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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16화 (516/556)

난 할 수 있어 516화

필래그룹은 서청수 회장의 상태를 밝히는 걸 꺼렸다.

그러는 사이 서청규 사장이 먼저 서청수 회장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폭로했다.

게다가 빌리언보이스를 참전시켜 실리와 명분을 동시에 취했다.

필래그룹은 여기에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저 상식과 순리대로 일을 처리하겠다는 말뿐이었다.

빌리언보이스가 운용하는 자금은 도합 2조 원으로 상당한 규모였다.

이제 양측은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했다.

대찬 역시 온 신경을 필래 쪽에 곤두세웠다.

필래 비바체의 매각은 서원웅의 경영권이 온전하게 지켜진 다음에 가능했다.

즉, 필래가 저쪽으로 넘어가면 비바체의 인수도 수포로 돌아간다.

대찬은 추승호 이사를 필두로 한 경영지원본부 직원들을 소집했다.

경영지원본부장 추승호 이사가 안경을 들썩이며 준비한 자료를 읽었다.

“현재 서청규-백양옥-서승학-빌리언보이스, 소위 반세습연합이 가진 지분은 도합 18%입니다. 여전히 서청수 회장님 사후에 서원웅 부회장이 확보할 우호지분에는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 스코어죠. 게다가 회장님이 작고하시면 추가로 서승학한테도 약 4% 지분이 들어가니까 도합 22%정도 되겠네요.”

대찬의 지적에 추승호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전히 덩어리째 떠 있는 지분들이 많습니다. 그걸 어느 쪽에서 흡수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저쪽이 반세습연합이니 우리는 세습연합입니까? 네이밍부터가 불리한데.”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서청규 사장이 빌리언보이스를 동맹으로 끌어들이면서 세습과 반세습의 구도가 굳어졌습니다.”

“회장님 사후 우리 쪽 지분은 어떻게 됩니까.”

“약 38%입니다.”

“이쪽 38%, 저쪽 22%, …그럼 남은 건 40%.”

추승호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는 남은 것 중 13%만 더 가져오면 과반이 됩니다.”

“그렇다면 저쪽은 29%가 더 필요하니… 아직 구도는 우리한테 유리하긴 하네요.”

대찬의 말에 추승호 이사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 쪽에는 더 여력이 없습니다. 이미 서원웅 부회장 측에서는 상속세와 기타 제반 비용을 고려하면 추가로 돈을 댈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오히려 갖고 있는 지분을 울며 겨자 먹기로 팔아치워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겠죠…….”

“예, 결국 대표님의 역량에 달려있습니다.”

“제가 단독으로 13%를 추가로 확보할 힘이 없는 건 추 이사님도 잘 아시겠죠.”

“네, 거기까진 무립니다. 사재를 그만큼 동원할 수 없는 건 당연하고, 만일 지분교환을 넘어서 회사 자금을 필래지주에 밀어 넣겠다고 하면, 우리 측도 자칫 치명상을 입을 확률이 큽니다.”

“그렇겠죠….”

“저는 로튼 프룻츠의 경영지원본부장으로서 그 생각에는 끝까지 반대표를 던지겠습니다.”

대찬도 그 말에 승복했다.

“나도 내 밑천을 털어 도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게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결국 과반 확보는 힘들고, 최대한 개인 투자자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6%를 가진 국민연금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추승호 이사의 말에, 자리에 동석한 한태윤 전무가 찜찜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청규 사장이 고지를 선점한 상태입니다. 서원웅 부회장이 서자라는 점을 부각시켜 혈통의 불순함을 지적하고, 여태 큰 실적이 없다는 걸 들어 능력도 부족하다며……. 그에 반해 저쪽은 세습의 고리를 끊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추승호 이사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이 명분이 더 먹힌다면 국민연금도 저쪽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민연금마저 중립노선을 버리고 서청규 사장 측에 붙는다면 상황은 백중세가 된다.

그 정도가 되면 개인투자자들의 민심도 서원웅보다는 전문경영인 쪽을 신뢰할 공산이 컸다.

그러면 필래그룹은 서청수 회장의 남보다 못한 동생과 악연으로 점철된 전처의 손에 들어간다.

투명한 경영이라는 좋은 허울을 뒤집어썼지만 그건 단순한 슬로건일 뿐.

실제로 실현될 확률은 적었다.

게다가 대찬은 헛돈만 쓰고 비바체를 닭 쫓던 개처럼 바라만 봐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건 대찬에게도 크나큰 오점으로 남을 터였다.

전쟁이 선포된 이후.

양측은 총알 대신 돈으로 전쟁을 치렀다.

대찬이 마음에 들어 하진 않지만, 세간에서 부르는 ‘세습연합’에는 기존 38%의 지분에 추가로 13%가 더 필요했다.

대찬은 자기 일처럼 싸웠다.

그는 상당한 프리미엄을 얹어 조윤재단의 이름으로 3%의 지분을 추가로 사들였다.

서청수 회장의 오래된 부하들이 조직한 사조직인 ‘필우회’에서도 마른걸레를 쥐어짜듯 돈을 모아 지분을 사들였다.

물론 최선을 다했다고는 하나 필우회의 지분은 전체 지분의 1% 남짓한 금액에 불과했다.

이로써 ‘세습연합’의 잠정 우호지분은 약 42%.

서청규 사장은 이 싸움이 해볼 만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간 필래유통의 경영 안정성을 위해 확보해두었던 유동자금을 공격적으로 풀었다.

백양옥과 서승학 역시, 이를 악물고 복수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실탄이 넉넉한 빌리언보이스는 기존 지분에서 추가로 물주를 확보해 지분 10%를 더 집어삼켰다.

빌리언보이스는 총 15%의 지분을 확보했다.

이로써 ‘반세습연합’의 잠정 우호지분은 약 33%가 되었다.

‘세습연합’의 잠정 우호지분 42%. ‘반세습연합’의 잠정 우호지분 33%.

양측의 싸움이 격화되면서 필래지주의 주가는 치솟았고, 이는 양측이 추가로 지분을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돈으로 안 되니 이제는 민심을 잡아야 했다.

이 사태를 촉발시킨 장백주 실장은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회사에 사표도 내지 않고 무단으로 결근, 자택에도 없고 연락도 닿지 않아 증발되었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자기 할 일을 마친 그는 은신처에 숨어 서청규 사장이 승리하기만을 전전긍긍하며 기다렸다.

양측은 개인 투자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이쪽에 자기 지분을 맡기겠다는 위임장을 써달라는 것.

돈으로 안 되니 붙들고 우는소리라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상대방이 이기면 주가가 아작이 날 테니 이쪽에 붙는 게 합리적이라는 조곤조곤한 협박도 동원했다.

그러나 개인 투자자들에게 위임장을 받는 일은 녹록하지 않았다.

왕윤수 실장은 필래그룹 직원들을 일일이 소액주주들의 자택에 방문하도록 해서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반세습연합 역시 마찬가지.

그만큼 양측이 절박했다.

그 와중에 서원웅과 대찬에게 악재가 터졌다.

진위생이 대찬의 집무실로 들어와 급하게 알렸다.

“대표님, 이 기사 보셨습니까.”

“…무슨 기사요?”

진위생은 문서로 출력한 기사를 대찬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대찬은 심각한 표정으로 출력물을 들어 읽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고위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이번 필래그룹 주주총회에서 반세습연대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미 구도가 세습 대 반세습으로 굳어진 이상, 국민의 여론을 감안해야 하는 국민연금으로서는 반세습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름의 분석을 내놓았다.

또한 그는 “서원웅 부회장이 실질적으로 그룹을 지휘하면서 큰 과도 없지만 큰 공도 없다는 것 또한 국민연금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국민연금은 반세습연합에 동참하기로 결정한 걸까.

해당 관계자는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며 선을 그었다. 그는 “세습연합이 그 오명을 씻기 위해 획기적인 경영개선안을 발표하면 국민연금이 그들의 손을 들어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고위관계자는 획기적인 경영개선안의 구체적인 예시까지 들어 설명했다.

파격적인 일자리 창출ㆍ적극적인 배당·신규투자 등이다.

대찬은 신경질적으로 기사를 탁자에 도로 내려놓았다.

“잠자코 중립이나 지킬 것이지. 이때다 싶어서…….”

국민연금이 어떤 루트로든 주주총회 전 입장을 내비치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진위생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예 가이드라인까지 짚어주네요. 일자리 창출, 배당, 신규투자…….”

“그걸 안 해주면 저쪽을 밀어주겠다, 이런 건데.”

말이야 좋다.

일자리를 창출하면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고, 높은 배당은 주주들에게 기여하는 것이고, 신규투자는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게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누구에게나 다 형편이 있다.

필래그룹이 형편껏 경영개선안을 내놓아도 국민연금은 그걸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획기적인’ 경영개선안이니까.

필래그룹의 형편을 벗어나는 요구일 게다.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야 지킬 게 많은 입장이지만, 저쪽은 어떻게든 경영권을 빼앗아 와야 하는 입장이니.”

“그쪽은 뒤도 안 돌아보고 콜 하겠죠.”

“안 그래도 골치 아픈데 국민연금까지 이렇게 말썽을…….”

대찬은 탁 이마를 짚었다.

국민연금마저 저쪽에 돌아서면 상황은 더 짙은 안개 속으로 빠진다.

굴지의 대기업을 누가 가질 것인가.

그 중차대한 결정이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소액주주 개미들의 손에서 이뤄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개미들도 그걸 알았다.

필래지주의 소액주주 지분은 상당했다.

하지만 대개의 주주총회장에서 그 많은 소액주주들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소액주주라는 게 결국은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들이다.

모이면 크지만 각각이 가진 지분은 모래 알갱이 수준에 불과하다.

모래 알갱이만큼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하루 장사를 공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대개 주주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거대한 지분이 제 목소리를 못 내고 그대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일쑤였다.

그런데 필래지주의 경영권 분쟁에서 소액주주의 역할이 갑자기 대두되자 일반적인 주주총회와는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다.

-“저는 필래지주의 주식 200주를 소유한 소액주주입니다. 지분으로 따지면 기업공시에 0.0%라고 나오는 개미입니다.”

갑자기 웬 남자가 전면에 등장했다.

평범한 중년의 인상인 그는 갑자기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별다른 경력도 없는 그가 언론의 관심을 받은 건 분명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대찬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화면에 등장한 그를 바라봤다.

‘뒷배가 있긴 있는 거 같은데.’

-“저는 우리 소액주주들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서 소액주주연합의 결성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필래지주의 소액주주 여러분, 이번 사태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익이 걸린 일입니다. 하나로 뭉쳐 우리의 목소리를 냅시다!”

평범한 시민이라는 양반이 잘도 웅변조의 목소리를 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으로, 어디 작은 선거판에라도 굴러본 것이 틀림없었다.

즉,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세미프로 ‘꾼’이었다.

그가 아마추어건 세미프로건 사람들은 관심 갖지 않았다.

단, 그가 내건 제안에는 관심을 보였다.

‘소액주주의 이익을 실현하자.’

말이야 바른말이기에 필래지주의 소액주주들은 이에 호응했다.

서청규 사장이 리더 노릇을 하는 반세습연합은 즉각 환영 성명을 냈다.

-“우리가 이 싸움에 뛰어든 건 다름 아닌 소액주주를 위해서입니다. 그 장본인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하겠다고 하니 쌍수를 들고 환영합니다. 필래그룹 역시 이에 비열한 반대의사를 표하지 마십시오.”

반세습연합의 힘을 받아 소액주주연합은 삽시간에 세력을 불렸다.

어느 정도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면 소액주주도 굳이 나설 이유를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구도가 백중세로 흐르고 소액주주가 이 큰 무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하니, 관심을 보이는 주주들이 많았다.

소액주주연합은 출범을 선언한 지 사흘 만에 2%의 지분을 확보했다.

2%면 판세를 결정지을 수도 있는 지분이었다.

소액주주연합의 대표는 더욱 자신감에 차서 이 판의 주인인 양 행세했다.

더욱 상황은 혼탁해졌다.

-“우리 소액주주연합은 우리의 이익실현을 위해, 소액주주에게 더 많은 배당금을 지급하는 차등배당제 도입을 요구합니다!”

대찬과 서원웅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전화통화를 했다.

서원웅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의 곁을 지키지도 못하고 이 시궁창 같은 돈놀이에 빠져 있어야 함을, 그리고 그 시궁창에서 벗어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물론 심신은 크게 지쳐 있었다.

대찬은 그를 구태여 위로하지 않았다.

왕관을 쓰려면 그 무게를 홀로 감당해야 함을 서원웅도 모르지 않을 테니까.

“소액주주연합. 그쪽 대표를 좀 알아봤는데.”

대찬의 말에 서원웅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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