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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12화 (512/556)

난 할 수 있어 512화

“둘이 사랑하는데 남의 이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옳지, 그렇게 말해야지. 그럼 받아들인 걸로 알겠네. 싫다면 비바체도 안 넘겨.”

대찬은 서청수 회장의 휠체어를 밀고 별장의 정원으로 나갔다.

턱시도니 웨딩드레스니 하는 건 그야말로 소꿉장난이라 생략.

따뜻하게 부는 바람이 하객이었고 멀리 들리는 파도소리가 축가였다.

대찬은 이 결혼식의 주례를 기꺼이 맡았다.

대찬은 웃으며 서청수 회장을 바라봤다.

“먼저 신랑께 묻겠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맞이하여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3개월만 남은 평생.

서청수 회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찬은 양윤희를 바라봤다.

“신랑이 큰 소리로 예, 하고 맹세했습니다. 신부는 신랑을 맞이하여 평생 진실될 것을 맹세합니까?”

양윤희는 여전히 남사스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것으로 두 분의 결혼이 원만하게 이뤄진 것을 엄숙하게 선서합니다.”

서청수 회장과 양윤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둘 사이에 젊은이의 진한 사랑은 없었다.

다만 서청수 회장은 의탁할 사람이 양윤희뿐이었고, 양윤희 또한 그런 그의 의탁을 기꺼이 받아들일 정이 있었다.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비록 시작은 필래그룹의 경영권을 사수하기 위한 지극히 자본주의적이고 불순한 동기였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만큼은 인간적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미리 준비한 반지를 양윤희에게 끼워주며 말했다.

“참 내가 오랜 세월 못되게 굴었네. 미안해.”

“이제 와서 무슨. 됐어요.”

“나 죽거든 꼭 호사를 누리도록 해. 나처럼 추하게 말고 점잖게 나이 든 잘생긴 사람하고 마음껏 사랑도 해.”

“…됐어요.”

“그간 못살게 굴어서 미안했어.”

양윤희의 얼굴에는 웃음도 울음도 아닌 감정이 잠깐 머물다 떠났다.

대찬은 양윤희 혼자서는 하기 힘들었던 일들을 해결해주고 호주 울런공의 별장을 떠났다.

키가 닿지 않아 닦지 못한 선반의 먼지를 닦아주고.

힘이 부족해 꽉 조이지 못한 나사를 조여주고.

두는 법을 몰라 상대를 해주지 못했던 서청수 회장의 바둑 친구가 되어주었다.

떠나는 대찬에게 서청수 회장이 손을 꼭 잡고 당부를 남겼다.

“난 정도 못 붙인 남반구에서 죽을 생각이 없어. 조만간 원웅이한테도 사실을 알리고 한국으로 들어갈 거야.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우리 둘 사이에 약속된 바를 일사천리로 진행할 걸세. 그때를 위해 차질 없이 만반의 준비를 해놓도록.”

“알겠습니다. 모쪼록 돌아오실 때까지 즐거운 신혼생활 보내십시오.”

“허허, 신혼이라.”

대찬은 꾸벅 깊이 허리를 숙이고 서청수 회장의 곁을 떠났다.

대찬은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김태준, 왕윤수와 마주 앉았다.

김태준과 왕윤수도 서청수 회장에게 전해 들어 전말을 알고 있었다.

왕윤수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찬에게 말했다.

“이 와중에 챙길 걸 챙기시니 조 대표님도 어엿한 자본주의자이십니다.”

“상식적인 행보일 뿐입니다. 회삿돈을 움직이려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게 아니면 횡령입니다.”

“이미 회장님께서 재가하신 일이니 더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찬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왕 실장님께서는 거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신 듯합니다.”

“제가 마음에 들면 조 대표님은 거래에 실패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충분히 기뻐하셔도 됩니다.”

대찬과 왕윤수 사이에 은근한 긴장이 흘렀다.

그러자 둘과 막역한 사이인 김태준 사장이 개입했다.

“자자, 이미 결정된 일을 갖고 더 얘기할 이유는 없어요. 시간낭비입니다.”

그 중재에 대찬과 왕윤수는 한 발씩 물러났다.

김태준 사장은 어흠, 헛기침을 하고 둘에게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입니다. 바로 비바체 매각 절차에 들어가고, 조 대표님도 약속대로 지분교환과 지분매입을 진행해주십시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원웅이에게는…….”

김태준 사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조 대표님이 좀 수고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김이나 왕이 일러주는 것보다는 자신의 입으로 전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대찬은 그들과 헤어지고 바로 서원웅을 찾아갔다.

서원웅은 밝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내가 부회장 노릇 하는 게 그렇게 걱정돼? 요즘 자주 온다?”

“잘하고 있나 감시하러 왔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와 마주 앉았다.

“일이 달라지진 않았는데 부회장이라는 간판만으로 어깨가 무겁긴 하더라. 많이 좀 도와줘.”

“지금도 잘하고 있는데 뭘…….”

대찬은 할 말이 자꾸 입 안에만 맴돌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부쩍 천진한 얼굴을 한 서원웅에게 가슴이 주저앉는 비보를 전달할 용기가 쉬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만 했다.

대찬은 주먹을 꼭 쥐고 서원웅을 바라봤다.

“원웅아.”

“응?”

“안 좋은 소식 좀 전할게.”

서원웅은 당황한 웃음을 지었다.

“뭐야? 그냥 얘기하면 되지 사람 겁을 주고…….”

대찬은 마주 앉은 서원웅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는 서원웅의 손을 꼭 쥐고 입술을 뗐다.

대찬의 말이 시작되자 서원웅의 눈이 커졌다.

말이 진행될수록 서원웅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이내 집무실 바깥으로 흐흐흐,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서가 퇴근하고 없는 시간이라 그 울음소리를 듣는 사람은 오로지 대찬뿐이었다.

대찬은 비보를 전한 다음에 바로 냉혹한 돈 얘기를 해야 하는 처지가 싫었다.

하지만 이는 대찬이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

대찬은 서원웅에게 감정을 추스를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서원웅이 조금 진정되자 대찬은 다시 돈의 얘기로 넘어갔다.

경영권 방어에 백기사로 나서주는 대신 비바체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서청수 회장님과 얘기가 끝난 일이다.

상속의 당사자는 서 회장님과 너, 둘이니 너 또한 이 일에 결정권이 있다.

네가 싫다면 비바체 인수는 포기하겠다.

대신, 힘써 도와줄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아둬라.

대찬은 오랜 친구가 아니라 협상 상대로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서원웅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김태준 사장과 왕윤수 실장 역시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미 슬퍼할 만큼 슬퍼한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자기 할 일에 매진했다.

서청수 회장의 일은 극비.

따라서 아랫사람을 부려 업무를 처리할 수도 없었다.

철저히 두 사람의 힘만으로 해내야 했다.

둘은 밤낮 할 것 없이 서청수 회장의 몫을 최대한 온전히 서원웅에게 전하기 위해 골몰하고 또 골몰했다.

김태준 사장과 왕윤수 실장이 바쁜 만큼 한가한 사람이 있었다.

장백주 실장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호주로 떠나기 전 장백주 실장에게 당부를 남겼다.

‘당분간 원웅이한테 그룹 전체의 사무를 맡겨볼 생각이야.’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영화 사도 봤나? 거기서 영조가 사도세자한테 섭정을 맡기고 뒤로 물러났는데 사사건건 간섭을 하니 애가 위축이 되질 않나.’

-‘예, 그렇죠.’

‘그래서 나는 훌쩍 떠나줄 셈이야. 당분간 호주에 머물겠네. 양윤희도 같이 가 있을 거야. 회사 일은 원웅이한테 일임할 테니 자네도 힘써 도와.’

-‘저는 명색이 회장님 비서실장인데….’

‘자네도 당분간은 연봉 도둑질이나 하면서 머리 좀 식히라고. 유급휴가라고 생각해. 그간 고생했잖나.’

서청수 회장은 그렇게 말하고 장백주 실장의 연락을 일절 받지 않았다.

말단 회사원이면 유급휴가를 반기겠지만 장백주 실장은 아니었다.

필래그룹 권력의 최정점에 있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그러니 어째 자신의 존재가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자기한테 설설 기던 인간들도 은근히 한물간 퇴물로 취급하는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자신과 더불어 김왕장으로 묶이던 김태준 사장과 왕윤수 실장은 서원웅 체제하에서 더욱 훨훨 날게 됐다.

신세가 더 극명히 비교되었다.

장백주 실장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김태준과 왕윤수를 찾았다.

그는 김왕장의 영광을 서원웅 체제에서도 누려야만 했다.

만약 자기가 뒤처진다면?

응당 오랜 동료인 김태준과 왕윤수가 자신을 앞에서 끌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백주 실장은 휴대폰 연락처를 뒤져 김태준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왕윤수 그 깐깐징어보다는 김태준이가 훨씬 낫지.’

저돌적인 자신과 깐깐한 왕윤수 실장 사이를 김태준 사장이 항상 적절히 중재했다.

그렇기에 장백주 실장은 왕윤수보다는 김태준을 신뢰했다.

김태준 사장은 자신이 전화를 하면 곧잘 받아주었다.

단둘이 술도 적잖이 마시는 사이였다.

그런데 여러 번 전화를 거는데도 김태준 사장은 응답하지 않았다.

‘뭐야?’

꿩 대신 닭이라고 왕윤수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마찬가지로 묵묵부답.

장백주 실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것들이 지금 나 끈 떨어졌다고 손절매하는 거야 뭐야!”

장백주 실장은 탁자를 쾅 내리쳤다.

결국 그날 장백주 실장은 혼자서 술을 마셔야만 했다.

“이 새끼들이 날 무시하고 말이야……. 나 장백주야, 장백주. 서청수의 오른팔 장백주라고…….”

그는 술이 담겼던 글라스의 얼음을 빠드득 씹어 먹었다.

다음날.

장백주 실장은 오랫동안 비워져있던 회장실에 들어갔다.

서청수 회장이 이곳에서 업무를 보던 것도 이제는 여러 달 전의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회장실 구석에 박혀 있던 수석에도 먼지 한 톨이 없었다.

비서실 직원들이 하루에 두 번씩 청소를 해둔 덕분이었다.

장백주 실장은 서청수 회장의 명패를 슬슬 쓸면서 쓸데없이 비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장님이 안 계셔도 저는 제 일을 하겠습니다.”

그는 비서실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서청수 회장의 칩거가 길어지면서 그들도 무한정 대기 상태였다.

장백주 실장이 직접 가려 뽑은 비서실 직원들은 대체로 장백주 실장과 쿵짝이 잘 맞았다.

괄괄하고 술 좋아하고 권력의 부스러기를 좀먹는 걸 좋아했다.

장백주 실장은 군대처럼 그들을 사열해놓고 말했다.

“야, 너희.”

“네, 실장님.”

“이대로도 괜찮냐?”

“…예?”

“비서실 위신이 땅에 떨어졌는데도 괜찮냐고.”

맨 앞에 선 직원은 장백주 실장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은 술 냄새를 감지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양반 어제 술 진탕 마셨구만. 술이 덜 깼네.’

장백주 실장은 부리부리한 고리눈을 홉뜨며 말했다.

“우리는 회장님의 최측근이야. 회장님이 머리면 우리는 손이고 발이라고.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 안 그래?”

장백주 실장은 술 냄새에 질려버린 맨 앞의 직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직원은 허리를 곧추 펴며 대답했다.

“넵, 맞습니다.”

“얘들아, 밥값 좀 하자.”

장백주 실장의 그 선언은 손발이 머리 없이 따로 놀겠다는 뜻이었다.

두뇌의 지시를 받지 않은 손발에 가당한 것은 무조건반사일 뿐이었다.

눈에 뭐가 날아오면 눈을 감거나, 뜨거운 게 닿으면 얼른 떼어내거나.

그 정도가 허락된 범위이다.

장백주 실장의 선언은 그야말로 월권이었다.

장백주 실장은 그룹 회장 비서실의 권한으로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그건 소외당한 설움에 대한 한풀이이자, 자기가 아직도 쓸모가 있음을 부회장에게 과시하는 행위였다.

경영개선실장으로 필래그룹의 실질적인 조정자 역할을 하는 왕윤수 실장의 업무 스타일은 거미였다.

거미줄을 넓게 뻗쳐놓고, 자기는 거미줄 가운데에 유유자적했다.

그러다 거미줄의 어디선가 진동이 느껴지면 바로 출동해 사태를 해결했다.

그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모든 걸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장백주 실장이 거미줄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니 왕윤수 실장이 모를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 난동을 피우나 그를 방관하던 왕윤수 실장은, 오래 참지 못했다.

필래제과의 부사장이 회식 자리에서 ‘서원웅 회장님을 위하여’라고 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장백주 실장이 그를 회장 비서실로 소환했단다.

회장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계시는데 이게 무슨 망동이냐며.

장백주 실장이 필래제과 부사장의 면전에 대고 쩌렁쩌렁하게 포효했단다.

‘이 새끼가 미쳤나…….’

필래제과의 부사장은 왕윤수 실장의 사람이었다.

왕윤수 실장이 필래제과의 고문을 역임하던 무렵 크게 아끼던 이였다.

가뜩이나 장백주 실장이 쓸데없는 소란을 피우고 다니는 게 불쾌하던 차였다.

이제 자기 사람을 건드리기까지 하니 왕윤수 실장은 더 인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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