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13화
장백주 실장은 그 부사장이 왕윤수의 사람이란 걸 버젓이 알고도 그랬으니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왕윤수 실장은 경영개선실의 이름으로 회장 비서실의 월권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계열사에서 사건이 터지면 계열사의 감사팀에서 움직이는 게 맞는다는 원론적인 주장을 폈다.
이게 또 장백주 실장의 귀에 들어갔다.
장백주 실장은 왕윤수 실장처럼 점잖은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쾅!
경영개선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 왕윤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왕윤수.”
“장 실장, 체면 지켜.”
“지랄. 넌 지킬 게 있지만 나는 지킬 게 없어. 개털이라고. 알아?”
“보는 눈 많아.”
장백주 실장은 픽 웃었다.
“왕윤수 넌 항상 그랬지. 겉으론 상식인인 척, 합리주의자인 척 굴면서 뒤로는 온갖 구린 짓은 다 하고 다니잖아?”
“말조심해. 마지막 경고야.”
“네까짓 게 뭔데 경고야!”
왕윤수 실장은 장백주 실장의 으름장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장 실장,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난 경영개선실장으로서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어.”
“네가 내 상사냐? 엉? 내 위에는 회장님 하나밖에 없어. 알아!”
“다른 사람이었으면 원아웃에 날아갔어. 너니까 스트라이크 주는 거야.”
“아주 눈물이 다 난다, 이 자식아.”
장백주 실장은 눈을 부릅떠 왕윤수 실장을 바라보곤 그대로 휙 나가버렸다.
왕윤수 실장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소식을 들은 김태준 사장이 왕윤수 실장을 찾아갔다.
“왕윤수, 좀 참자.”
“김 사장, 장백주 그 새끼 하는 꼴을 보고도 이래?”
김태준 사장은 그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래? 지금 우리 중요한 작업 중이야.”
“…….”
“장백주가 망나니처럼 날뛰면 골치 아파져. 알잖아.”
장백주 실장은 그룹의 음양을 다 아는 인물이었다.
그가 말썽을 피우면 곤란해진다.
왕윤수 실장은 이마를 매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참아야지…….”
왕윤수 실장은 참겠다고 했지만 장백주 실장은 역시나 참지 않았다.
“더러운 새끼가 깨끗한 척하기는. 뭐, 경영개선실장? 제일 먼저 개선돼야 할 놈이 뭔 놈의 개선실장.”
장백주 실장은 비서실 직원에게 사나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야.”
“네, 실장님.”
“왕윤수 그 새끼 버릇 좀 고쳐줘야겠다.”
“…어, 어떻게 말입니까?”
“뭐? 나더러 체면을 지키라고? 웃기고 있네.”
장백주 실장은 제 화를 이기지 못해 한참 씩씩거렸다.
비서실 직원은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꺼낼 말을 한참 고민했다.
“…….”
“그놈 발등에 불 떨어져도 체면타령 할 수 있나 보자고.”
“어떻게 할까요?”
“24시간 사람 붙여서 감시해.”
“네? …네, 알겠습니다.”
장백주 실장은 직원의 당황한 표정을 흘겨보고는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이런 쪽으론 우리가 잘하잖아, 안 들키고. 그렇지?”
“그런데 …괜찮을까요?”
“이게 다 회사를 위한 일이야. 새내기 부회장도 왕윤수 그놈이 믿고 쓸 칼이 아니란 걸 알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장백주 실장의 말에 직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왕윤수 실장은 사찰 당했다.
장백주 실장의 말마따나 이런 쪽에 있어서만큼은 회장 비서실이 프로였다.
그들은 조를 짜서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왕 실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06:42 자택 출발(벤츠 차량)
07:11 회사 도착
09:25 회사 출발(기륭SUV 차량)
09:43 역삼동 도착(로튼 프룻츠 서울 사무소)
11:10 역삼동 출발(기륭SUV 차량)
11:40 회사 앞 스시토리에서 점심
*김태준 사장 동석하였음
14:12 회사 복귀
15:04 회사 출발(대연 경차)
16:11 흥읍시 제민동 로튼 프룻츠 사옥 도착(출입제한으로 세부내용 작성 불가)
23:49 로튼 프룻츠 사옥 출발(대연 경차)
00:51 자택 도착
왕윤수 실장의 거취는 분 단위의 보고서로 작성돼 장백주 실장에게 보고되었다.
장백주 실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왕윤수 이 새끼, 누가 보면 로튼 직원인 줄 알겠구만. 조대찬이를 왜 이렇게 길게 만나?”
그는 경영 감각은 둔해도 잔머리는 기민하게 돌아가는 인물이었다.
왕윤수가 벤츠로 출근해 외근은 다른 차로 두 번이나 갈아탔다니.
“게다가 평생 타지도 않은 경차로 갈아타? 남의 눈에 띄기 싫다 이거지.”
김태준 사장과의 점심식사는 2시간이 넘어갔다.
밥만 먹은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는 수상함을 직감했다.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거지……?’
장백주 실장은 하루 단위로 올라오는 보고서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정리해 자신에게 올리도록 조치했다.
뭔지는 몰라도 상황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건 분명했다.
하루에 한 번 보고를 받는 것으로는 그들의 행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역시 다음날도 왕 실장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04:25 자택 출발(대연 경차)
05:31 회사 도착
08:25 회사 출발(기륭SUV 차량)
08:44 역삼동 도착(로튼프룻츠 서울사무소)
*08:49 조대찬 대표 서울사무소 지하주차장 도착(랜드로버 디스커버리 차량)
8시 49분.
대찬은 흥읍 사옥이 아니라 역삼동 서울 사무소에 도착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에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한 대찬은 뻑뻑한 눈을 비볐다.
마강국은 그를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 잠은 충분히 주무셔야 돼요.”
“알긴 아는데 쉽지가 않네.”
대찬은 마강국을 보고 웃으며 덧붙였다.
“나도 나지만 강국이 너도 잠은 충분히 자둬야 돼. 요즘 안 그래도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할 곳이 많은데 잠 제대로 안 자면 사고 나요.”
“걱정 마세요. 베스트 드라이버 아닙니까.”
“운전은 마강국이 끝내주지.”
“저는 차에 있을까요?”
“차는 불편하잖아. 얘기가 길어질 거 같은데 사무실 같이 올라가지? 거기 수면실 있어. 눈 좀 붙여.”
“조 대표님은 아주 훌륭한 보스이십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나한테 꼬박꼬박 존댓말 붙여가면서도 나랑 다니는 거 아니겠어?”
대찬은 웃으면서 차에서 내렸다.
마강국도 으어어, 괴상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곤 밖으로 나왔다.
출근 시간이라 흥읍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꽉 막혀서 운전 중의 피로가 더 쌓인 상황이었다.
대찬은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비적비적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마강국은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대찬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런데 마강국이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대찬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뭐야, 안 타?”
“잠깐만.”
일부러 소리를 죽여 말하는 마강국을 보고, 대찬은 그가 시답잖은 장난이나 치자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대찬은 침을 삼키고 조심스레 엘리베이터 밖으로 몸을 빼냈다.
그리고는 마강국처럼 소리를 죽여 물었다.
“뭐야, 왜 그래?”
“잠깐 여기 있어 봐.”
마강국은 그렇게 말하고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뛰쳐나갔다.
대찬은 고개를 빠끔 내밀고 마강국을 지켜봤다.
우당탕, 지하주차장이라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마강국은 톰슨가젤의 모가지를 물어뜯는 수사자처럼 육박했다.
그는 단숨에 주차된 대찬의 차량 맞은편에 숨어있는 녀석을 낚아챘다.
녀석은 몇 걸음 도망가지도 못하고 체대 출신, 경호 경력 다수, 대한체육회장배 전국생활체육 육상대회 단거리 동메달에 빛나는 마강국에게 덜미가 잡혔다.
장백주의 치타라고 불리던 이름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마강국의 터질 듯한 팔 근육에 제압된 그는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외쳤다.
“왜, 왜 이래요!”
“왜 이러느냐기에는 행동거지가 너무 수상해서. 잠깐 수색이 있겠습니다.”
“내, 내놔요!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마강국은 우악스런 악력으로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았다.
“제 직감이 틀렸다면 경찰에 신고해도 좋아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대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마강국에게 다가갔다.
“강국아, 너 헛발질한 거면 나 곤란해진다.”
“걱정하지 마. 조대찬 대표님 외근비서 된 게 단순한 빽이 아니란 걸 증명해주지.”
마강국이 그의 휴대폰을 빼앗는 사이 도망가려던 놈을 대찬이 점잖게 제지했다.
“미안합니다. 저 녀석이 잘못 짚은 거라면 제가 책임질 테니 잠깐 가만히 계셔주셔야겠습니다.”
“…….”
그 순간 치타, 아니 톰슨가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절망했다.
벌써부터 장백주 실장의 구두코에 박살이 날 자신의 조인트가 걱정되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휴대폰을 뒤지던 마강국은 잠깐 톰슨가젤을 바라봤다.
톰슨가젤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왜, 왜요…….”
“손가락 좀.”
마강국은 톰슨가젤의 손가락을 휴대폰의 뒤편에 갖다 대었다.
지문인식이 되어 그제야 잠금이 풀렸다.
잠깐 이것저것을 뒤지던 마강국의 미간에는 주름이 더욱 단단히 잡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대찬을 올려다봤다.
“이거 심상치가 않은데요.”
대찬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
“심상치가 않다고?”
“보세요.”
마강국은 대찬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톰슨가젤의 보고는 오전 8시 49분이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무기력한 보고가 상사에게 육성으로 전달되었다.
“선배, 망했어요…….”
전말을 전해 들은 상사는 부리나케 장백주 실장에게 달려갔다.
장백주 실장의 대답은 말이 아니라 당연히 조인트였다.
그가 길길이 날뛰며 부하를 쥐 잡듯이 잡으려는 찰나.
역시 상황을 접수한 김태준 사장이 노한 얼굴로 비서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장백주, 너 선 넘었어.”
“김 사장.”
“동료를 사찰해? 너 제정신이야?”
부하를 급히 내쫓은 장백주 실장은 불쌍한 척 하소연하려다가 태도를 돌변했다.
불쌍한 척한다고 봐줄 위인이 아니니, 차라리 배 째라 식으로 나오는 게 나았다.
“김 사장, 왕윤수 이거 이상하다고.”
“이상하든 말든 넌 왕 실장 사찰할 권한이 없어.”
“왜 없어? 그 새끼는 경영개선실장이랍시고 나한테 쪽을 주는데. 회장 비서실장으로서 오너 몰래 수상한 짓거리 하는 놈 뒤 캐는 게 뭐가 문제야?”
“너도 지금 오너 몰래 수상한 짓거리 하고 있는 거 아니냐?”
“이거 왜 이래. 내가 회장님 원투 데이 모셨냐? 내가 CS를 몰라? CS가 여기 있어도 마찬가지로 지시했을 걸.”
“아니, 넌 회장님을 몰라.”
네가 서 회장을 파악했으면 너한테만 중요한 비밀을 감출 리가 없지.
김태준 사장은 장백주 실장에게 검지를 칼처럼 겨눴다.
“이거, 부회장님한테 보고할 거야.”
“김태준.”
“그러니까 넌 잠자코 처분이나 기다려. 이 이상 난동부리면 부회장님이 아니라 내가 널 찍어낼 테니까.”
“김태준, 네가 모시는 주군이 서청수냐, 서원웅이냐?”
“맘대로 계급장 떼고 부르지 마.”
“이거 가만 보니 왕윤수나 너나 반동분자 아니야? 회장님 잠깐 출타 중이시라고 서원웅 끼고 고명대신 놀이하는 거 아니냐고.”
“말조심해. 이 이상 안 봐준다.”
씨히발, 장백주 실장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쌍욕을 발사했다.
“야, 네가 뭔데 날 봐주고 말고 해. 네가 내 주인이냐?”
“장백주, 잠자코 있으라고 했어.”
김태준 사장은 분명한 경고를 남기고 비서실을 떠났다.
그의 등줄기에는 끈적한 식은땀이 맺혔다.
장백주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면 서청수 회장의 비밀이 탄로 나는 건 시간문제다.
장백주 실장은 장백주 실장대로 마음이 급해졌다.
이게 서원웅 귀에 들어가면 안 그래도 간당간당하던 모가지가 완전히 날아가게 생겼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했다.
장백주 실장은 여태 서청수 회장의 비호를 받으면서 커왔다.
실력이 조금 모자라도, 우직하고 충성스럽고 보스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불법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그 스타일 덕분에.
김태준과 왕윤수가 동시에 자신을 압박하는 상황.
게다가 실질적인 오너가 된 서원웅의 눈 밖에도 난 마당.
이런 상황에서 비빌 언덕은 서청수 회장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