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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15화 (515/556)

난 할 수 있어 515화

그런 와중에 대찬은 조윤재단을 통해 보유한 극동일보의 지분 10%를 극동일보 임직원조합에 매각했다.

역시 이것 또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뒤따랐다.

대찬은 세간에서 뭐라고 떠들건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정해진 일을 묵묵히 해냈다.

대찬은 확보된 현금을 들고 영국의 한 투자은행과 접촉했다.

필래지주의 지분 3%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 딜이 성사된다면 대찬은 로튼 프룻츠와 조윤재단을 통해 필래지주의 지분 6%를 갖게 된다.

이 6%는 서원웅의 든든한 백기사로 그 가치를 발할 것이다.

대찬이 6%의 지분으로 서원웅의 뒤를 받치면.

서청수 회장의 사망에 따른 공백을 파고들려는 세력들이 지레 시도 자체를 포기할 가능성이 컸다.

대찬은 투자은행의 고위관계자와 극비리에 회동했다.

“저희 은행이 가진 필래지주의 지분을 인수하고 싶으시다고요.”

“예.”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참 재밌던데요.”

“당사자는 재미를 느낄 겨를이 없지만 지켜보는 사람은 재미있을 수도 있겠네요.”

“특히 필래지주 주식을 소유한 쪽이라면 물질적으로도 재미를 볼 수 있겠어요.”

대찬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싼값에 사들일 기대는 없습니다.”

“참 저희로서도 좋은 기회인데. 아깝네요.”

“…아깝다뇨.”

대찬은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투자은행 관계자는 대찬의 눈을 별로 마주치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 대화 자체에 흥미가 없는 눈치였다.

말투와 행동에 예의를 갖추긴 했지만 그건 딱 형식적인 수준이었다.

마치 자신은 제3자라는 듯.

“이미 저희 은행 지분은 다른 쪽에 매각하기로 결정이 됐습니다.”

“…뭐라고요?”

“필래유통과의 지분 매각 협상을 마쳤습니다.”

“…….”

대찬의 정신이 잠시 멍해졌다.

필래유통.

오래 잊고 있었던 이름이 다시 대찬의 앞에 다가왔다.

관계자가 말한 필래유통 네 글자가 암시하는 바는 컸다.

서청수 회장의 동생, 서청규가 사장으로 있는 필래유통.

서청규 사장은 백양옥이 일으킨 쿠데타에 협력했다가 실패한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필래지주의 지분 10%를 모두 매각하고 계열분리를 선언해 독립했다.

그런 서청규 사장의 필래유통이 다시 필래그룹의 세력 싸움에 끼어들었다.

아무 이유 없이 끼어들진 않았을 것이다.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되니 끼어들었을 것이다.

승산이 있음을 귀띔해준 장본인을 추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찬은 입술을 깨물었다.

‘…장백주가 기어이 최악의 수를 뒀구나.’

영국 투자은행의 지분 3%는 이미 많은 지분을 확보한 서원웅 측에는 의미가 있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지분을 쌓아 올려야 하는 반대편에는 그다지 위력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청규 사장이 사들인 3%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호주에서 서청수 회장의 현실을 목도한 장백주 실장은 바로 서청규 사장을 떠올렸다.

적의 적은 나의 동지일지니.

이미 서청수 회장이 죽네 마네 하는 걸 확인한 장백주 실장이다.

그는 더 이상 서청수 일가에 충성할 이유가 없었다.

단순한 이익과 손해의 문제이기에 앞서 인간적인 신뢰의 문제가 우선했다.

‘그 모양 그 꼴이 됐는데도 나한테는 꽁꽁 숨겼다 이 말이지…….’

장백주 실장은 서청수 회장에게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

끈끈한 신뢰로 연결돼있다고 생각했던 서청수 회장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그나마 그런 서청수 회장도 얼마 안 있으면 죽을 목숨.

앞으로 서원웅 체제에 돌입하면 자신을 위한 자리가 마련돼 있지 않음을, 그는 잘 알았다.

왕윤수 실장이 사람을 풀어 자택까지 수색했다는 소식을 들은 장백주 실장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장백주 실장은 바로 서청규 사장과 은밀히 접촉했다.

그는 서청규 사장에게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그대로 고해바쳤다.

묵묵히 장백주 실장의 말을 듣던 서청규 사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형님이 얼마 안 남으신 것 같다고?”

“네.”

“그 정보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의 오른팔에게서 듣게 될 줄이야…….”

“인생사 다 그렇죠.”

서청규 사장은 피식 웃었다.

“그걸 나한테 알려준다는 건, 나더러 전쟁터에 끼어들라는 소리겠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내가 장 실장을 하루 이틀 본 게 아니잖아.”

“…네?”

“장 실장, 이쪽으론 대가리 잘 안 굴러가잖아?”

“…….”

서청규 사장은 장백주 실장보다 연하였다.

이제는 피차 상하관계도 아닌데, 예의를 밥 말아먹고 반말을 찍찍 건네는 게 장백주 실장에게는 부아가 솟는 행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일단 꾹 참았다.

“그런 대가리로도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쉽게 도출될 정도라면, 정말 가능성이 있는 거겠지.”

장백주 실장은 업신여기는 몇 마디에 큰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화를 꾹 눌러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지분을 물리긴 했지만, 나도 지분 변동은 예의주시하고는 있었어.”

“그럼 결정은…….”

“우리 브레인들하고 토의를 거친 후에 내리도록 하지. 장 실장이 이런 결심을 했으면 바라는 게 있을 텐데.”

“큰 건 안 바랍니다. 단, 작은 계열사라도 하나 맡게 해주시죠.”

서청규 사장은 빙긋 웃었다.

“작은 계열사 사장 자리 정도야 서원웅한테 계속 빌붙어 있어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텐데?”

“월급 사장이 아니라 아예 제 것으로요.”

지금껏 서청수 회장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콩고물을 많이 주워 먹기는 했다.

그러나 그 ‘많이’는 어디까지나 월급쟁이의 기준이었다.

망해도 삼대는 갈 정도의 부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규모는 작지만 견실한 계열사 하나를 받는다면.

일생토록 사장님 소리 들으면서 어디에 아쉬운 소리 할 일도 없을 테고, 대대손손 물려줄 수도 있었다.

어차피 그의 의리는 서청수 회장에게 한정되어 있는데, 몇 개월의 시한부 의리를 지키고 주군과 함께 순장되고 싶지는 않았다.

몇 개월 따가운 눈총에 시달리고 여생을 풍족하게 보내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장백주 실장의 말에 서청규 사장은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룹을 먹을 수 있다면 작은 계열사 하나쯤이야 빠져도 티도 안 난다.

장백주 실장이 돌아가고, 서청규 사장은 자신의 측근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해볼 만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결정이 되었으니 행동은 거칠 것이 없었다.

서청규 사장은 웃돈을 얹어 영국 투자은행의 지분 3%를 사들이는 것으로 다시 한 번 고지전에 돌입하리라 선언했다.

물론 서청규 사장 단독의 힘으로는 어림없었다.

그는 전통의 파트너에게 손을 뻗었다.

백양옥이었다.

여러 혐의로 수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백양옥은 은둔하고 있었다.

평창동 자택에서 웬만해선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좋아하던 갤러리 쇼핑도 삼가던 차.

그녀는 서청규 사장의 제안에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좋아, 그쪽이 손을 내밀면 기꺼이 잡아야지.”

미운 정마저 떨어진 전 남편의 시한부 선고에는 아무런 유감도 없었다.

백양옥 여사는 여전히 필래지주의 대주주였다.

그녀가 이사장으로 있는 벽호문화재단과 개인소유 지분을 합치면 8%.

게다가 서승학의 개인 소유 지분 역시 2%였으니 합이 10%로 지분이 적지 않았다.

서청규 사장이 공격적으로 지분을 사들이면 서원웅의 입지를 흔들 정도는 되었다.

영국 투자은행의 지분을 대찬보다 서청규 사장이 한발 앞서 확보하자, 필래그룹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왕윤수 실장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졌다.

똑똑이 왕윤수가 멧돼지 장백주한테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았다.

왕윤수 실장은 그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그는 서원웅의 앞에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아직 저들의 지분이 우릴 넘으려면 한참입니다. 너무 괘념치 마시고 앞으로를 잘 준비해주세요.”

서청규와 백양옥이 만났다.

전 시동생과 전 형수님이 만나 악수를 나눴다.

서청규는 다리를 꼬고 말했다.

“원웅이 그 녀석, 아직 자길 따라잡으려면 한참 남았다고 자위하고 있을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죠. 갈 길이 멀어요.”

“예, 갈 길이 먼데 제가 축지법을 좀 쓸 줄 압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서청규 사장은 빙긋 웃었다.

“제가 돈 많은 친구 하나를 물어왔습니다.”

서청규 사장의 강수로 제2차 대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저승사자’ 사모펀드, 필래 내전에 ‘참전선언’…오너 체제 종식·전문경영인 선임할 것

언론에서는 그 새로운 국면을 저승사자 같은 호들갑스러운 말로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마냥 호들갑만은 아니었다.

-“오너 가문 잡는 저승사자로 불리는 행동주의 사모펀드 빌리언보이스가 필래그룹 경영권 분쟁에 참전하겠다고 밝혀 화제입니다. 빌리언보이스는 태국 투자청과 노르웨이 연기금 등이 보유한 필래지주 지분 5%를 매입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2012년 빌리언보이스는 전문경영인에 의한 투명한 경영과 주주가치 제고를 목적으로 결성되었으며, 지금까지 오너 가문에 의해 경영이 이뤄지던 10개 회사의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긴 것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서청규 사장은 자신의 단독적인 힘으로는 경영권을 가져올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는 기회가 생겼다고 모든 밑천을 거기에 쏟아붓는 바보는 아니었다.

서청규 사장은 빌리언보이스에게 은밀한 제안을 했다.

나와 손을 잡고 필래의 경영권을 쟁취해내자.

우리가 승리해도 나 서청규가 회장 자리에 앉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선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자.

지금껏 10개 회사를 그들이 쓰는 말로 ‘정상화’시킨 빌리언보이스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제는 굴지의 대기업마저도 충분히 넘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필래그룹 회장의 동생이 스스로 찾아와 손을 내민다.

빌리언보이스는 일말의 고민 없이 이 싸움에 끼어들기로 했다.

서청규 사장은 왼쪽에는 빌리언보이스의 대표를, 그리고 오른쪽에는 서승학을 두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안녕하십니까. 필래유통 사장 서청규입니다. 저는 빌리언보이스, 그리고 서청수 회장님의 적자이자 제 조카인 서승학 씨와 함께 이 자리에서 필래지주 경영권의 확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임을 선언합니다.”

서청규 사장은 오랜만에 받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에 긴장보다는 짜릿한 스릴을 느꼈다.

그는 한 글자도 더듬지 않고 차분히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필래그룹은 현재 중요한 사실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필래그룹의 회장인 서청수 회장님은 중태에 빠져 있습니다.”

췌장암, 3개월 같은 세세한 정보는 알지 못하지만 서청규 사장은 중태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만일 중태가 아니라고 해도 서청수 회장의 신변에 이상이 있는 것은 확실하니 필래의 항변은 무색할 것이다.

-“서청수 회장은 서자인 서원웅 씨를 오너로 세우려 합니다. 재벌의 전형적인 2세 승계입니다. 하지만 이게 옳은 걸까요?”

그의 목소리만 들으면 독야청청 절개 곧은 선비요, 제국주의의 총칼에도 만세를 부르는 식민지 지식인이었다.

물론 속은 자기가 욕하는 형님보다 더 응큼했지만.

-“이 회사가 서청수 회장의 개인 소유였다면 이렇게 힘들여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는 개인 투자자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얻었다면, 개인 소유가 아니어도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즉, 서청수 회장이 이렇게 애를 쓰는 건 필래가 개인 소유의 회사도 아니요, 후계로 내세운 서원웅 부회장이 주주들의 마음을 얻을 인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원웅 부회장이 필래그룹의 주인이 되는 걸 방관해야 하는 걸까요?”

서청규 사장은 베테랑답게 연설에 능숙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언론을 향해 목소리에 점점 힘을 주어 말했다.

-“저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제 개인적으로 친형이 되는 사람이고, 서원웅 부회장은 제 조카입니다. 공공의 이익을 따지기에 앞서 사적으로는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서청규 사장은 좌우의 빌리언보이스 대표와 서승학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봤다.

-“이에 저는 빌리언보이스, 그리고 서청수 회장의 적장자인 서승학 씨와 함께 필래그룹의 경영권을 가져오고자 합니다. 저희가 필래그룹의 경영권을 가져온다면 전문경영인 체제를 내세워 반드시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필래그룹의 이익을 극대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청규 사장의 선언은 필래그룹보다 한 발짝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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