고요.”
“물론 그분들께도 흠결은 있습니다. 하지만 주장하는 바는 일리가 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예, 일리야 있죠. 근데요. 전두환 씨가 만든 당 이름이 민주정의당이었나요? 그분이 주장했던 건 민주와 정의인데 과연 그렇던가요?”
유소진 기자는 쓴웃음만 지었다.
대찬은 분명한 어조로 덧붙였다.
“때로는 슬로건보다 그걸 말하는 입술의 주인에 주목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하, 신랄하시네요.”
“감정이 좋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대찬에게 반세습연합을 들먹여 별 재미를 못 본 유소진 기자는 다음 카드를 꺼냈다.
“소액주주연합은 어떻습니까? 그쪽에서 대표님을 일컬어 서씨 집안의 가업을 위해 머슴 노릇을 자처했다고 하던데.”
대찬은 피식 웃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죠. 제가 원래 서씨 머슴 출신 아닙니까.”
그의 태연한 반응에 유소진 기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모욕적이실 텐데요.”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그분들 주장이 상당히 합리적인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소액주주의 권리, 중요합니다.”
“그럼 그분들이 주장하는 차등배당 같은 의제에 동의하시는 겁니까?”
“차등배당도 좋지만, 우선 가장 중요한 건 소액주주의 의사가 주주총회에 반영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찬의 말에 유소진 기자도 동의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소액주주연합이라고 불리는 단체가 모든 소액주주들을 대변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현재까지 소액주주연합이 확보한 지분은 2%입니다. 모든 소액주주들을 대변한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네, 소액주주연합의 출범으로 소액주주의 목소리가 더 커지는 건 사실입니다만, 이미 대표자가 그 지분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는 시점부터 소액주주의 목소리가 온전히 담길 수 없습니다. 구조적으로요. 그저 새로운 대주주의 출현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는 실정입니다.”
“아뇨, 대안이 있습니다.”
유소진 기자는 물론 동석한 기자들이 대찬의 입술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떤 대안이…….”
“5G 시대라고 하는데 지금의 주주총회 방식은 전혀 발전된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자기 파편에 쫓아낼 인물을 적어내는 고대 그리스 시대랑 별로 다를 것도 없거든요.”
“하하.”
“이미 그런 구식 회의를 벗어날 제도적, 기술적 준비는 예전에 끝났습니다. 다만 필요에 의해 외면되고 있을 뿐이죠.”
“준비라고 하시면…….”
“전자투표제요.”
유소진 기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주주총회장에 참석하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 말이죠.”
“네, 전자투표제만 도입한다면 소액주주연합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나 의지만 있으면 직접 지분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니까요.”
“옳은 말씀입니다.”
대찬은 기자들을 바라보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차나 마시자고 기자 여러분을 모셨지만, 내친김에 제안하겠습니다. 소액주주의 확실한 권리행사를 위해 이번 주주총회에 전자투표제를 도입해줄 것을 건의합니다.”
-조대찬, ‘전자투표제’ 도입 제안…소액주주연합 좌초 위기
전자투표제 도입 제안으로 소액주주연합은 무력화되었다.
대찬의 선언으로 그들의 존재근거 자체를 소멸시켰다.
2%의 지분을 모으고, 점점 더 덩치를 불려 필래그룹의 운명을 결정하려고 출범했던 소액주주연합은 대찬의 말 한마디에 마법처럼 희미해졌다.
소액주주연합의 대표이자 석우룡의 끄나풀이었던 이는 갑자기 봉착한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하, 하지만 소액주주연합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나서야 차등배당을 실현하고… 어… 대주주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소액주주연합 대표는 눈알이 팽팽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대찬은 그 장면을 보고 냉소했다.
“저러니까 도의원도 떨어지지.”
필래그룹 이사회는 주주총회에 전자투표제를 도입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소액주주연합은 그래도 해산하지 않겠다고 떼를 쓰다가 역풍만 맞고 그대로 무너졌다.
석우룡의 끄나풀이 필래그룹의 운명을 정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왕윤수 실장은 서원웅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대찬을 추켜세웠다.
“조 대표가 난 사람은 난 사람입니다. 말 한마디로 꽉 막힌 속을 뚫어줬으니.”
“솔직히 대찬이가 서씨였으면 필래는 진즉 삼라그룹 뺨 때리고도 남았을 거예요.”
왕윤수 실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자책은 마시고요.”
“일단 대찬이 덕분에 큰 산 하나는 넘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저쪽에 기울었던 판세가 다시 중립으로 돌아온 것뿐입니다.”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전자투표제가 우리한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죠.”
“네, 여론에 좌지우지될 수 있는 환경이 된 겁니다.”
소액주주의 절반만 전자투표에 참여해도 그들의 힘에 의해 필래그룹의 주인이 결정될 판이었다.
귀가 얇은 개미들이 헛소문이나 언론플레이에 휘말려 저쪽에 표를 던지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
왕윤수 실장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지분싸움이 아니라 여론전입니다.”
“양상이 그렇게 됐군요. 아무리 상속세가 문제고 지분이 과반이 안 된다지만 이렇게까지 아슬아슬하게 될 줄이야.”
왕윤수 실장의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