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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14화 (514/556)

난 할 수 있어 514화

달려가서 서 회장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읍소하는 것이 옳다.

그는 당장 호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으려다가 멈칫했다.

‘잠깐, 내가 가서 우는소리를 하면 CS가 받아줄까?’

서청수 회장이 그를 중용한 건 순전히 쓸모가 있기 때문.

늙은 사냥개가 이빨도 발톱도 빠져서 사냥꾼의 가랑이 사이로 숨어 낑낑거리면.

사냥꾼이 가엾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줄까.

‘절대 아니지.’

안락사면 다행이고 몽둥이찜질을 당해 가마솥으로 들어가는 게 예사이리라.

서청수 회장마저 그를 버린다면 정말 갈 곳이 없다.

장백주 실장은 손톱을 뜯으며 고민했다.

‘침착하자. 지금까지 나온 정보를 잘 조합해보자.’

그가 가진 정보는 빈약했다.

김태준과 왕윤수가 무언가를 긴밀히 의논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의논하는 일은 로튼 프룻츠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

‘로튼 프룻츠랑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것 같기는 한데… 단순히 무슨 사업을 같이하는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왕윤수는 의도적으로 여러 번 차량을 갈아타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로튼 프룻츠랑 아무리 대단한 일을 벌여봤자 기껏해야 계열사 매각 정돈데.’

겨우 그 정도의 일 갖고 김태준과 왕윤수가 동시에 달려들지도 않거니와, 차량을 갈아타는 번거로움을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윤수가 저 정도로 호들갑을 떨 정도라면 회사의 명운이 달린 일이야. 근데 아무리 서원웅을 내세웠다고 해도 회장님이 호주에서 요지부동이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영감이.’

장백주 실장의 귀가 쫑긋 섰다.

‘영감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시각. 로튼프룻츠 서울사무소.

장백주 실장의 끄나풀을 잡은 다음, 대찬은 왕윤수 실장과 마주 앉았다.

왕윤수 실장은 이마를 짚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초보 같은 실수를 저지를 줄이야. 며칠째 뒤가 밟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마하니 같은 회사 사람한테 뒤가 밟힐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대찬의 위로에 왕윤수 실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곧잘 하던 짓이었지요. 그걸로 사내 비리 폭로하려던 직원 여럿 잡았습니다.”

“아.”

대찬은 그 말마저 위로해주지는 못했다.

자업자득이라면 자업자득인가.

그런데 그 책임이 왕윤수 실장 개인 선에서 끝난다면 관계없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로튼 프룻츠에 불이익이 될 수도 있었다.

왕윤수 실장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부회장님이 취임하시자마자 장백주를 한직으로 좌천하라고 건의할까 했습니다만, 앙심을 품을까 그러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대로 회장 비서실장에 유임시켰죠. 그것도 분명한 페널티이긴 합니다.”

대찬은 굳이 그게 자신의 건의로 이뤄진 일임을 밝히지 않았다.

왕윤수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단독행동의 불씨가 된 건 아닙니다. 술이나 한 잔 먹어줬으면 무마할 수 있었는데. 비바체 매각에 지주회사 지분 때문에 주판알 튕기느라 도끼자루 썩는 줄을 몰랐습니다.”

“원인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는 건 이 시점에서 무의미합니다.”

“예, 조 대표님 말씀대로 이제부터는 대책을 논의해야겠죠.”

“장 실장을 한동안 묶어둘 방책이 없겠습니까?”

“좋은 말로 타이를 단계는 지났습니다. 장백주가 다른 덴 몰라도 자기 누울 자리 계산하는 덴 도가 텄습니다. 아마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럼 회유는 불가능하고, 압박은 유효합니까?”

“어정쩡한 압박은 장백주를 더 광분하게 만들 겁니다. 초고강도의 압박 카드를 꺼내야 합니다.”

“장 실장 건은 왕 실장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왕윤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 때문에 일이 그릇되는 일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필래 내부의 일에 대찬이 이 이상으로 간섭할 권한도 이유도 없었다.

대찬은 로튼프룻츠 서울사무소에서 다시 흥읍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마강국에게 말했다.

“네가 오늘 수고했어.”

“뭘요. 월급에 보너스 꼬박꼬박 받았으니, 보너스 값 했다고 치죠.”

“서 회장 시키는 일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장백주가 스스로 이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어.”

“낙지도 탕탕이 만들어놔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꾸물거리지 않습니까. 그래도 죽은 건 죽은 거죠.”

“…네 말이 맞았으면 좋겠네.”

이른 아침부터 벼락을 맞은 대찬에게 피로가 몰려왔다.

흥읍까지 가는 길에서 대찬은 죽은 듯이 잠들었다.

왕윤수 실장은 경영개선실 인력을 총동원, 장백주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런 움직임은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지금껏 장백주의 손발은 묶어도 목을 조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감출 게 없었다.

이미 장백주는 뭔지는 몰라도 숨기는 게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경영개선실 인력은 장백주 실장의 자택으로 쳐들어갔다.

장백주 실장 못지않게 성질이 더러운 그의 부인이 장판파의 장비처럼 막아섰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회사 수뇌부의 결정입니다. 자택에 장백주 실장님이 숨겨놓은 기밀이 있어 부득이 압수하려 합니다.”

“당신들이 검찰이라도 돼요? 무슨 권한으로 이러는지 모르겠네?”

말이야 부인의 말이 옳다.

하지만 법과 절차를 따질 거였으면 왕윤수 실장이 번드르르하게 ‘초고강도’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초고강도 압박은 법과 절차를 아득히 뛰어넘는 현실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걸 의미했다.

부인의 거센 저항에 경영개선실 직원은 지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협조하지 않으시면 회사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장 실장님에게 소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

그 말에 부인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장백주 실장이 아무리 날고 기는 인물이라지만 그건 필래의 후광 하에서나 가능했다.

필래가 장백주 개인을 찜 쪄 먹으려면 얼마든지 그리할 수 있음을, 부인도 모르지 않았다.

부인이 입을 다물자 경영개선실 직원은 좋은 말로 타일렀다.

“협조하시면 기밀을 입수하는 선에서 끝날 겁니다.”

협조를 안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직원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부인은 알고 있었다.

장백주 실장의 부인은 이를 악물고 직원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경영개선실 직원은 턱짓으로 부하들을 들여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이닥칠 걸 장백주 실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장백주 실장은 왕윤수 실장을 오래 봐와서 잘 알았다.

왕윤수 실장은 치료보다는 예방에 심혈을 기울이는 성격이었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 골몰했다.

그러나 이미 문제가 터진 다음에는 그 누구보다도 냉혹하고 과감한 처방을 내렸다.

위험수위를 넘었다고 판단하면 물불 안 가릴 것이라는 걸 장백주 실장은 알고 있었다.

그는 왕윤수 실장보다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경영개선실 직원이 그의 자택에 들이닥친 그 무렵.

장백주 실장은 홀로 호주에 도착했다.

울런공 별장은 장백주 실장이 직접 발품을 팔아 얻은 곳이었다.

별장의 주소는 물론이고 주변의 지리마저도 빠삭했다.

그는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별장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별장 관리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당분간 오지 말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사모님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요.”

“오붓한 시간? 허.”

서울에서는 저 난리가 벌어졌는데 오붓한 시간을 보내겠다고 관리인마저 내보냈다고?

장백주 실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오붓한 시간을 보낼 거면 오히려 관리인이 더 필요했다.

몇 달째 그 넓은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무리 관리상태가 완벽하다고 해도 남의 손을 빌릴 일이 천지다.

‘그걸 늙은 회장과 마찬가지로 늙어가는 사모님이 직접 맡아서 한다고?’

어림도 없는 일이거니와 그런 허드렛일은 아랫사람한테 맡기고 둘은 둘만의 시간에 집중하는 게 옳았다.

장백주 실장이 접하는 정보들은 죄다 그의 경험과 논리에 비춰 터무니없이 어긋나있었다.

그는 그 터무니없이 어긋난 상황에 단 한 가지의 조건을 추가한다면 말이 된다는 걸 알아냈다.

‘회장의 신변에 문제가 있다. 그 문제를 극비리에 부치고 그 사이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거야.’

장백주 실장은 몇 날 며칠, 별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차를 세워두고 핫도그로 삼시 세끼를 때웠다.

비서실장에 취임하고 나서는 이런 일은 모두 부하들에게 일임해왔다.

그러나 장백주 실장은 이런 일에 있어서 전문가였다.

소싯적부터 해오던 일.

예전보다 군살이 붙고 나잇살은 먹었지만, 감각과 노하우만큼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는 오전과 오후, 하루 두 번 차량 한 대가 오가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그 차량의 뒤를 밟은 결과.

그 차량의 주인이 울런공 병원의 의사라는 걸 알아냈다.

모든 퍼즐은 맞춰졌다.

장백주 실장의 손에 완벽하게 맞춰진 퍼즐이 들렸다.

왕윤수 실장은 경영개선실 직원들을 부려 장백주 실장의 자택에 보관된 회사 내부 자료를 압수했다.

그건 혹시 모를 폭로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지만, 장백주 실장에게 엄중하게 경고하려는 목적이 더 강했다.

그러나 왕윤수 실장이 초고강도라고 자임했던 것이 무색하게, 장백주 실장은 아예 출근도 하지 않은 채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왕윤수 실장은 당혹했다.

‘설마 벌써 알아챈 건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바로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 대표님, 예상보다 일을 빨리 진행해야겠습니다.”

대찬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이유를 묻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실패하셨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대찬은 으레 인사차 건네는 위로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준비가 완벽하게 이뤄진 다음 신호탄을 쏘아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장백주 실장이 화약총을 빼앗더니 제멋대로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불완전한 상태에서 모든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대찬은 즉시 로튼 프룻츠의 경영지원본부를 가동했다.

경영지원본부의 본부장으로 선임한 추승호 이사를 불러 지시했다.

“필래지주가 자사주로 보유하고 있는 3%의 지분을 우리 회사 지분과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 그대로입니다. 바로 진행해주십시오.”

“우리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딜입니다. 이렇게 되면 필래가 우리 회사에 보유한 지분이 10%가 넘게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쵸 후쿠히로 회장 때 그 홍역을 치르고도 또다시 화를 부르려고 하십니까? 아무리 대표님과 필래가 가깝다고 하지만 경영권이 불안해진다는 구설에 다시 휘말릴 겁니다.”

“네, 주가는 떨어질 테고요.”

“그걸 계산하지 않으셨을 리는 없고요.”

“네.”

“…그걸 감수하면서 추진할 이유가 있습니까?”

대찬은 추승호 이사에게 내막을 모두 일러주었다.

시한부로 폭로가 예정된 비밀이었다.

대찬이 내막을 모두 알리자 추승호 이사는 경악했다.

“그, 그런 일이…….”

“일단 언론에는 필래와의 결속을 다져 동맹에 가까운 협력관계를 추구한다. 이를 통해 사업역량을 강화한다고 밝히세요.”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필요한 일이겠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한 가지 더요……?”

이미 기절할 지경인데 뭘 더 얹겠단 말인가.

추승호 이사는 침을 꼴깍 삼켰다.

“필래 비바체를 인수할 겁니다.”

“뭐, 뭐라고요!”

그는 이제 아예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던 추승호 이사는 대찬에게 읍소하듯 말했다.

“비바체는 우리가 삼키기에 너무 큰 회사입니다!”

“알고 있어요. 컨소시엄(Consortium·인수를 위해 결성된 조합이나 협회)을 구성해야겠습니다.”

“그, 그래도…….”

“비바체는 유망한 회사이니까 군침을 흘리는 금융사가 많을 겁니다. 파트너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얼떨떨합니다.”

“비바체의 우리사주조합 지분 8.5%는 아군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걸 고려하고, 단독으로도 아니고 컨소시엄을 구성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추승호 이사는 침을 꼴깍 삼켰다.

“확실히 계획대로만 추진되면…….”

“추 이사님의 실력이라면 계획을 충분히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대찬이 신뢰를 표하자, 추승호 이사의 흔들리던 동공이 멎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로튼 프룻츠가 대찬의 말 한 마디에 발칵 뒤집혔다.

사업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점점 여유를 찾던 직원들은 벼락처럼 떨어진 지시에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을 차렸다.

로튼 프룻츠와 필래지주 사이의 지분교환이 알려지자 재계가 술렁였다.

아무리 동맹에 가까운 협력관계라지만 단순히 사업역량 강화를 위한 딜은 아니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역시 눈 가리고 아웅은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었다.

그 이면에 도대체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인가.

그걸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주가는 갖가지 ‘썰’이 난무하는 것과 맞물려 출렁였다.

도대체 호재로 봐야 할지 악재로 봐야 할지 주주들은 갈팡질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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